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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그랜드투어 : 동유럽 편 - 사람, 역사, 문명을 찾아 거닐고 사유하고 통찰하는 노블레스 여행 송동훈의 그랜드투어
송동훈 지음 / 김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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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길을 직접 알려주는 친절한 콧수염의 노신사를 만나거나, 유럽의 안개 자욱한 아침에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거나. 이런 여행이 아닌, 교양을 쌓고 배움을 찾는 떠나는 여행을 ㅡ 이 책의 제목인 <그랜드투어grand tour>라 한다. 나도 해외 ㅡ 일본에 ㅡ 에 나가서 1년 동안 여행 아닌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여행이라 하면 우리는 인터넷 블로그를 뒤적여 꼭 방문해야 할 곳을 찾아보거나, 서점에 들러 여행 가이드 책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행 후에 남는 건 사진(뿐)일 지도 모른다. 여권에 스탬프를 찍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고, 높은 곳에 올라가 야경을 바라보고. 내가 일본에서 경험했던 것도 이러한 일련의 패턴에 근접한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랜드투어』가 제시하는 건, 같은 만남과 비슷한 행보, 반복되는 사진들로 점철되는 여행이 아니라 짜릿한 감동과 배움이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이 책에서는 세 나라에 대한 여행과 역사 이야기를 통해 흡사 세계사를 눈앞에서 보게끔 한다. 그러므로 『그랜드투어』는 초보자를 위한 여행 가이드가 아닌 우리가 흔히 놓치는 여행에서의 요소들을 각 테마를 통해  ㅡ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인물들, 도시들, 거기에서 끄집어내는 멋진 이야기들 ㅡ 생생하게 전해준다(베토벤이 산책하며 거닐던 하일리겐슈타트 숲길을 어디서나 볼까).

 

여행이란 참 사람을 무르고 나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여행이란 단어조차도 그럴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걷는 길 모두에 입을 맞추고 감동하며, 내가 지금 <여기 있다>라는 걸 느끼는 순간은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모든 여행길엔 인생의 중요한 의미들이 숨어 있다(머리말)>는 말처럼, 여행이 단순한 여가와 휴식의 일환이 아니라 사유하고 질문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은 정말 (넓은 의미의)즐거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러시아에서 가장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히는 성 바실리 대성당(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이 이 성당을 등지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슈테판 대성당(막시밀리안과 왕위를 잇는 결혼식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교회(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과연 이러한 각 역사의 현장 ㅡ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을 여행하면서 이런 곳들에 눈을 댈 생각이나 할까. 장소나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언제라도 우리의 배울거리는 지천에 있다. 물론 도시들, 건물들이 다가 아니라 사람 또한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랜드투어>는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유럽, 특히 영국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한 유럽여행을 말하지만,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내 ㅡ 우리의 ㅡ 가슴을 뜨겁게 해줄 나만의 그랜드투어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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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리스트 - 문학과 예술 속의 목록사: 호메로스에서 앤디 워홀까지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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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샘플 교정지를 본 게 지난 8월이었다. 그 때만 해도 『궁극의 리스트』가 이렇게 <징그러운> 책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맙소사!). 200점에 가까운 삽화와, 역시나 징그러운 뱀과 같은 인용 텍스트(인용문을 읽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응당 완벽하게 읽을 수 없으리라 확신하지만, 극악무도한 발췌로 인해, 아직 오지 않은 두려움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저자가 밝힌, ㅡ 이 책은 <기타 등등>이라는 말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서문) ㅡ 시작부터 엄습하는 <궁극의 두려움.> ㅡ <기타 등등>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축복인 셈이다. 바흐의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이나 에셔의 판화 작품들을 생각해 보라.

『궁극의 리스트』는 리스트, 즉 <목록의 의미>를 탐구한다. 목록의 의미란 건 어쩌면 욕망의 산물일 거다. 집을 나서기 전 장바구니에 넣을 것을 미리 적는 것, 읽어야 할 책 제목들을 소위 위시 리스트로 만드는 것, 그리고 여기에 다 열거할 수 없는 <기타 등등>의 목록을 작성하는 행위와 그 목록들! 그리고 이것은 ㅡ 전쟁과도 같고, 악마조차 굴복시킬 수 있는 이 책은 ㅡ 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으며, 그래서 입구와 출구도 없(어 보이)는 리좀rhizome형 프레임을 본문에서 언급하고, 또 책 자체도 이 형태를 취하는 동시에 독자의 인내심의 역치 값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언뜻 보기에도 세상에 무한히 존재하는 목록들을 텍스트 안에 오롯이 목록들의 목록으로서 활자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역시 서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목록을 조사하는 것은 어떻게든 우리가 이 책에 포함할 것을 추려 내는 작업이었다기보다는 제외해야 할 모든 것을 추리는> 작업인 셈이니까 말이다. 유한한 글자들로 무한의 조합을 만드는 것은 시작이 <유한>에서 출발하기에 신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가려 한 행위라 한다면, 이 책의 집필 ㅡ 목록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 ㅡ 은 애초에 그 발단이 <무한>에 있기 때문에 신의 능력을 거부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 한 게 아닐까. 그래서 더욱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귀결되고 말이다 ㅡ 그렇다고는 해도 로스앤젤레스를 <기타 등등>의 도시이며 <목록 도시>라 설명한 부분은 정말 멋지지 않은가?

저자는 수많은 그림과 글 등(역시 기타 등등)에서 무한을 암시하는 목록들을 뽑아낸다 ㅡ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 중국에 <목록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했다는 것이며, <list>란 단어가 <마음에 들다>, <바라다>란 뜻도 지니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인간의 (무언가를 범주화시키려는) 욕망이 복잡해지는 사회를 만남으로써 거침없이 똬리를 트는, 그 목록(의 작성)들의 의미를 역설한다. 물론 ㅡ 목록의 텍스트를 얼마나 압축하고 걸러냈는가 하면, 고작(!) 400여 쪽에 불과한 끝맺음을 보면 알 수 있다 ㅡ 계속해서 <무한>이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이 <유한한> 한 권의 책이라는 형태로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무한한 것을 유한성에 입각해 집어넣은, 무한성을 띠는 유한한 이 책을, 다시 무한할 수밖에 없는 감상과 상념을 유한한 글로 쓰려 하는 시도 역시 <기타 등등> ㅡ 여기서의 <기타 등등>은 다소간의 의미를 함축한다 ㅡ 으로 끝나겠지만. 왜 우리는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것에 매달리고 의미를 부여해 왔는가 하면, 질서를 추구하는 욕구와 대상의 이해라는 큰 개념으로 (일단은)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목록들에는 제각각 의미가 있을 터인데, 그 <목록의 의미>를 알아보자면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지 않을까? 어쩌면, 그래서 이 『궁극의 리스트』는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한 것을 추적하는 어트리뷰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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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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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놓고 뒷짐을 지고 있을 때 비로소 창작을 한다. 그리고 사유한 것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텍스트화한다. 작가로서의 나와 나로서의 작가, 외부와 내부,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길을 걷는 것 사이의 공명에서 아름다운 ㅡ 치밀하고 고뇌적인 ㅡ 묘사로 풀어지는 또 한 번의 사유. 왜 사유와 텍스트가 동일한가. 왜 사유하는 것이 정제의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활자화되는가. 왜 무엇인가 눈目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이라는 물줄기를 만나는가. 소설 속의 주인공 작가는 ㅡ 텍스트 바깥의 실제 작가는(어느 쪽을 실체라 할 수 있을까?) ㅡ 구경꾼이 되었다가 방랑자가 되고 다시 작가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작가는 여전히 <산책하는 자>이다. 그는 여전히 바깥과 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와 작가를 나누지 못한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언어를 발견했다가 또 순식간에 그 언어의 잃기를 반복하며 ㅡ 「오, 머물러라! 너희들, 신성한 예감들이여!」(p.73) ㅡ 과연 이 작품의 타이틀이 『어느 작가의 오후』인지 『작가의 어느 오후』인지 『어느 오후의 작가』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가끔씩 단편적으로 모든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은
계획된 전체의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오 (...)
나는 영원히 글쓰기를 금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오.
더 이상 자기 텍스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ㅡ 본문 p.107-108


 

이 말은 여기에 등장하는 작가와 번역가 중, 누가 뱉은 말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작가의 사유는 상념과 성찰을 동반하며 고독이란 안락함(!)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페터 한트케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작가의 오후』란 이 <말도 안 되는 시詩> 속에서 정처 없이 맴돌게 한다. 그럼 나도 그처럼 이런 알 수 없는 문장을 쓸 수 있겠지.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었더니 어디선가 고래의 오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렇게. 그리고 약간의 친절함을 베풀어 이런 말을 추가할 수도 있을 거다. 「고래의 오줌을 본 적도 없고 그 냄새가 어떤지도 모르지만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든다. 무슨 냄새인지도 모르고 생김새도 모르는 것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는 반드시 존재한다. 현대에는 분명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라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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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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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매력은 다양한 해석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ㅡ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상태였다. 우리는 때때로 20세기를 후기 니체 시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니체를 둘러싼 니힐리즘nihilism과 위버멘쉬übermensch로 위시되는 철학과 이론은 광시곡狂詩曲의 그것과 같았고, 심연의 장막 밖에서 비트적거리는 무분별한 말들이었다. 날카로운 파토스 위에서 위태위태하며 분출되는 메타포들은 사유의 침식과, 퇴적을 거쳐 다시 융기를 향해 떠오르는 기암괴석이나 다름없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가 지극한 행복의 섬에서 사라지자 군중은 그가 악마에게 잡혀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오히려 차라투스트라가 악마를 잡아갔을걸>이라며 웃어넘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러고도 남았을 위인이다(악마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입을 다물라. 너 위선적인 개야! 그대와 같은 종류를 그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p.223)>라며 자기부정과 극복을 꾀한다 ㅡ <홀가분한 죽음에 대하여>라는 장은 그래서 괴팍하고도 진실된 웃음이 난다. 때로는 엉켜버리고, 그래서 인간은 다리를 절고 목을 삐끗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텍스트는, 그게 무엇이든 순식간에 부정되기 일쑤다. 그리고 다시 자기극복을 한다(정말 끝도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신이다.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 이건 간략한 비유에 불과하지만 책을 여는 순간부터 쏟아지는 온갖 암시와 느낌표(!)들은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의 말을 빌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때로 니체를 허무주의자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절대 허무주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도덕(흔히 기독교적인)과 선과 악의 관념들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에게 묻는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조차 자의적인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지시로 인해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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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미치광이 펭귄클래식 54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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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놈이 제 눈앞에서 아내를 빼앗아 가는데도,
그리고 절 배신한 놈이 제 귀싸대기를 때리는데도,
전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보고만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놈을 죽일 때도 제가 냉정하게 지켜보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닙니까?

ㅡ본문 p.132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의 <감정이입설>에 비유하자면, 주인공 에르도사인의 감정은 범죄에 매료되고 돈에 매료된다. 모든 것은 허무와 거짓말로 귀결되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은 환상이다. 에르도사인은 마치 존경과 멸시를 함께 받는 종교인과도 같다 ㅡ 리얼리즘 혹은 판타지 ㅡ <내 바깥에, 내 육체의 경계를 벗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p.120)).> 범죄와 비극을 바라는 그는 점성술사의 <목 매단 인형>으로 대치되며 혼란 속에서 그 혼란을 스스로에게 가중시킨다 ㅡ 에르도사인이 발명가로 설명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즉, 허구에서 현실을 보고, 현실에서 허구를 본다. 악다구니로 살아가며 돈에 목숨을 걸고, <돈을 짝사랑>하는 거다(짝사랑이라는 게 중요하다). 오직 1㎠ 안에서, 딱 그 1㎠의 존재로서만. 에르도사인(우리)에겐 (유토피아와 같은)허구가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와 같은)현실이 필요하다. 그런데 왜 그는 (머리를 싸매고) 범죄(비극)를 꿈꾸는가. 자신의 모순된 허구를 모순된 현실에 덧붙여 꿰매려는 그(들)의 정신세계는 얼핏 불합리하게 보인다 ㅡ 위에서 말한 <리얼리즘 혹은 판타지.> 모순으로써 모순을 극복한다, 즉 거짓말로써 거짓말을 극복한다는 건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시종일관 우울함을 가장한 『7인의 미치광이』는 그래서 더욱 우울하면서도 우습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현실을 기반으로 허구를 만든게 아니라, <허구를 창조함으로써 현실을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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