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노튼영문학개관:영문학의 무수한 오솔길을 일러주는 지도책

전공이 영문학이었던 사람들에게 "노튼영문학개관"을 이야기하는 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성서"를 말하는 것, 역사를 전공한 이들에게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느냐고 묻는 것과 흡사하다. 영문학전공자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고,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도 이 책의 명성을 능가하는 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영문학 개론서이자 영문학통사라 할 수 있다.

"나의 책읽기"란 글을 통해 나는 저자 서문이나 옮긴이 서문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데, 불행히도 이 책엔 저자 서문은 아예 없고, 옮긴이의 서문이라는 건 분권된 2번째 책의 말미에 짤막하게 이 책과 옮긴이 김재환 교수의 인연 부분이 전부다. 이 책을 교재로 삼은 학과 이외의 독자들에겐 상당히 불친절한 셈이다. 조셉 골드(Joseph Gold)가 북키앙에서 펴낸 "비블리오 테라피"란 책이 있다. 읽어보진 못하고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 책인데, 이 책의 부제는 "독서치료, 책속에서 만나는 마음치유법"이다. 우리가 향기 치료법을 아로마테라피라고 하는 것처럼 책을 통한, 독서를 통한 치료법이란 의미에서 "bibliotherapy"란 제목을 달았다.

이 책에는 워즈워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인가 얻어내고 소비하느라 우리는 우리의 힘을 탕진하고 있네. 우리는 우리의 것인 자연 안에서 보지 못하네"

이때 저자 조셉 골드가 이 글의 출처로 삼고 있는 것이 "노튼영문학개관" 이른바 "The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이다. 나름의 독서법을 위해서는 한 권의 책을 개관해보라고 권한 적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떤 책의 로드맵이랄 수 있는 인덱스 부분을 충실하게 검토해보라고 말했다. 이것을 영문학사 혹은 다른 테마의 책들로 옮겨 볼 때, '개론서'라는 것은 강의나 학습의 필독서 차원을 넘어 독서에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로드맵 구실을 해준다.

개론서는 단지 개론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테마 뒤안에 있는 수많은 오솔길과 갈라지는 길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 책 "노튼 영문학 개관"이 다루고 있는 영미권 시인들이 그렇다. 이 책의 1권에서는 중세 앵글로 색슨 시대와 노르만 시대의 중세 영문학을 다룬다. 영미 문학의 고전이랄 수 있는 "베오울프"를 비롯해 여러 작품들을 개괄하면서 읽다보면 문득 한 사람의 이름에서 눈길이 멈추게 된다. 그는 바로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다. 그가 지은 "캔터베리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우리는 이 책 "노튼영문학개관"을 통해 이 작품이 영국 문학사에 있어 어째서 중요한 작품인지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국내에도 출판되어 있는 제프리 초서 연구서들이나 그의 작품들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제프리 초서 시대의 영국은 아직 이들만의 사상이 무르익은 시기라 볼 수 없었다. 사상이 현실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상황이 사상보다 앞서 있던 시대였다. 문학사는 어느 경우라도 당대가 직면하고 있는 시대 상황과 결부되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헨리 5세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국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국의 왕이니만큼 전제 왕정 시대의 영국 작가인 셰익스피어가 그의 업적을 높이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헨리 5세를 각별히 아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헨리 5세는 영국의 세종대왕이었다. 헨리 5세는 그의 숙부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영어로 읽고 쓰는 법을 먼저 배운 사실상 최초의 영국 왕이었으며, 영어를 궁정어의 지위로 승격시킨 왕이었다. 헨리 5세의 부왕이었던 헨리 4세는 1399년 의회에 나가 영어로 연설하였고, ‘영어를 지나치게 조잡하거나 이상한 용어로서 사용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해될 수 있는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의 어려움을 제거하고자 했다. 헨리 5세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정부와 지식인 사회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이나 프랑스적인 풍속을 억눌렀다. 이제 영어는 최소한 영국 땅에서만큼은 더 이상 ‘정복당한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정복한 사람의 언어’ 가 되었다.

제프리 초서가 영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1387년 - 1400년)』를 집필한 것이 이 무렵이었던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 무렵 영국은 점차 민족국가로서의 국가성(nationhood)을 획득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보다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 인식하면서도 지식이란 그것을 활용할 때 비로소 본래의 의미를 다한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노튼영문학개관"을 그저 영문학 개론서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동안 이 책은 절대로 본래의 의미대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영문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동시에 영국사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영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영국의 철학과 사회와 경제, 문화를 이해한다는 말이 된다. 이를 다시 영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글을 쓰거나 리뷰를 한다는 목적으로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때, 지식이란 그 본래의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영문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그저 지난 과거의 영문학사를 공부하는 것에 그치는 건 시간낭비다. 인간이 어느 한 일면만을 지니고 있지 않듯, 어느 한 시대는 어느 하나의 일면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학문은 단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인접 분야의 학문 체계와 유기적 연관을 맺는다. 인문학과 사회학은 물론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독서가 요구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셰익스피어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튜터 왕조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역사구분법은 일반적인 영국사의 시대구분법과 맥을 같이 한다. 중세를 지나면 16세기가 나오고, 17세기의 중요한 사건들인 청교도 혁명 전후의 주요 작가들, 존 단, 존 밀턴,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 등을 다룬다. 왕정복고시대와 18세기에서는 신고전주의 문학이론을 개괄하고, 이 무렵 영미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소설의 출현을 다룬다. 존 번연과 다니엘 디포우, 사무엘 버틀러, 조나단 스위프트 등이 이 시대의 작가들이다. 만약 누군가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이것이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 여전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느낀다면 그 시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영미문학사를 개론하고 있는 책 가운데 이 책 보다 더 좋은 책도 있을 수 있다.

한 권의 책, 하나의 작품, 한 명의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되고, 그에 대한 작가론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다면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작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함께 짚어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한 권의 책에서 보다 많은 지식들을 얻어낼 수 있다. 좋은 책은 많은 대화거리들과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골치아픈 영문학개론 숙제나 리포트를 쓰기 위해 처음 이 책을 접한 이들은 리포트 작성 뒤엔 더이상 이 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자신은 학교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다고 과감무식하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지식은 교과서(text)에서 얻는다. 텍스트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참고서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처럼 볼썽사나운 일도 드물다. 만약 대학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삼았고, 그것을 공부했다면 이 책을 주요 텍스트로 삼아 이 책에서 가지를 치고 나가는 독서를 하는 것도 매우 좋은 독서법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2권에서 다루고 있는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 윌리엄 블레이크, 로버트 번즈, 윌리엄 워즈워스, S.T.코울리지, 바이런, P.B. 셸리, 존 키이츠 등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도 모두 번역된 시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 하나하나가 이후의 작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중세로부터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의 영미권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 한 권을 텍스트 삼아 주변부로 가지치기 하는 공부를 해나갈 때 아마 본인도 모르게 축적된 영문학에 대한 교양에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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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냐 > 베낌)여신숭배

 

 '다빈치 코드'의 등장인물인 자크 소니에르와 로버트 랭던은 여신과 여신의 상징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소니에르는 루브르 박물관에 여신상 수집품을 늘려갔고 로버트 랭던은 '잃어버린 신성한 여성의 기호들'이라는 새로운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 '다 빈치코드'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상이 본래 여신과 그 이후에 나타나는 여신숭배를 상징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여신숭배는 적어도 기원전 35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기 때문에 여신숭배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다. 여신숭배에는 오래된 역사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 있지만, 시간이라는 안개속으로 다시 사라져버린다. 기원전 3만5000년 전에 나타났고, 최초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잇는 크로마뇽인이 나타나면서 여신상을 상징하는 듯한 조각상과 삽화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마리자 짐부타스가 집필한 저서 `여신의 언어'는 여신상 중 몇가지를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원래 여신은 만물의 어머니로 여겨졌다. 이제 여신상의 발달 흔적은 중동과 유럽, 인도 전역에 걸쳐 발견할 수 있다. 이중 인도 힌두교에서는 여신숭배를 더욱 고도의 종교 강령으로 봤다. 성서 시대에는 성지 전역에서 여신을 숭배했으며 특히 아세라(Asherah, 이집트에서 신봉하는 여신)를 숭배했다. 어떤 전통에서는 아세라를 여호와의 배우자로 보거나 하느님 그 자체로 보기도 한다. 아세라는 여러 곳에서 `아세라 석'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아세라 석은 똑바로 서 있는 돌로써, 여신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남근을 상징하는 이원적 의미가 있는듯하다.

 부계 사회가 점점 나타나면서 여신숭배나 여신에 대한 예비를 금지시키려는 노력이 일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남신, 왕, 신부, 아버지가 여신, 여왕, 여사제, 어머니를 대신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에서 여사제를 선출한 일은 최근에 불과하다. 여기서 유대기독교 교리가 얼마나 여성을 억압해 순종적으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 일어난듯 하다. 몇몇 연구가의 이론에 따르면, 이슬람 최고의 신인 알라(Allah)의 뿌리는 원래 알라트(Al―lat)여신에 있다. 알라트 여신은 메카의 카바(Kaaba,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성소)와 연관이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이시스를 최고의 여신으로 생각했다. 이집트에는 이시스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여신들이 많지만, 이시스는 신을 탄생시킨 자궁으로 봤다. 이 경우에는 '호루스의 집'이란 뜻의 하토르로 불린다.

 서기 431년에 열린 에페소스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주교의 모임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천주의 거룩한 어머니', 혹은 '신의 어머니'라 하여 그녀를 여신의 반열에 올리자고 결정했다. 그렇지만 주교들은 일반적으로 여신상과 관련해 나타나는 다산을 상징하는 특징을 성모 마리아에게는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검은 성모 숭배를 보면 성모 마리아란 존재를 독립적인 여신으로 인정한 듯하다. 반면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유순한 어머니나 순종적인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 여신의 특징을 없애버리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여성 수천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당했다. 이와 같은 마녀사냥을 이용해 여성의 독립심과 힘이 강해지는 것을 막았고,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여신 숭배를 탄압했다.

 그러다 19세기에 다시 여신숭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위카 종교가 다시 나타났다. `백인 마녀'라고도 알려져 있는 위카(Wicca, 땅 혹은 대지에 바탕을 둔 종교로 새로운 이교도의 하나)는 여신을 높이 숭상하며 기본적으로 신과 여신의 균형, 즉 신에게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가 함께 있다고 믿었다.

 현대에 들어서서 여러 페미니스트 운동으로 여신의 지위는 올라가고 있다. 그 덕분에 다시 한번 여신숭배는 부흥기를 맞고 있다.
 고대 시대부터 여신은 달과 연관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신체주기와 달의 주기에 근거한다. 달이 차고, 꽉 찼다가 기우는 것이 달의 3단계인데, 이 3단계가 여신이 겪는 3단계, 즉 소녀, 어머니, 할머니 단계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신이 거치는 3단계에는 뚜렷한 목적과 가치가 있다. 소녀는 젊음, 성, 활기를 나타내며 어머니는 실질적 여성의 힘, 다산, 양육을, 할머니는 경험, 연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혜를 나타낸다.

 오늘날, 여신의 힘을 숭배하고 이해하는 일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현대 인간이 살아온 오랜 역사에서 여신은 어디에산 존재해왔다. 인류가 지구 위를 걷는 한, 이 일은 계속 될 것이다. 진정 여신은 최초의 신이자 가장 오래된 신이라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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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타자수로서의 능력 과시. 베껴 치는데 10분 걸림.  다빈치 코드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런 책이 다 나오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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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나의 책읽기 - 01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처음 접하고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천재는 많지만 꾸준한 인간은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의 유고집입니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은 출판되지 않았을 테죠. 이 책은 '김현의 독서일기'라는 부제를 달아도 좋을 책이죠. 그때 제가 그의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요. 어째서 대단하다고 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단하다는 건 변함없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 동안 난 뭘 했나 하는 부끄러움에서 오는 충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렇듯 흘러가듯 글을 씀에도 대상의 핵심에 접속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대한 감탄에서 오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저는 10여년 전 대학에서 저보다 나이어린 동기들과 공부했습니다. 그때 저보다 나이가 서너살 어린 동기 중 하나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형 나이가 되면 분명 형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 거라"고. "그래, 그렇겠지."라고 말하며 저는 웃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 저는 그 사실을 잊었는데 그는 그걸 잊지 않았더군요. 10여년이 흐른 어느날 우연히 그 녀석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지금 나는 그 때의 형보다 훨씬 더 많이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때의 형보다도 책을 읽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잘난 척이나 하기 위해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책을 읽는가? 누군가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겁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러다보면 읽는 법이 생길 거다."라고요. 그렇게 답해주면 질문한 이는 마치 제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기고 있으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양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곤 합니다. "닥치는 대로 읽어라. 그러다보면 읽는 법이 생길 거다."란 말의 핵심이 어디에 있을까요? "닥치는 대로" 혹은 "읽는 법" 아마 아는 분들이 다 아실 겁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읽다"에 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애써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 일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 일인지... 깨워놓고 돌아서면 또 드러누워 버리는 게 애들이지요. 하지만 일요일 아침 명작 만화라도 할라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 TV 앞에 앉는 것이 또한 애들입니다.

좋아서 하는 일도 힘든 법이지요. 하지만 즐기면서 맘 편하게 하는 일은 그만큼 덜 힘듭니다. 책을 읽는 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 제가 책의 맛을 알게 된 것은 나관중의 삼국지 때문이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처음 읽었던 삼국지에 빠져들게 된 것은 삼촌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그 무렵 삼촌은 삼국지를 3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세상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며 삼국지를 권했습니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저는 어린 제 손으로는 들기도 어려운 삼국지를 벗삼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삼국지를 100여번 가량 읽은 것 같습니다. 재미로 읽다가 중독되어 버린 것이죠. 지금도 삼국지를 붙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시 읽게 됩니다. 아마도 그것이 삼국지의 매력이겠지요.

책은 무엇보다 재미로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책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요. 가령, 롤스의 "정의론" 같은 책은 재미로만 읽기엔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제게 '정의론'이 다른 책들 가령,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배배꼬인 문장을 읽는 것보다 고통스럽거나 재미없었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다시 앞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서 책을 읽는다. 그 행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읽을 것인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아무 곳에서나 책을 읽고, 아무 곳에나 책을 두고, 특별한 자세 없이 읽습니다. 그렇게 읽어도 기억에 남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실험을 햇다고 하더군요. 1500명의 학생들에게 30장 분량의 역사책을 읽게 하고, 20분이 지난 뒤에 읽은 책에 대해 요약해보라고 시켰더니 단지 15명의 학생들만이 기본적인 주제에 대해 이해하고 있더란 겁니다.

저는 책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한 책을 기억하기 위해 읽지도 않습니다. 기억하려고 일부러 공을 들여 읽지도 않습니다. 다음은 책 읽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많은 독서가들이 지적한 공통의 내용입니다.

1) 책 속의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한다.
- 앞서 분명히 오해라고 말했음에도 벌써 까먹은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수록된 모든 단어를 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 긋고 요약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핵심이 무엇이고, 이것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책도 역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장은 다시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단락이 모여 하나의 주제 아래 소단원이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한 장을 이루고, 1부가 됩니다. 그것을 역순으로 풀이해보면 모든 문장, 모든 단어가 중요할리 없겠지요.

2) 한 번만 읽으면 충분하다.
- 저는 극장에서 본 영화는 반드시 집에서 다시 비디오로 봅니다. 인간이 사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50분이라고 합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죠, 영화의 평균 런닝 타임은 2시간 30분 가량합니다. 그런데 제 경우는 전자오락 할 때를 제외하고는 10분 이상 집중을 못합니다. 영화는 한 장면에 때로 책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저는 종종 영화를 보다고 남들은 다 봤다는 중요한 장면을 기억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한 번 본 영화를 두 번 볼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시간 낭비를 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책을 샀다면 반품하셔야 합니다. 몇 장 안 되는 동화책도 다시 읽으면 다시 새로운 장면이 등장하곤 합니다.

3) 건너뛰거나 너무 빨리 읽으면 이해력이 떨어진다.
- 계단을 걷다보면 때로 두 개씩 오를 때도 있습니다. 다리 길이만 충분하다면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법은 없지요.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보면 중요한 대목과 그렇지 않은 대목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100미터를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들도 스타트 순간과 스퍼트 순간, 골인 지점에서 힘을 안배한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때도 힘의 안배는 필요한 법이죠.

4) 내가 책을 읽지 못하는 건 빨리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 종종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꼭 그들의 탓은 아니지만 러시아인들의 악명 높은 이름 때문에 등장인물조차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제 집사람과 영화를 볼 때 제가 짜증내 하는 부분 중 하나는 저도 처음보고, 자기도 처음보면서 왜 저래?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매우 친절하게 스토리 라인을 짜맞춰 가기 때문에 제가 답하고 있는 동안 혹은 물어보고 있는 동안 다음 대목에서 작중 인물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장면으로 충실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읽다보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다음 어느 순간엔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책은 종류에 따라 읽는 템포와 방법을 달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김성동의 천자문을 읽는다고 했을 때 처음부터 꾸준하게 정독하는 방법도 맞을 것이고, 어느 특정 부분부터 읽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하지만 죄와벌을 건너뛰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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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중국고전명언사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고전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에게 석학(碩學)이란 헌사를 바치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고 정확한 한자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일생일업(一生一業)이란 말이 낯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을 볼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보다 나은 문화적 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된 공로만을 기리기 위한 것은 아닐 게다. 사실 이 책 "중국고전명언사전"은 내가 구입한 책은 아니고, 사무실에 굴러다니길래 며칠동안 공들여 읽었던 책이다. 이 책 이전에도 동양고전들을 다이제스트한 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책을 읽어 본 뒤 이 책에 "사전"이란 말이 들어간 것이 공연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인문학에 조금의 관심만 있는 사람이라면(고등학교 때 다 배운다, 기억이 안 난다면 그건 수업을 열심히 안 들은 탓이겠지만) 서양의 고전 전통에 대해서 도표를 그릴 수 있다. 서양의 고전이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이고 어쩌고 하는 것 말이다. 헤브라이즘의 고전이라면 역시 성서를 들 수 있을 것이고, 헬레니즘의 고전들이라 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메로스, 헤로도투스 그리고 그리스 4대 비극과 같은 책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시 스토아학파와 스콜라철학, 그리고 르네상스에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임마누엘 칸트에서 헤겔과 포이어바흐 그리고 20세기의 메타이론이랄 수 있는 칼 맑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신좌파가 등장하기도 하고, 구조주의가 등장하기도 한다. 매우 거친 논법이긴 하지만 서양고전의 맥을 짚어보자면 대충 저와 흡사한 경로들을 밟아온다.

종종 우리 인문학자들 혹은 사회학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엄살은 아니다. 할리우드의 B급 영화들을 보다가 나는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도시 뒷골목 삼류인생을 사는 허름한 술집의 바텐더가 어느날 셰익스피어의 한 구절을 멋드러지게 암송해내는 장면을 볼 때 나는 서양 인문학의 전통 혹은 그들의 "교양(Bildung)"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쌓아올려진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서구를 따라가기만 하는 동안엔 결코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이론들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이 적절한 사례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 대해 우리가 동아시아 담론을 말할 때 참 맥빠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흡사하다. 그들에게 돌아오는 답이 "동아시아? 그런 게 있었냐?"하는 투의 것이거나, "어째서 동아시아냐? 아시아에 한국과 일본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답이 돌아올 때도 매일반이다.(우리들은 잘 모르지만 베트남 역시 대단한 한자문화권이며, 그들도 한시를 짓고, 삼국지를 읽는다) 

중국이 거만하다는 비판을 하고 싶어서 꺼내는 말이 아니다. 최근 동북공정 문제로 인해 우리들의 비윗장이 상해 있는 것과 별개로 중국은 아시아 그 자체이거나, 최소한 그런 자부심을 주장할만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자존심을 보상받기 위해 이 리뷰에서 적당한 이야기들을 끼워넣을 수도 있겠지만 별로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종종 국학 내지는 우리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중국의 학자들에 비해 두 배 혹은 세 배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중국이 중국의 전통에 따라 공부하기 위해서 그들은 중국의 고전들만 읽으면 되지만, 우리는 우리의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의 고전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reference book"의 수가 우리에겐 저들보다 더 많아야만 한다.

'모로하시 데쓰지'라는 일본 학자에게도 역시 중국의 고전은 우리 학자들이 느끼는 천애의 절벽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준 "대한화사전" 집필은 물론 그 혼자 한 일은 아니다. 일본의 수많은 학자들이 "대한화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모로하시 데쓰지가 "대한화사전"의 집필에 착수한 것은 1929년의 일이었고, 모두 13권으로 완성된 것은 1960년의 일이었다. 무려 30년이 걸린 대역사였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 "중국고전명언사전"은 "대한화사전"을 만들다 보니 알게 된 지식을 활용해서 만든 책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그리스.로마신화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양미술사를 함께 공부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들을 함께 공부하지 않을 수 없듯이 이런 공부들을 하다 보니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책은 물론 그리스로마신화로 본 서양미술사, 그리스로마신화로 본 그리스 비극 등등의 여러 아이템들이 책으로 엮이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가 오늘날 인터넷을 사용하며 자주 쓰는 "콘텐츠(contents)"란 말, 문화적 인프라를 강화시키는 콘텐츠니 어쩌느니 하면서 사용하는 말이 지향하는 바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산을 전세계가 얼마나 공유하고 있으며 흥미있어 하는가?"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가령, 중국의 나관중이 집필한 "삼국지"는 동양의 고전이다.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정한 존경이 묻어나는 말이다. 국제저작권법에 따르면 작가의 사후 50년간은 지적재산권을 보호받게 되어 있다. 만약 나관중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혹은 사후 50년이 경과하지 않았다면,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올라있는 "삼국지" 관련 도서 762종 중 태반은 매년 일정한 액수를 중국의 나관중 전담 에이전시에 내야 할 것이다. 물론 인류의, 한 시대의, 한 세계의 문화적 자산을 놓고 돈놀이 셈하듯 이야기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긴 하나, 현재 우리가 말하는 콘텐츠란 것의 의미가 그렇다.

순전히 산업적인 측면에서 고전에 접근했을 때, 오늘날까지 여전히 생명을 잃지 않고 있는 고전의 가치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이 책 "중국고전명언사전"에 실린 모로하시 데쓰지의 저자 서문은 이렇게 두툼한 책을 쓴 이의 서문 답지 않게 매우 짧다. 이 책의 페이지수가 전부 1,640쪽(거의 목침 두께이다)인 걸을 고려할 때 저자 서문은 불과 1쪽 원고매수로 계산해봐야 200자 원고지로 3장 안팎으로 보인다. 그는 이 짧은 서문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전에 실린 명언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어떤 때는 사람을 가르쳐서 인도하고, 어떤 때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한다. 고전이 수천 년에 걸쳐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가르쳐서 인도하였고, 때로는 격려하고 위로하였다는 사실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책의 저자 자신이 고전을 읽으며 절절하게 느꼈던 소감일 것이다. 앞서 나는 할리우드 B급 영화의 한 토막에서도 셰익스피어가 인용되고, 볼테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 혹은 우리의 일상에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고전의 문구들은 인용되지 않을까?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우리들 자신도 이미 부지불식간에 고전의 향기에 취해있기에 그것을 인용하고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국의 고전들은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역경, 좌전, 효경, 충경, 근사록, 소학, 노자, 장자, 묵자, 순자, 관자, 한비자, 손자, 오자, 회남자, 당시선"에 이른다. 낯익은 "논어, 맹자"는 물론 "충경이나 관자"의 경우엔 나로서도 이 책을 통해 처음 듣는 것들이다. 동양의 고전은 그토록 우리들에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 "중국고전명언사전"은 사전이면서 사전이 아니다. 이 책은 그간 쏟아져 나온 여러 종류의 "책에 대한 책"들과 같이 우리 시대의 정전(正典)에 대한 선별을 통해 갈고 다듬어진 실라버스(syllabus)이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책이다. 아마 내가 헌사할 수 있는 최상의 헌사가 있다면 나는 이 책에 그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싶다. 모로하시 데쓰지는 이 책을 엮는데 8년이 걸렸다. 우리가 이런 책을 8년간 똑같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8년간 꾸준히 읽는 일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8년간 읽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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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 2004-09-1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다른 곳도 없건만은 합쳐 놓으면 왜이렇게 예쁜 거죠??? 흥!

stella.K 2004-09-14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하시는구나, 한나님. 후후.

마태우스 2004-09-1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정말 광채가 나는군요...

털짱 2004-09-1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흑... 저도 심은하를 좋아하니까 이해할게요..가슴은 찢어지지만..ㅜ_ㅜ

stella.K 2004-09-14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 우리 그냥 마태님 심은하한테 줘 버립시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어디 마태님 한분 뿐이겠습니까? 저도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리 좋아하는 걸...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