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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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그의 작품은『투쟁 영역의 확장』에 이어 두 번째인데 ─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소립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 그가 자신을 두고 절망의 전도사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책도 두 번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이야기 속의 다니엘이『신적인 환경』을 우연히 주워 읽고 절규를 토하고서 자전거 공기 주입 펌프를 던져 부숴 버린 것처럼 나도 이 빌어먹을 똥통 같은 텍스트의 지침을 들어가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어떤 하나의 가능성, 다니엘과 다니엘25의 가능성, 신경질적이고 쾌활한 개(폭스)의 가능성, <기존인류>의 증언이 일치할 가능성, (고작)그런 것들 때문에 아주 뻔뻔스럽고 밑도 끝도 없는 이 책을 모조리 읽어냈다. 기본적으로『어느 섬의 가능성』은 몇 개의 시퀀스로 무척이나 불편한 에너지들을 만들고 배설한다. 물론 헛되이 생각을 주물러 대거나 폭력으로 기쁨을 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소설 속 예언자가 삶은 근본적으로 보존 옵션이라고 한 걸 보면 나로서는 앞서 말한 이 작품의 특징이 이야기의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이를테면 영화《나쁜 남자》를 보라. 거기엔 인간의 얼굴을 한 고깃덩어리들이 등장한다. 거기서는 검은 옷을 입은 놈이 흰 옷을 입은 년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려 한다. 여기에는 계급의 논리, 밝음과 어둠의 논리, 착취와 피착취의 논리가 있다. 조금 곱상하게 말하자면 <나란히 서기>의 발로다. 타자와 다름이 없는 나란히 서기. 하나 생각해둘 것은 이것을 이 소설과 <나란히 놓고는> 볼 수 없다는 거다. 왜 굳이 접점이 없는 소설과 영화를 함께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의 한기란 인물은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데 소설의 다니엘은 사랑하지 않고도 섹스하기 때문이다. 내가『어느 섬의 가능성』을 앞의 영화의 <+알파>의 개념으로 보는 것도 그 이유다. 이 책의 앞날개에는 <삶의 고통에 눈감고 살아가려 하는 주인공이 치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을 통해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세계의 폐단이 바로 그것이며 현대인의 고통의 근원 또한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책에서 ─ 앞서 영화 이야기를 했으니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하면 ─ <인간은 결코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단 하나 가능한 그의 운명은 주변에 불행을 퍼뜨려 다른 이들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p.68)는 말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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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부분의 감상문을 적을 때 줄거리를 언급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도 제 글을 보시고 이 책을 읽고 싶으셔서 기본 줄기가 궁금하시다면 출판사 홈페이지나 온라인서점의 책 소개란을 보시면 될 겁니다. 결국 이것은 서평이 아니라 그저 제 감상일 뿐이고 그 감상이 좀 <있어 보이도록> 가장한 두서없고 맥락 없이 쓴 것이며 대체 무슨 수작으로 이따위 글을 썼냐고 물으실 것 같은 자격지심 때문에 이렇게 부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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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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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잡문(雜文)을 모아놓은 것인데 <어수선하고 번다하다>는 것보다는 <잡다하고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지배적이다. 개인적으로 일문학을 전공했고 동시에 하루키 ㅡ 무라카미라고 부르기는 좀 힘들다, 무라카미 류라는 작가가 있어 혼동되기도 하니까 ㅡ 가 현재의 작가라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해변의 카프카』나『어둠의 저편』이후로는 약간 하루키식의 표현방식이 바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조금 생겨났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번역본으로 아홉 번, 원서로 두 번이나 읽을 정도로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한다 ㅡ 그 아홉 번 중 한 번은 <비교문학론> 강의로 인해 읽은 것이지만 말이다. 하루키 작품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문체에 있다. 하루키식 비유로까지 말할 수 있는 능수능란한 은(직)유도 한 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문체에서 오는 독특한 발상과 어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아래에 적은 것은 그의 작품『노르웨이의 숲』에서의 와타나베란 인물의 대사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키의 소설들을 보면 저 말이 그대로 관통되어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와타나베의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을 꿰뚫으며 그 전체를 싸고 있는 얇은 막과도 같은 거다 ㅡ 벗기려면 얼마든지 벗길 수 있는.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고, 동시에 외로워진다.





僕はそれほど強い人間じゃありませんよ。誰にも理解されなくていいと思っているわけじゃない。理解しあいたいと思う相手だっています。ただそれ以外の人々にはある程度理解されなくても、まあこれは仕方ないだろうと思っているだけです。あきらめてるんです。だから永沢さんの言うように理解されなくたってかまわないと思っているわけじゃありません。-------------------------------------------------

나는 그만큼 강한 인간이 아니에요. 어느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어요. 다만 그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걸요. 체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배님(나가사와 상) 말대로 남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이것은 일견 이『잡문집』이 그의 소설(허구)에 비해 약간은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리고 왠지 그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나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ㅡ 외려『무라카미 라디오』와 같은 글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희한한 건 이 잡문(!)들을 읽으면 그의 일련의 작품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양을 쫓는 모험』(이건 좀 아닌가, 하기도 하지만),『태엽감는 새』등을 나뭇가지에 일렬로 죽 꽂아 한꺼번에 들고 있는 듯한 기분과 마주하게 된다. 단순히 1979년부터 2010년까지 이어지는 글들을 모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았던> 기술 방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사실 지금까지 이『잡문집』보다 하루키의 전반적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훨씬 많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을 접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고 또 그럴 이유도 없다고 본다. 그것은 그 대상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이 그 사람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명 하루키 작품을 단 한 권도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더더욱 그의 기존 작품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또 이야기해야만 한다. <잡(雜)>이라는 한자에는 <만나다>, <모두>, <함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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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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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한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하자.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의 미국의 자리에 한국을 넣어도 비슷할 테니까. 유럽보다는 미국의 노선과 루트를 그대로 따라하는 게 한국 아니던가.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려는 부자들과 좋은 교육을 받은 혁신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다. 책에서 보여지듯 ㅡ 유럽과 비교하면 ㅡ 내는 세금에 비해 받는 혜택은 훨씬 적고, 1인당 GDP는 높지만 그 증가분의 3분의 2 이상이 부자에게만 돌아가며,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더 많아서 쉴 여유가 없지 않나. 세상에 공짜로 식사를 할 수는 없으며 시장은 일대일의 맞교환을 원한다. 어쨌건 코멘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정치라는 두 가지 명제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미국vs유럽>이지만 사실상 <한국vs유럽>이라 보아도 무방한 이유다. 저자만 해도 두 달간 일을 쉬고 유럽으로 떠날 생각이라는 말에 친구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그럼 사무실은?」이었다…….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는 세금을 많이 내지만 돈을 더 아낄 수 있다. 퇴직연금, 의료보험, 교육, 대중교통, 보육... 이러한 공공재가 따라오는 거다. 그럼 미국(한국)은? 다 내 돈으로 해야 한다. 즉 명목상의 1인당 GDP만 높을 뿐 늘 빚더미에 깔려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돈을 갚기 위해 일하는 꼴이다. 미국과 유럽이 점점 더 닮아 가고 있다는 건 정말 터무니없다는 저자의 말이 실감나는 이유다. 한 독일 회사에 관리직으로 취직한 미국인이 「회사에 들어가니까 1년에 6주의 휴가를 누릴 수 있다는 고용계약서야 서명하라고 하더군요.」라고 했던 일화 역시 그것을 반증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연하게도 같은 미국과 관련된 책 『팍스 시니카』를 함께 읽게 되었다. 정말 더 이상 팍스 아메리카나는 없고 이제는 팍스 시니카일까 하면서 어떤 의미로는 몰락(!)해가는 미국을 엿보았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쇠락을 점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력, 군사력 등은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압도적이다 ㅡ 실제로 현재 미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전치의 4분의 1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 전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백악관과 의회가 가까스로 국가부채 상한 증액에 합의해 디폴트 위기를 넘기기 전까지 미국의 국가부채 상한은 14조 3천억 달러였고, 2010년 미국 국내총생산 총액 14조 6천억 달러를 거의 모두 쏟아 부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디폴트? 모라토리엄? 그리고 정치? 복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최소한 이미 미국 대륙에 한 발을 담그긴 했지만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결정할 필요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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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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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인 망명객과 영국인 외교관이 만들어낸 18세기의 스캔들. 철학서인 줄 알았더니 인문서였으며, 동시에 소설(과도 같은)적 재미도 있었다(일단 하드커버가 아니라는 점이 더 좋았지만). 흄이 프랑스 파리의 살롱을 사로잡았다면 루소는 영국 런던의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ㅡ 심지어 국왕과 왕비는 연극을 관람하러 왔다가 온통 극에 몰두하고 있는 루소만을 쳐다보았고. (뚱뚱한)흄보다는 시종일관 시니컬하게 보이는 루소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 것은 나 뿐일까. 루소와 흄이 맺은 우정(과 배신)이 파국을 맞고, 또 일부러 파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루소와 흄의 사상 차이까지. 앞서 언급한 '소설적 재미'는 헛말이 아니다. 소설적 기교가 전혀 없음에도 『루소의 개』는 그 특징이 지니는 헤게모니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으며 인문적 지성사와 사상을 정말이지 매끄럽게 전달하고 있다. <루소는 미치광이였지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흄은 제정신이었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책은 이 말을 설명하는 데에 온전히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왜 루소는 미치광이면서도 크나큰 파급력을 지녔고, 왜 흄은 제정신이었음에도 매력이 없었는가. 물론 둘을 쉽게 비교하고자 하는 말이지만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이 루소와 흄의 싸움은 주변인의 비망록과 일기, 편지, 각종 문서들을 통해 한층 더 견고한 '소설'로 다가온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루소와 흄(어디 그들 뿐이겠는가). 특히 몇 차례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시작으로 루소가 흄에게 보냈던 341개의 프랑스어로 작성된 편지는, 루소보다 더 루소답다. 「(...) 당신은 졸렬하게 자신을 숨겼습니다 (...) 대중들은 속기 좋아하고 당신은 그들을 속이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 당신이 구실로 사용했던, 나를 위한 노고에 감사하며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에 흄은 루소를 '사악한 인간이자 흉악한 악당이며 파렴치'하다고까지 울분을 토했다. 흄의 회의론과 루소의 자기소외, 상상력은 영원히 맺어질 수 없었던 걸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이성이란 뭔지, 우정이란 뭔지 하는 것보다는 ㅡ '하나의 인간'이란 뭔가, 하는 것으로 이 생각들은 끝나게 된다(표지에서 '뚱뚱한' 흄의 젖꼭지를 '부여잡고' 있는 루소의 미소가 은은하다 ㅡ 흄의 손은 우습게도 반지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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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중세의 뒷골목 풍경』 : 뒷골목 인생들의 풍속기행. 이 책은 철저한 봉건제 사회였던 중세 유럽의 지배 중심의 역사에서는 잊혀졌던, 그러나 중세 도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 ‘길거리에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비주류 인생’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중세 유럽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죄악과 부패상, 정치의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밝혀낸다.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 철학 책에서는 묻지도 않고 답을 찾을 수도 없는 질문을 다루며,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 오늘도 아니 바로 지금도 내가 쓰고 있는 사소한 물건이나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깃들어 있는 ‘철학’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공리주의』 :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공리주의. 공리주의란 어떤 행위에 따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행복이 증진되거나 감소하는 경향에 따라, 그 행위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원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오늘날 새삼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안락사와 뇌사 등의 문제처럼 윤리적인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공리의 원리가 합리적인 판단의 근거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우리의 문제의식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 해답의 열쇠까지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의 책』 : 지구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한 내셔널지오그래픽소사이어티의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놀라움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사진, 이해를 돕는 다양한 도표, 흥미를 돋우는 인물사진, 최신식 지도 등 500개 이상의 일러스트가 포함되어 감각적이고 충실한 지식을 접할 수 있다. 

『학문을 권장함』 : 인권평등, 독립자존, 준법정신, 실학의 정신, 국민의 의무, 학문의 권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원래 그의 고향인 나까쯔의 청소년들에게 읽히기 위해 쓴 것이지만 근대화를 추구했던 당시 시대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약 400만부가 팔리는 등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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