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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사업장의 근로자와 사용자를 위한 단 한 권의 노동법>
노동. (사실 '근로'나 '근로자'라는 말은 '노동'과 '노동자'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좋지 않은 사례라 생각한다) 이 노동을 하는 노동자, 노동의 시간과 조건, 임금 등, 노동과 노동자에 관련한 법을 다룬 책. (사람은 누구나 노동자가 아니던가?)


<사법부>
현 한국의 사법제도의 신뢰도는 바닥이다. <사법부>는 그 법에 관한 이야기를 시대 순으로 훑으며 한국 현대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다.


<술의 세계사>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자주 마시지도 않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것은 언제고 흥미로운 일이다.


<교양의 효용>
서지정보에 따르면 20세기 초중반의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를 다룬단다. 지금 상황과 얼마나 호응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호가트가 노동자계급 문화에 관심을 가지며 조사했던 것은 오늘날에도 필시 유의미한 결과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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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그룹을 좋아한다. 덕후다? 그러면서 여성이 쓴 소설은 시시하다며 읽지 않는다. 반(反) 페미니스트이다? 걸 그룹을 좋아하지만 여성이 쓴 소설은 읽지 않는다. 덕후에다가 롤리타 콤플렉스, 게다가 현실세계에서 여성과 결별할 만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적 성향이 모호한 위험인물로 봐야 한다? 이러한 특정 문화의 상징, 어떠한 것도 정치적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오웰식 사고방식과 결합된 하나의 결과는, 상호대립과 대항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 이따금씩 괴상한 프레임에 빠져 뒤늦게 반성조차 하기 민망할 정도의 밑바닥 대중으로 전락하는 스스로들을 돌아보며 자신이 애매모호한 정치관을 가지고 있다거나 확실히 정리하지 못한 입장에 대해 고민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며 잘못된 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건 이데올로기를 들먹이며 자세를 취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모든 사건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시시껄렁한 확인 절차에 들어가면, 오웰의 말이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정치와 무의식이라는 단어가 합쳐지면서 말이다. 그것은 우습게도, 효과적으로 성향을 구분 짓게 해 주는 동시에 줄긋기를 통해 여러 사람의 구획을 정리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는 소망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거울 속에 있는 것은 순전히 허구에 불과한 것이고? 대중문화에도 정치적 요소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담겨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종종 하나의 사건에 대해 덜 정치적이거나 더 정치적인 입장을 희미하게 혹은 뚜렷이 표현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옛 시절의 향수를 느꼈을 만한 영화에서 누군가는 꼰대스러운 권위주의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혀 한번 차고 지났을지도 모를 연예인의 일탈에서 다른 누군가는 무형의 청문회를 열어 도덕적 잣대를 설파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책 말미에선 <개그콘서트>의 한 꼭지였던 ‘민상토론’에 관한 내용을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건 정치 풍자라기보다 정치를 풍자하기 힘든 사회에 대한 풍자라고 봐야 할 듯싶다. 정치 풍자를 하기가 어려운데 희한하게도 어떤 사안에서든 정치적인 발언과 행위가 튀어나오는 우리의 실생활과 비교해보면 실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과연 대중의 소망이 제대로 거울에 비춰지고는 있는 것일까? 하기야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말만 갖다 붙이면 다 해결될지도 모를, 때로는 불편부당하고 불안한 사회 그리고 그 사회가 쏟아내는 대중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는지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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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은 문학과 좋지 않은 문학은 있을지라도 나쁜 문학은 없다? 내가 문학에 두는 관심은 이러한 평가나 설명이 아니라 재미와 흥미다. 유익한 내용, 그야말로 딱딱하든 그렇지 않든, 유려하든 그렇지 않든, 재미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문학이 과거에 비해 발달 혹은 발전해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과거의 것들에 새로운 이야기가 첨가되어(이것을 발전이라 한다면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 모양을 바꾼 채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다만 거기에서 읽을 때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가치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고리끼에서 우리가 좀 더 현실적 과제에 맞부딪쳐야 한다는 식의 감정 이입이 가능할 수도, 멜빌의 지겨운 나열에서 거대하고 환상적인 담론을, 디킨스에서 삶 자체에 갖는 정직성이라는 기본을. 이런 식으로 다종다양한 문학 작품들에서 우리는 또 다른 다종다양한 결론을 그때그때마다 도출해낸다. 문학의 가치를 독창적 표현에서 찾을 수 있을까? 획기적인 언어의 조탁? 시대와 그 통념을 벗어난 상상력? 비현실적 환상성이 주는 신선함? 굳이 가치라는 단어를 쓸 것도 없지만 문학의 즐거움은 다양한 데에 있고, 그 다양한 방법이 조응하지 못해 재미없는 문학도 존재할 수 있다. 이글턴의 책이 내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내가 왜 문학을 읽는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재미있어서, 그래서이다. 이것 참 훌륭한 작품이다, 이 이야기가 품은 담론은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 유의미한 해석과 가치를 도출해낼 수 있다 등등, 이런 문제는 재미를 느낀 이후에나 논의될 것들일 뿐이다. 이글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문학을 읽는 방법 내지는 문학을 읽는다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를테면 영화 예고편을 본다 한들 그 영화 전부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런 방식을 통해 문학 읽기를 시도한다 한들 내가 그 작품을 통째로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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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편>
조선 정동유의 백과사전. 이만큼의 분량과 수준이 한 사람의 힘에서 나왔다면?


<점거파업 역사와 교훈>
점거파업의 역사. 언제나 유효한 이야기. 2016년의 한국사회를 돌아보자.


<예술은 어떻게 거짓이자 진실인가>
예술은 진실을 일깨우는 거짓이라는 말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예술의 본성이나 본질은 무엇이고, 심지어 그런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검열과 함께 성장한 포르노그래피의 출현. 그 발명과 변주, 역사.


<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합리적 이성보다는 광기 어린 열정? 메스머주의? 유사과학? 몇몇 단어들만으로도 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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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공존 - 숭배에서 학살까지, 역사를 움직인 여덟 동물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정은 옮김 / 반니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냥꾼과 동물 사이의 교감이라니. 오늘날 그런 것이 가능키나 할까. 동물과 인간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때,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사육과 가축화가 아닌 '같은 세계' 속에서 얽혀있었을 때, 그때의 동물과 수렵인의 삶의 방식이라면 그들끼리의 교감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이 쉽게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은 점차 늘어났고, 그 어리고 자그마한 동물이 사냥감 혹은 일종의 가축이 되어갔으며, 동시에 동물들은 인간의 울타리 안에 머물며 짧게나마 포식자로부터 보호받았을지도 모른다ㅡ그리고 동물은 인간에게 잡아먹히거나 그들의 짐말이 되어 새로운 역할을 떠안게 된다. 사냥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동물들은 제의의 희생물, 가축, 식량, 짐꾼, 피실험자라는 다종다양한 배역을 맡으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인간의 손에 길러지면서 자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새끼를 낳아야만 하는 것은 물론이다. 책은 소, 당나귀, 말 등 인간과 가까워진 동물들을 이야기하며 그들과 인간과의 공존에 대해 말한다. 때문에 '숭배에서 학살까지'란 부제는 어떤 의미에서 뜨끔하다(마지막 장의 소제목 '학대 혹은 사랑'과 같은 의미일까). 페이건은 말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대감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사회규범과 덧없는 유행에 끊임없이 휘둘리고 있다고. 동물에 대한 이중적 감정(애완동물로 기르기와 식용 혹은 사냥)은 엄청난 빈부 격차와 함께 19세기 사회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21세기인 지금도 유효하다. 더욱이 매체의 발달로 동물이 겪는 학대는 과거보다 더 자주 우리를 놀라게 한다. 동물끼리도 생태계의 피라미드를 형성하며 저들끼리 죽고 죽이는 관계를 성립해 나가는 마당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어째서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가 존재하는가. 인간은 먹기 위해, 여가를 즐기기 위해, 몸을 치장할 물건을 얻기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인다. 수천 년 동안 인간과 다른 동물을 괴롭히고 죽여 왔다. 곰이나 사자를 야만스러운 포식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인간이야말로 진짜 학살자다.(p.373) 동물의 이익이 반드시 인간의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인간의 이익이 동물에게는 해가 될 수 있다. 페이건은 서두부터 우울하게 시작한다. 현재 인간은 대부분의 동물을 종처럼 부리거나 먹거나 착취하고 있는데, 도덕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 과정을 계속해야만 하느냐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그 원인이 된 배경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해결책은 아직 없다고 말이다. 책을 덮은 지금 동물과 인간의 이상야릇한 공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 읽었으나 역시 그 문제를 떠올려보면 대체 해결의 실마리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뒤미처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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