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자본주의 vs 야수 자본주의 - 번영과 탐욕의 두 얼굴, 자본주의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하워드 블룸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역사가 월요일 0시에 시작되었다면, 인류가 출현한 것은 고작 일요일 자정 3분 전에 불과하다. 우리와,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멀리서 보면 어마어마하게 작아서 아예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에 비누 광고가 많아 드라마를 <솝 오페라soap opera>라고 부를 정도였고 일류 부자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면직물은 이제 면 티셔츠가 되어 세계 최빈국에서도 입는 평범한 옷이 되었다. 여기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하워드 블룸은 허영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탄생시켰다고 봤다. 붐과 붕괴를 통해 조그만 곡물창고가 쥐들로 들끓어 더 이상 그곳은 쥐들의 서식지로는 적합성을 잃게 되고,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의 작은 동네에 불과했던 시카고는 철도로 인해 그야말로 미래를 보장하는 뉴타운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용도변경 진자가 개입하여 이것들을 팽창의 단계에서 합체의 단계로, 또 소화시키는 단계로의 변화가 필요하게 됐다.
 


인간의 수명에 따라 누구나 생애 한 번 정도는 경제대공황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사실일까. 또 이것이 과연 자본주의의 잔인한 본성에서 기인하는 걸까(실제로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실시한 닌자론NINJA Loan으로 대표되는 서브프라임론은 결국 양의 탈을 쓴 악마가 됐다. 이것으로 예가 부족하다면 미국 문명이 지구를 강간하고 있다는 식의 농담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인간의 허영심이 세계발전에 공헌했다고 하며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예로 든 것은 재미있다. 그것은 이렇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실에만 안주하여 멸종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 허영심이 충만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패션에 필요한 실과 바늘을 발명해 인공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거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물질적 행복은 우리의 꿈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키운 꿈을 바탕으로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낸다>고(p.296).
 


『천재 자본주의 VS 야수 자본주의』는 제목과 같이 경제의 미스터리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메커니즘에 그 답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의 근본에는 <인간의 감정>이 동력으로서 작용한다. 가난한 사람은 파라핀 왁스를, 그보다 사정이 나은 사람은 샹들리에에 꽂힌 3,000개의 초를, 더 부자인 사람은 그것도 모자라 밤에도 환하게 촛불을 밝혀놓고 무도회와 파티를 열었을 것이고, 그로부터 후에 촛불 열 개 밝기의 등잔램프가 등장했다. 또 폭로성 저널리즘은 그런 기사를 내보낸 사람들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고, 영국의 티타임은 가족과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유대감을 지속시켜주지 않는가. 사실 몇 가지의 예를 들긴 했지만 이것은 단지 피상적인 것들에 불과하여 하워드 블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일부분일 뿐이다. 실제로 책은 비난의 표적이 된 물질만능주의에 숨겨진 특별한 어떤 것을 탐색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 구원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사실일까? 정말 사치스러운 것을 찾는 인간의 탐욕이 사실은 세상을 발전시키는 전략 중 하나일까? 하워드 블룸은 감정의 산물, 인간이 그 중심점에 선 자본주의의 ㅡ 특히 서구의 ㅡ 시스템을 기존의 당연했던 이론이 아니라 전혀 새롭게 보여줌으로써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수 있도록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