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모든 것을
시오타 타케시 지음, 이현주 옮김 / 리드비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큰 얼개로 보면 별것 없다. 유아가 유괴되고 3년 후 홀연히 나타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집념을 지닌 신문기자가 그간의 공백을 좇는다, 는 이야기. 그러나 <존재의 모든 것을>을 추리소설이 아닌 하나의 극(劇)으로 인식하는 순간 시야가 달라지고 내러티브는 비로소 제 임무를 수행한다.

빈집에 들어가 먼젓번에 살았던 사람에 대해 추리하듯이, 소설은 똬리의 통로 안에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니 공백보다는 여백이라 하는 편이 어울릴 거다. 타자가 아닌 주체에 의한 증명은 확신에 차 부러 캔버스 한쪽을 비워둔 의도가 분명하니까.

'존재의 의미'라는 담론은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건 말할 수 있다. 저편에 있어 아득한 소실점도 종내 환한 불꽃놀이처럼 명확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 소설 속 언급되는 다빈치의 '예술에 완성은 없다, 포기할 뿐'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장하는 존재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드나무, 웬디고 - 코즈믹 호러, 만물의 의식에 가닿다
앨저넌 블랙우드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포소설이 흔히 그렇듯 주인공(실질적 주인공은 화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이 처한 주변 자연경관에 대한 지난한 묘사로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걱정이 앞섰지만, 책장이 넘어감에 따라 불신의 안개가 걷히더니 첫 번째 단편 <버드나무>를 다 읽었을 땐 나도 모르게 아아, 하며 탄식하고 말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네 말이 맞아. 그에 관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말 말이야.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좋아. 왜냐하면 생각하는 건 말로 나오게 되어 있고, 또 말이 되어 나오는 건 실제로 벌어지기 마련이거든."
(p.62)

러브크래프트의 말마따나 블랙우드는 실물에서 형성된 이미지와 상상의 운동으로 자극된 이미지 사이의 구분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미약한지 잘 이해하고 있으며, 특히 <버드나무>는 단 하나의 문단과 문장 부호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느낌을 만들어 낸다.

수록된 모든 작품은 서두르는 법 없이 차근차근 그리고 뛰어난 기교와 식견으로 진중하고 꼼꼼하게 초자연적 대상과 내적인 찌꺼기들을 묘사함으로써 우리 마음에는 꾸밈없는 공포심이 심긴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나는 책 장정과 앨저넌 블랙우드라는 작가의 이름마저 사랑하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흑뢰성>_요네자와 호노부. 나오키상엔 어울릴지언정 미스터리 쪽으로는 글쎄, 였다. 성(城)이라는 거대한 밀실이 무대이긴 하나, 기이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지하감옥에 갇힌 안락의자 탐정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활용하는 건 참으로 속 편한 짓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웬걸, 종국에 그걸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마냥 실제 역사에 적히지 않은 '빈 곳(작가가 인터뷰에서 야마다 후타로를 예로 들며 언급한 것은, 정해진 역사의 '입구와 출구')'은 인간의 고독과 수수께끼로 채워졌다.

내부의 고독은 외부에서의 그것보다 더 수상쩍은 불안과 그늘을 데리고 와, 생사관과 가치관에 간섭하는 모순과 부조리는 <흑뢰성>에서 뒤섞여 미스터리 드라마가 된다. 부족하다 여겼던 첫 맛이 결국 납득 되는 만찬. 요네자와 호노부 씨, 잘 먹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발물 처리반이 조우한 스핀
사토 기와무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F도 있고 미스터리도 있으며 그 경계 어디쯤엔가 서 있는 이야기도 있다. <폭발물 처리반이 조우한 스핀>_사토 기와무식 펑크는 이시다 이라의 <I.W.G.P.>와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 완독하는 순간 책 자체의 엔트로피는 감소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수록작 <젤리 워커>는 영화 <에이리언>이나 <스피시즈>를 떠올리게 하고, 또 다른 단편 <시빌 라이츠>에는 악어거북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야쿠자가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연쇄 살인범의 미술품 수집가가 주인공인 <스마일 헤드>도 있다.

그런데 어느 하나 똑 부러지게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다분히 SF스러우면서 현실적이거나 순문학 냄새를 풍기다가도 곧장 스릴러로 돌진하기 때문. 그래서인지 때론 핍진성이 묘하게 일렁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사토 기와무의 펑크인 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인력
아카세가와 겐페이 지음, 서하나 옮김 / 안그라픽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부아르는 많은 동물들이 쇠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번식 후에 죽는다 했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은 필연적으로(우연의 간섭이 없는 한) 노쇠를 겪게 되는데,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이걸 노인력이라 부른다. 돈을 지불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도 아닌 바에야, 일단 늙어야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 일단 재미있다. 헤싱헤싱한 머리털처럼 보이는 겉표지 디자인도 재미있고, '건망증 이즈 뷰티풀'을 외치는 것도 재미있다(기억하는 일 따위 때려치우자). 나도 양말을 꿰신고 일어서며 '끙' 하는 요상한 소리를 낼 때가 있는데, 드디어 노인력이 생기기 시작하는 건가 하며 웃음도 나온다.

지칠 대로 지친 산티아고(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보라. 뭍으로 올라 와 드러누운 그는, 노인은 청춘기와 성인기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보부아르의 말엔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인 아카세가와 선생이라면 입이 닳도록 칭찬할 테지. "비밀의 힘을 얻었군, 그게 노인력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