<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우주 전쟁』, 『투명 인간』, 『모로 박사의 섬』 그리고 『타임머신』을 포함한 웰스의 작품은 영화, 텔레비전, 파생소설(derivative novels), 만화, 그리고 다른 매체들을 통해 여러 차례 개작되어왔다. 그러나 단편 「<크로닉 아르고>호」는 모두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래픽 노블로도 만들어진다는 이  「<크로닉 아르고>호」를 비롯한 단편들이 수록되어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고 싶게 만드는 웰스의 소설집이다.

 

 

 

여행기 문학의 출발이자 근대 소설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인 묘사, 무인도라는 황량한 환경 속에서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의 영웅적 면모, 그의 독실한 신앙심 등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요인들이 무수하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와 같이 수많은 장르의 작품들의 원작이 된 작품.

 

 

 

 

요새 들어 일본의 장르소설에 조금씩 질려갈 즈음 참 괜찮은 작품이다 싶었다. 미스터리하지만 과하지 않은 데다가 성장통을 이야기하는 세련된 소설이라 생각한다. 

 

 

 

 

 

 

30년이 넘은 소설이지만 여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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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열린책들 세계문학 162
루쉰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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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단편 「아Q정전阿Q正傳」은 그 제목의 유사함 때문에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아비정전》의 마지막 대사, 그리고 나아가(또 한번의 유사성 때문에) 《버디Birdy》에서의 새가 되어 날고자 하는 열망을 돌이켜보자면 루쉰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이 루쉰의 중단편집에 15편이나 되는 작품이 담겨 있다고 해도 유독 「아Q정전」을 언급하고, 눈여겨보고, 곱씹어보는 등의 노력을 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연유에서일지도 모르고, 과도한 통속성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혹 아니면, 「자네들은 입안에 독을 뿜는 이빨이 없는데도 어째서 이마에 <독사>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거지들을 끌어들여 때려죽이려 하는가?」하고 침울하게 내뱉는 N 선생(「머리털 이야기」)이나 붓으로 종이 위에 동그라미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아Q(「아Q정전」)의 정신의 간극에서 휘둘리고 있을지도. 그래서 이게 과연 아Q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가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어서인지, 애달프게 생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아Q정전」이 고전으로 읽히는 것은 좀 수상한 구석이 있다. 단순히 고전이라 치부해 버리고서 때에 따라 꺼내보는, 그런 단발성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헉슬리Aldous Huxley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움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연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그 목적은 선행의 대상을 기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다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스스로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자각하는 게 그 목적인 것이다.>라고. 기만하고 응징하고 학대하는 ㅡ 물론 스스로에게 ㅡ 아Q의 정신 승리법에는 그래서 효용과 미학적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거다.
 

한 가지 더. 댕강! 하고 멋지게 목이 잘리지 않고 재미없게 총살 당했다는 것이 아Q를 <조금은> 불쌍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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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자본주의 vs 야수 자본주의 - 번영과 탐욕의 두 얼굴, 자본주의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하워드 블룸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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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가 월요일 0시에 시작되었다면, 인류가 출현한 것은 고작 일요일 자정 3분 전에 불과하다. 우리와,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멀리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작아서 아예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에 비누 광고가 많아 드라마를 <솝 오페라soap opera>라고 부를 정도였고 일류 부자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면직물은 이제 면 티셔츠가 되어 세계 최빈국에서도 입는 평범한 옷이 되었다. 여기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하워드 블룸은 허영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탄생시켰다고 봤다. 붐과 붕괴를 통해 조그만 곡물창고가 쥐들로 들끓어 더 이상 그곳은 쥐들의 서식지로는 적합성을 잃게 되고,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의 작은 동네에 불과했던 시카고는 철도로 인해 그야말로 미래를 보장하는 뉴타운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용도변경 진자가 개입하여 이것들을 팽창의 단계에서 합체의 단계로, 또 소화시키는 단계로의 변화가 필요하게 됐다.
 


인간의 수명에 따라 누구나 생애 한 번 정도는 경제대공황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사실일까. 또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의 잔인한 본성에서 기인하는 걸까(실제로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실시한 닌자론NINJA Loan으로 대표되는 서브프라임론은 결국 양의 탈을 쓴 악마가 됐다. 이것으로 예가 부족하다면 미국 문명이 지구를 강간하고 있다는 식의 농담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허영심이 세계발전에 공헌했다고 하며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예로 든 것은 재미있다. 그것은 이렇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실에만 안주하여 멸종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 허영심이 충만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패션에 필요한 실과 바늘을 발명해 인공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물질적 행복은 우리의 꿈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키운 꿈을 바탕으로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낸다>고(p.296).
 


『천재 자본주의 VS 야수 자본주의』는 제목과 같이 경제의 미스터리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메커니즘에 그 답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의 근본에는 <인간의 감정>이 동력으로서 작용한다. 가난한 사람은 파라핀 왁스를, 그보다 사정이 나은 사람은 샹들리에에 꽂힌 3,000개의 초를, 더 부자인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 밤에도 환하게 촛불을 밝혀놓고 무도회와 파티를 열었을 것이고, 그로부터 후에 촛불 열 개 밝기의 등잔램프가 등장했다. 또 폭로성 저널리즘은 그런 기사를 내보낸 사람들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고, 영국의 티타임은 가족과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유대감을 지속시켜주지 않는가. 사실 몇 가지의 예를 들긴 했지만 이것은 단지 피상적인 것들에 불과하여 하워드 블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일부분일 뿐이다. 실제로 책은 비난의 표적이 된 물질만능주의에 숨겨진 특별한 어떤 것을 탐색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사실일까? 정말 사치스러운 것을 찾는 인간의 탐욕이 사실은 세상을 발전시키는 전략 중 하나일까? 하워드 블룸은 감정의 산물, 인간이 그 중심점에 선 자본주의의 ㅡ 특히 서구의 ㅡ 시스템을 기존의 당연했던 이론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보여줌으로써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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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 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 김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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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보이지 않는 고릴라> 영상을 본 것이 기억난다(theinvisiblegorilla.com에 가면 볼 수 있다). 흰 셔츠와 검은 셔츠를 입은 두 팀의 학생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농구공을 패스하던 그 영상을. 그래서 웹사이트에 들어가 다시 한 번 봤다. 처음엔 언제 고릴라가 나오지,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더니 슬그머니(정말 천천히) 고릴라 하나가 나왔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서 이번엔 농구공의 패스에만 집중해서 한 번 더 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대체 고릴라가 어디 있다는 거야!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밝혀내고 있다. 위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 영상은, 어딘가에 시선을 둔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의식하며> 본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말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눈을 그쪽으로 향하고 있을 뿐인 거다(그래서 나도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이 책은 이런 주의력의 착각을 비롯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변해만가는 기억력, 실력이 낮으면 낮을수록 자신감만은 높다는 자신감 착각, 내가 산 주식은 다 떨어지고 그것을 팔면 상한가를 친다고 생각하는 지식 착각 등을 다룬다.


제가 당신 앞에 돼지 한 마리를 몰고 오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이 돼지는 말을 할 수 있답니다.」
당신은 「어머, 정말요? 보여주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지팡이를 흔들고 돼지는 말을 합니다.
당신은 「세상에! 놀라워요!」라고 할 것입니다.
「에이, 그래봤자 겨우 한 마리잖아요. 몇 마리 더 보여주면 믿을게요.」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ㅡ 본문 p.257 (제5장 <원인 착각> 中)



텍스트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기억력과 주의력, 지식을 인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말도 안 되는 자신감의 착각으로 한 남자를 11년 간이나 옥살이하게 만든 이야기에 나는 뜨악했다). 수도 없는 실례와 셀 수 없는 재미있는 실험들 ㅡ 물론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준다 ㅡ 이 책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의 행동 중 일상의 착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는 하나도 없으며 이 착각을 하지 않는 사람 또한 한 명도 없다는 저자들의 말을,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인정했다. 나는 평소에 거의 발생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경우를 상정하여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냐며 항상 핀잔을 주었다. 물론 나도 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가능성이 적은 것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고로(『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읽었기에 더욱) 앞으로 단언하지 않는 버릇은 고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자칫 우유부단해 보일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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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 모르면 당하는 확률과 통계의 놀라운 실체
카이저 펑 지음, 황덕창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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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흔히, 일상생활에 적용했을 때 상품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과학의 특정 분야나 순전히 흥미를 유발하는 주제에만 관심을 갖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기 쉽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넘버스...』는 매우 쉬우면서도 유용하고 흥미롭다. 디즈니월드에서 고작 2분 동안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60분이나 줄을 서야 하고, 여의치 않았을 때 계속해서 놀이기구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건 얼핏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연상케 한다.


설계 잘못이 아니라 이용객의 변동폭이 문제다.
디즈니가 각 놀이공원을 건설할 때는
관람객 수요의 90%를 거뜬히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다시 말해서 이 공원은 이론적으로는 열흘 중에 아흐레는 수용 여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언제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ㅡ 본문 p.29


통계학자들은 100년 만의 허리케인은 역사상 이전 허리케인의 99%보다 더 큰 경제적 피해를 입힌다고 말한다. 또 어느 해든, 허리케인이 상륙해서 이전에 몰아닥쳤던 허리케인의 99%보다 더 큰 경제적 손실을 일으킬 확률은 1%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엄청난 ㅡ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ㅡ 허리케인이 특정 장소를 연속으로 강타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다(이 이유는 책에 나와있지만 지극히 통계라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확률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그럼 결론적으로 <100년 만의 허리케인>은 그 이름부터가 잘못 됐다는 거다. <10년 만의 허리케인> 정도가 맞을지도. 복권에 당첨될 확률,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은 무척 드물다. 이 <드문 것은 불가능한 것>이 통계학자들의 세계관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확률이 적다고 해서 그 일이 절대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확언할 수 있을까. 1%의 확률만 있어도, 언제고 그 일이 터진다고 하면 드물지만 일어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올바를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지, 하고 이 사회의 통계와 확률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 맞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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