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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1/1216/pimg_759587183720100.jpg)
말 그대로 잡문(雜文)을 모아놓은 것인데 <어수선하고 번다하다>는 것보다는 <잡다하고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지배적이다. 개인적으로 일문학을 전공했고 동시에 하루키 ㅡ 무라카미라고 부르기는 좀 힘들다, 무라카미 류라는 작가가 있어 혼동되기도 하니까 ㅡ 가 현재의 작가라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해변의 카프카』나『어둠의 저편』이후로는 약간 하루키식의 표현방식이 바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조금 생겨났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을 번역본으로 아홉 번, 원서로 두 번이나 읽을 정도로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한다 ㅡ 그 아홉 번 중 한 번은 <비교문학론> 강의로 인해 읽은 것이지만 말이다. 하루키 작품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문체에 있다. 하루키식 비유로까지 말할 수 있는 능수능란한 은(직)유도 한 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문체에서 오는 독특한 발상과 어투를 빼놓을 수는 없다. 아래에 적은 것은 그의 작품『노르웨이의 숲』에서의 와타나베란 인물의 대사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키의 소설들을 보면 저 말이 그대로 관통되어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와타나베의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을 꿰뚫으며 그 전체를 싸고 있는 얇은 막과도 같은 거다 ㅡ 벗기려면 얼마든지 벗길 수 있는.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동조하고, 동시에 외로워진다.
僕はそれほど強い人間じゃありませんよ。誰にも理解されなくていいと思っているわけじゃない。理解しあいたいと思う相手だっています。ただそれ以外の人々にはある程度理解されなくても、まあこれは仕方ないだろうと思っているだけです。あきらめてるんです。だから永沢さんの言うように理解されなくたってかまわないと思っているわけじゃありません。-------------------------------------------------
나는 그만큼 강한 인간이 아니에요. 어느 누구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서로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상대도 있어요. 다만 그밖의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걸요. 체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배님(나가사와 상) 말대로 남에게 이해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이것은 일견 이『잡문집』이 그의 소설(허구)에 비해 약간은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리고 왠지 그의 단편소설의 분위기나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ㅡ 외려『무라카미 라디오』와 같은 글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희한한 건 이 잡문(!)들을 읽으면 그의 일련의 작품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양을 쫓는 모험』(이건 좀 아닌가, 하기도 하지만),『태엽감는 새』등을 나뭇가지에 일렬로 죽 꽂아 한꺼번에 들고 있는 듯한 기분과 마주하게 된다. 단순히 1979년부터 2010년까지 이어지는 글들을 모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았던> 기술 방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사실 지금까지 이『잡문집』보다 하루키의 전반적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훨씬 많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을 접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고 또 그럴 이유도 없다고 본다. 그것은 그 대상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조차 없이 그 사람의 자서전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명 하루키 작품을 단 한 권도 보지 않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더더욱 그의 기존 작품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또 이야기해야만 한다. <잡(雜)>이라는 한자에는 <만나다>, <모두>, <함께>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