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얼개로 보면 별것 없다. 유아가 유괴되고 3년 후 홀연히 나타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집념을 지닌 신문기자가 그간의 공백을 좇는다, 는 이야기. 그러나 <존재의 모든 것을>을 추리소설이 아닌 하나의 극(劇)으로 인식하는 순간 시야가 달라지고 내러티브는 비로소 제 임무를 수행한다.빈집에 들어가 먼젓번에 살았던 사람에 대해 추리하듯이, 소설은 똬리의 통로 안에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니 공백보다는 여백이라 하는 편이 어울릴 거다. 타자가 아닌 주체에 의한 증명은 확신에 차 부러 캔버스 한쪽을 비워둔 의도가 분명하니까. '존재의 의미'라는 담론은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이건 말할 수 있다. 저편에 있어 아득한 소실점도 종내 환한 불꽃놀이처럼 명확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 소설 속 언급되는 다빈치의 '예술에 완성은 없다, 포기할 뿐'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장하는 존재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