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y, your name is Duck?” “난 영덕이라니까”

'당신의 이름' 영어로 어떻게....

모든 게 ‘이미지’로 결정되는 요즘 이름도 경쟁력이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야 감사히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영어 이름’만은 자기 식대로 지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어에 대한 생각이 어떻든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해야 하는 건 ‘글로벌’시대의 숙명. 특히 요즘 아이들에게 영어 이름은 ‘또 다른 내 이름’이다. 영어유치원이나 영어학원에서 영어 이름으로 호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이름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이름인데 외국인들이 보기엔 아리송한 이름도 적지 않다. 이름, 이제 영어 이름까지 고민해야 하는 시대다. 기왕 지을 거라면 어떤 이름이 좋을까.

영어 표기에 울고 웃고외국인들, 범·식·강·국자 들어가는 이름 듣고 ‘큭큭큭’

지난달 서울 강남의 한 영어학원. 미국인 강사들이 학생 명부를 돌려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문제의 학생 이름은 ‘고인범’(Goh, In-Bum). 담임강사는 “이름 부를 때마다 ‘엉덩이(bum) 속으로 들어가라’는 뜻이 생각난다”며 “반을 바꿔달라”고 호소했다. ‘동(영어로 dong은 남성 성기를 뜻하는 속어)’이나 ‘석(suck는 ‘빨다’라는 뜻)’이 들어간 이름 역시 외국인들이 야릇하게 반응하는 이름. “유영호(‘당신은 젊은 매춘부 You, young ho)’라는 말로 들림)’ 같은 이름도 마찬가지다. 영어 강사 키이스 존스턴(여의도 스마트주니어 어학원 강사)씨는 ‘범석’의 경우 ‘Beomsok’으로 ‘영호’는 ‘Yonghoe’로 표기하라고 권한다.

▲ 요즘 아이들에게 영어 이름은 또 하나의 얼굴이다.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캐나다문화어학원의 어린이반 교실에‘줄리’‘케빈’같은 영어 이름이 적힌 명찰이 나란히 걸려 있다. 이태경 객원기자
그 밖에 곽씨 성을 가진 의사(Dr. Kwak·‘돌팔이 의사 quack라는 말을 연상시킴), ‘오소영(Oh, So young·‘오, 너무 젊어’라는 문장)’이라는 노인의 이름도 제이 레노 쇼 같은 미국 토크쇼에서 종종 농담거리로 도마에 오른다. ‘덕’ ‘식’ ‘강’ ‘길’ ‘국’ ‘락’ ‘함’ 등이 들어가는 이름도 ‘오리(duck)’ ‘아픈(sick)’ ‘조폭(gang)’ ‘죽이다(kill)’ ‘동양인에 대한 경멸적 표현(gook)’ ‘자물쇠를 채우다(lock)’ ‘햄(ham)’등을 떠올리게 된다는 게 외국인들의 지적이다. 영문 철자를 ‘Kang’ 대신 ‘Gang’으로, ‘Duk’ 대신 ‘Duck’으로 써서 평생 놀림거리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영문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글로벌시대에 좀 더 편리할까? 문화관광부는 2000년 국립국어원이 정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를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이는 현지인 발음이나 어감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의 성을 표기법이 정한 ‘No’ 대신 ‘Roh’로 쓴다.

‘John’이나 ‘Sarah’처럼 미국식 이름을 따로 짓는 것도 방법이다. 단 여권에는 한국 이름이 식별되게 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변형이 허가되지 않는다. 예일대 법대의 고홍주(Harold Hongju Koh) 학장처럼 영어 이름과 한국 이름을 병기하는 것은 허용된다. 한 구청 관계자는 “여권의 영문 이름은 변경이 까다롭기 때문에 처음 만들 당시에 신중히 결정해 표기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 ※영문 표기때 참고를...
한글 이름을 영문으로 바꾸는 데 철칙은 없다. 긴 모음은 피하고, 이름을 따로 따로 떼어 쓰지 말고, 합쳐서 한 단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글로벌’기준으로 볼 때 자연스럽다. 아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제안하는 한글 이름 영문 표기. 정재연기자
그러나 현지인이 보기엔 문제 없는 이름도 다른 나라 사람이 봤을 땐 우스울 수 있는 만큼 영어식 어감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국립국어원의 김선철 연구원은 “일본 이름 ‘타나카(Tanaka)’도 처음엔 미국인들이 ‘터내커’라고 발음하다가 일본 문화와 이름에 익숙해지면서 점차 ‘타나카’로 통용되게 됐다”며 “국력을 신장하고 유명인을 많이 배출해 외국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말 이름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게 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흔한 한국인 이름 20代, 남자는 동현… 여자는 민정


‘철수와 영희’는 1980년대에 이미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중년 이상에선 여전히 가장 보편적인 ‘한국인의 이름’이다. 서울 시내 인명 전화번호부에 게재된 전화 가입자 중 가장 많은 이름은 ‘김영숙’. 그리고 정숙, 영자, 영희, 정희, 순자, 정자, 영순 등이 뒤를 이었다. 남자 ‘철수’는 2727명이었다. ‘영호’(6687명)나 ‘영수’(7902명)도 여전히 많았다.

30대 이하에선 ‘한국인의 대표 이름’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인터넷 ‘싸이월드’ 가입자 이름을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표 참조〉 남자의 경우 10대와 20대에선 ‘동현’ ‘민수’ ‘지훈’, 30대에선 ‘상훈’ ‘정훈’ ‘현수’ 등이, 40대에선 ‘영수’ ‘성수’ ‘영호’ ‘영철’ 등이 많았다. 여자의 경우는 10대에선 ‘민지’ ‘민정’ ‘지혜’ ‘은지’가 가장 많아 30대의 ‘은정’ ‘미경’ ‘미영’과는 차이가 있었다.

요즘 아이들 이름은 남아 이름은 큰 변화가 없는 반면 여아 이름은 중성화가 두드러지는 편. 숭의여대 부설 유치원의 경우 만 3~5세 여야 전체인 35명 가운데 3분의 1인 12명이 ‘지우’ ‘진서’ ‘재희’ ‘종인’ ‘현모’ ‘세민’ ‘성현’ 같은 중성적 이름이고, ‘유빈’ ‘서빈’처럼 ‘빈’자로 끝나는 이름, ‘유름’ ‘조이’ 같은 독특한 이름도 눈에 띄었다.

흔한 미국인 이름 남자는 Jacob… 여자는 Emily


무역업을 하며 자주 만나는 외국인들에게 ‘두휵’이라고 잘못 불렸던 김도혁(Kim, Do Hyuk)씨는 외동딸 이름을 아예 ‘재인’으로 지었지만, 요즘 후회하고 있다. 어느 날 외국인으로부터 ‘Jane’이 우리나라로 치면, ‘순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왕 영어 이름을 짓는다면 시대성과 유행을 감안해볼 것. 188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여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이름이었던 ‘메리(Mary)’는 80년대 이후 20위권에서 아예 사라졌다. 남성 이름으로는 ‘데이비드(David)’ ‘마이클(Michael)’ ‘제임스(James)’ 등이 꾸준히 애용되고 있고, 2000년 이후로는 ‘제이컵(Jacob)’이 급부상하는 추세. 애칭으로 부르면 어감이 달라지기도 한다. ‘Elizabeth’보다는 ‘Liz’나 ‘Beth’가, ‘Jane’보다는 ‘Jan’이, ‘Leonard’보다는 ‘Leo’가 더 어리게 느껴진다.

요즘 미국에선 다소 이국적인 이름이 뜨는 추세다. ‘나바이어(Nevaeh, 천국·Heaven을 거꾸로 쓴 단어)’나 ‘젠(Zen, 선·禪의 영어식 표기)’ 같은 국적불명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River’(강), ‘Forest’(숲), Trinity’(삼위일체)처럼 뜻이 좋은 기존 단어를 쓰는 경우도 늘고 있고, 우리나라처럼 여자 아이 이름을 중성적으로 짓는 것도 인기다.

이자연기자 achim@chosun.com
신동흔기자 dh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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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6-05-27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자고 2,3살되는 아기들에게 까지 영어를 가르키는 지 모르겠어요.
백화점 쎄일할 때 문을 열리자마자 달음박질하는 욕망의 화신들의 걸신들린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지들 못한 한풀이라면 불쌍한 것은 그들의 자녀들이지요.

stella.K 2006-05-28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한국어가 공용어가 되야할텐데 말이죠.
 
 전출처 : 로쟈 > 영화가 도스토예스프키를 인용하는 방식

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를 읽어보기 위해 '씨네21'(06. 05. 10)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전영객잔' 코너에서 김소영 교수의 흥미로운 칼럼을 발견하게 되어 옮겨온다. 원제는 '계급 상승 욕구와 취향 맞추기'이며, '<매치포인트>와 <달콤, 살벌한 연인>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이 부제이다. 부제에서 드러나지만 최근 개봉작 두 편에 대한 리뷰 성격의 글인데, 물론 나의 관심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에 더 가 있다.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은) 두 편의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탓에 내가 덧붙일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1 때 학교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뭐, 그렇겠거니 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이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곧잘 썼는데 조숙한 내용인데다 (도스토예프스키) 표절 의혹이 느껴져 일단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이후로도 대상이라고는 받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조숙해서 장려해야 할 대상이던 나는 그 뒤에도 소설 습작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깊이 감명받아 누구에게나 해가 되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첫 번째 소설의 독자가 바로 어머니가 (몰래) 되는 통에 내 윤리적 성향을 의심받아 대단히 고생했다. 나의 도스토예프스키 모작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유난히 강력하게 상기시켜주는 두편의 영화가 있으니 <달콤, 살벌한 연인>과 <매치포인트>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교양의 척도이자 살인 지침서로 등장한다. 굳이 제목에서 생각하자면, 어떤 살벌함을 가리키는 인덱스다.

-<매치포인트>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양의 척도이자,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인생의 살벌한 비극을 가리키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도스토예프스키가 등장한다고 지적하고 그래서 두편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은 반쯤 진담이지만, 둘 다 계급 상승이나 신분, 취향이라는 문제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영화에는- <매치포인트>엔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아니라 스트린드베리, 베르디 등이 그리고 <달콤, 살벌한 연인>엔 몬드리안, 고흐 등이 등장한다― 대단히 통속화된 고급예술과 아직은 약간 접근 불가능한 예술 작품을 계급성의 중요한 참조물로 활용한다.

욕망과 행운으로 대치된 <매치포인트>의 도덕적 판단

-<매치포인트>라는 제목의 의미는 승패를 좌우하는 마지막 1점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매치포인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주인공인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프로 테니스 선수였으나,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와 테니스 교습을 시작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어려운 처지다. 그러나 그는 영국 상류층의 한량인 톰(매튜 구드)을 만나 오페라를 좋아하는 자신의 고상한 교양을 말한 덕에 톰의 가족이 사용하는 로열오페라하우스의 관람석에 앉게 된다. 그러다가 톰의 여동생인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의 눈에 든다.

-한편 톰의 연인이자 크리스가 한눈에 매혹되는 노라(스칼렛 요한슨) 역시 사실 매치포인트가 필요하다. 미국 콜로라도 볼더 출신으로 여배우가 되려 하지만 불행히도 오디션에는 실패하고 남자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한다. 그녀에겐 몇년 대학을 다닌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진 언니가 있지만 마약에 빠져 있고, 아버지는 가족을 두고 떠났으며, 직업을 전전하던 어머니가 있다.

-크리스와 노라가 만난 계기는 영국 상류층 올드 머니의 ‘미덕’을 가진 휴잇 집안의 혼기가 닥친 톰과 클로에의 각각의 파트너로서다. 크리스와 노라는 둘 다 인생의 게임에서 1점이라도 더 필요한 사람들이라 서로를 금방 알아보지만, 크리스의 기회주의적 섹스 이후 둘은 헤어진다. 톰은 노라를 떠나 자신의 집안이 승인할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 반면 휴잇 집안은 크리스에게 그에 걸맞은 직책을 구해준 뒤 딸과 결혼시킨다. 여기까지 스코어를 보자면 크리스는 계급 무한 상승 이동 가능한 점수를 얻었고, 노라는 잃었다. 그러나 문제는 크리스가 템스 강가의 호화 아파트의 삶 외의 무엇인가 다른 것, 말하자면 애욕이라고 알려진 것을 노라에게 투사하면서 일어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크리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노라에게 일어난다.

-노라는 그녀의 말처럼 남자들이 그녀와 잠을 자면 뭔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혹하기 때문에 상대가 톰이건 크리스건 사실 별 관계가 없다. 톰이 잘생기고 그녀에게 선물 공세를 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크리스에게 말했지만, 초반의 호기심 말고는 사실 노라가 왜 크리스와 관계를 하는지는 그녀의 말대로 모호하다. 처음 만났을 때 노라는 크리스가 대단히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격한 장면은 둘이 호텔에서 나와 다시 노라의 아파트로 가 정사를 벌이는 부분이다. 노라는 크리스의 넥타이를 풀어 그의 눈을 가리는데, 크리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 이제까지 그는 냉정하고 계산된 발언을 했었다. 상류층의 별장이나 런던의 팝, 음식점 그리고 테이트 모던 등을 우아하게 보여주던 카메라가 이 부분을 정면에서 잡기 때문에 관객은 거의 날것처럼 이 장면을 불현듯 응시하게 된다. 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적 에너지는 상당히 높다. 또 노라가 뒤에 있기 때문에 관객은 흥분하고 만족해가는 남자의 몸을 직접 마주한다.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 욕구의 실현이라는 것 말고도 크리스의 육체적 흥분과 쾌락의 충족을 보여준다. 관객이 그의 성적 흥분을 날것처럼 느끼게 구조화되어 있는 셈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종결부 크리스가 노라에게 가하는 모종의 끔찍한 무엇과 기묘한 대구를 이룬다(스포일러를 피하고 있음). 이 영화에서 질리는 부분은 노라의 일기장의 진술마저도 크리스의 그저 행운으로 충만한 사회적 건재를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령의 저주도 크리스의 비윤리적 행운을 앗아가진 못한다. 굳이 그 의미를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층 계급, 건재의 비밀이 자본가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화는 도덕적 망설임없이 그 부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또 도스토예프스키와 소포클레스의 사유를 씌운다. 하지만 사실 영화는 크리스의 살갗 벗겨진 욕망과 상류층의 옷으로 덧씌운 욕구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또 그것은 노라의 삶의 포인트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룬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이나 영화 버전인 <젊은이의 양지>(1951)와 다른 점은 남자주인공이 사형과 같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위 작품들에선 먼저 가난한 여자와의 관계 중에 부자인 여자를 만나는 설정이지만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을 가능하게 해줄 대상과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을 거의 동시에 등장시킨다. 바로 그러한 동시성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성적 충동에 대한 욕망은 서로 경합하면서 영화에 응축된 긴장과 에너지를 더한다.

-우디 앨런은 예술·상류 계층의 문화와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정교하게 혼합해 살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는 텍스트의 내재적 논리를 만들어내고, 영국사회의 세습적 부의 완고함과 자비로움을 우아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아메리카의 비극>의 1920년대 미국이나 <젊은이의 양지>의 1950년대와는 달리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매치포인트>가 위의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텍스트가 관객에게 주입하려는 이런 충동, 유혹과 달리 이 영화의 여성과 일하는 계층, 그리고 노인에 대한 혐오는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스처이지 텍스트를 가볍게 태울 정도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속적 인용 <달콤, 살벌한 연인>

-이 영화의 두 장면에서 나는 사실 포복절도했다. 그 하나가 영화의 마지막 즈음, 헤어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사람들은 연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느낀다거나 하는데, 황대우(박용우)는 암매장된 시체가 발견되면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 나는 사실 토요일 저녁, 달콤한 무드를 가장하고 있는 연인들 틈에 끼어 멀티플렉스 복도 끝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처음에 들어섰을 때 둘씩 앉은 연인들이 매우 동정어린 눈길을 던졌다. 시사회에서 볼걸…). 그래서 원한 것만큼의 박장대소를 연출하지는 못했으나 모처럼만에 보는 엉뚱하고 웃기는 코미디다.

-이 영화는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에 버금가는 몬드리안 그림을 놓고도 누군지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생판 초면인 한 여자 미나(최강희)가 대학 영문과 강사인 남자를 만나 취향 갖추기를 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 영화는 취향을 통한 계층간, 성별간 구별짓기의 풍속도이면서 또한 그러한 고급 취향의 통속화 과정이다. 대학 영문과 강사와 혈액형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유치’한 여자간의 취향의 조정 과정 말이다. 동시에 순애보적 사랑이나 그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청순명랑 타입의 여성에 대한 가벼운 해체적 시각이 있다. 이웃집 청순 명랑 처녀가 블랙 위도로 밝혀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두 번째로 웃긴 장면은 미나/미자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과 해석이다. 예의 그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구절 말이다. <매치포인트>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보다 통속적이고 웃기는 코드로 사용되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참조가 덜 느끼하다. 이렇게 가볍게 날이 선 영화, 또 농담이 상당히 마이너한 감성인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 주류영화의 배급망 속으로 올려놓은 것은 앞으로도 흥미로운 벤치마킹의 사례가 될 것 같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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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전 기생들 속내 들여다볼까

평양기생 67명 사연 담은 ‘녹파잡기’ 발견

‘젊은 나이에도 노래와 춤 모두 빼어난 기생 화월(花月). 휘영청 밝은 봄밤. 그녀는 비단 주렴을 걷어 방안으로 달빛을 들인다.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 그녀는 대동문 성루에 올랐다. 쪽진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난간을 치며 노래했다. 지나던 구름도 멈춰 귀를 기울였다….’

19세기 초반 평양 기생 67명을 ‘인터뷰’한 글이 발견됐다. 한재락(1775년 직후~1833년 이후)의 ‘녹파잡기(綠波雜記)’다. 개성 갑부의 아들이었지만 과거(科擧)에 실패했던 그가 이름난 평양 기생을 직접 만나 용모·예술적 자질·성격을 기록한 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는 최근 단국대와 고려대에서 이 책의 필사본을 찾아 내용 일부를 발표하면서 “이 책에 성행위 장면은 없다. 간결한 문장에 정감을 살린 격조 높은 글”이라고 평했다.

기생들의 인간다움은 사랑이야기에서 두드러진다. 열한 살 초제는 비 내린 어느 날, 벼슬아치 행차에 ‘출장’ 나가려다 가죽신에 구멍이 났다. 어찌할 바 모르는 그녀를 위해 더벅머리 소년이 신을 벗어주고 맨발로 갔다. 그녀는 소년의 신발을 꼭 감싸 쥐고 말했다. “저 비록 어리지만 처녀의 몸으로 다른 이의 신발을 신었다. 규방 여인의 행실이 변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그와 인연을 맺게 되면 오늘 일 때문일 것이다.”

▲ 평양 기생에 대해 기록한‘녹파잡기’. 안대회 교수 제공
남자를 겪지 않은 열다섯 초운은 한 유명한 선비로부터 시를 받았다. 이후 다른 손님을 거절한 채 우울하게 지냈다. 세월이 지나 선비가 평양에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품속에 지닌 선비의 시를 보여 주었다. 얼마나 보고 또 보았는지 보풀이 심하게 날 정도였다.

기생 나섬은 곱고 아름다웠지만 도도했다. 준수한 남자와는 하루 저녁 정을 붙였지만 천박한 사내와는 백 꿰미 금전을 줘도 쳐다보지 않았다. 어느 소년 손님이 그녀의 가락지를 집어서 외설스런 짓을 했다. 그녀는 바로 가락지를 뺏어 부숴버린 뒤 정색하고 준절하게 책망했다.

67명 기생 중 맨 처음 등장하는 스물네 살 죽엽. 웅장하고 화려한 한양을 사랑하고, 개성 만월대 폐허에 눈물지었다는 그녀는 말한다. “언젠가 저도 한 사내를 만나면 그 남자 속박을 받겠지요. 봄 가을 좋은 날 명승지를 골라 거문고를 안고 가서 마음껏 노닐며 이 젊은 날을 놓치지 말아야지요.”

이동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황진이·홍랑 같은 유명 기생의 기록이 일부 있지만 이처럼 기생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책에 묘사된 평양 기생들은 서화와 음악을 즐기는 ‘교양인’이었고, 지조도 높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젊은 날을 즐기려는 탐미적 경향도 보인다. 책 제목 ‘녹파’는 대동강 푸른 물결, 평양을 상징한다.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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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연애시대의 결말, 난 이런걸 기대했다..

니도 좋고, 니도 좋으니

다함께 살자꾸나

 

ㅡ..ㅡ;

 

남의 불행을 씹어 삼켜서 자신의 행복으로 살찌울 순 없잖어... ㅎㅎㅎ

모두다 해피 한 것 아닌가.. ㅡ..ㅡ;

 

 

아니면 원흉.. 감우성만 죽던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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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5-24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
이런 드라마의 경우는 실제로 일어나기 쉽지 않죠. 하지만 이럴수도 있지 않느냐에 저는 공감하는데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감우성이 손예진에게 그러잖아요, 이대로 시간이 흘러버리면 그땐 이 시간을 뭐라고 할 것 같냐고. 이미 지나가버린 걸 돌이킬 수 없다고 하지만 후회 좀 하면 어떠냐고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장면이요.
그렇게 되기까지 전후맥락이 없다면 감우성뿐 아니라 손예진도 나쁜뇬인데, 남이 얼만큼 불행한가는 당사자만 알아요. 그러므로 남의 불행을 씹어 자신의 행복으로 살찌운다는 건 라주미힌님 주관적인 해석일테죠. 행복도 그들의 몫이고 불행도 그들의 몫이죠. 너무 이분법적으로만 본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미안.
- 2006-05-24 15:12 수정  삭제
 
라주미힌
드라마라서 드라마처럼 얘기했는데...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욤. 흐흐
타인을 이해할 수 없으니 자신에게 충실하자 뭐 그런건가요?
뭐가 이분법인지도 모르겠고... 쩝쩝쩝
주관적인 해석과 객관적인 해석의 차이도 모르겠어욤.. 나 머리 나쁜가봐요 ㅎㅎㅎ - 2006-05-24 15:21
 
stella09
뭐 그럴수도 있겠죠. 근데 드라마에서 감우성의 부인이 편지 써 놓고 나가잖아요. 내가 어떤 결정을해도 너의 생각은 변하지 않을거라구 또 주절주절대던 내용. 거기에도 상당한 키가 있다고 봐요. 물론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거죠.
솔직히 사랑의 문제는 서로의 이해와 양보가 있지 않으면 안되거든요. 처음엔 손예진이 양보하려고 했죠. 그 심리학 교수로부터 시작해서 이동진의 결혼까지.
그런데 이동진이 기차안에서 은호를 위해 자신이 양보하고 희생하려고 해요. 은호는 대성리에서 내리라고 하는데 안 내리고 춘천까지 가잖아요.
그 사이 공준표가 동신의 처를 설득하죠.
마지막엔 동진처가 양보하고 희생하죠. 그런 식으로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게 사랑이겠죠.
내 사랑만 강조하면 세상 살벌해서 어찌살아요. 당장 드라마도 어제로 종영 못할껄요.
- 2006-05-24 15:27 수정  삭제
 
라주미힌
그런데 왜 여자들이 서로들 희생하고 양보를 해야하죠... 11부터 안봐서 모르겠네욤.
주제치고는 좀 진부한 것 같아요. 여성들의 희생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남자는 어부지리로 주워먹고..

이 드라마가 실패한 이유는 핑퐁이 너무 많았음.. 결국 이렇게 될걸...
전희가 너무 길고 지루했다고나 할까... 절정의 순간을 놓쳐버림.
그러니 마무리는 나레이션으로 도배를 하지않았나 싶어요. - 2006-05-24 15:36
 
stella09
좀 그렇긴 하죠? 남자도 희생할 수 있는데. 흐흐. 아무래도 극본이 여자라서 그런가 보죠. 그래도 전 예쁜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연출도 좋았고. 만족도 99%면 너무 잘 주는 건가? 그럼 90% 정도로 하죠.^^ - 2006-05-24 15:37 수정  삭제
 
 전출처 : 로쟈 > 콘래드의 다짐

창비주간논평이 이메일로 들어와 있다. 잊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내가 구독신청을 했던 모양이다. 최근의 논평 가운데 어제(06. 05. 23) 날짜로 입력된 백낙청 교수의 글을 옮겨온다. 제목은 '소설 속의 환상과 콘래드의 다짐'이다(이 페이퍼의 제목은 더 간명하게 붙였다). 콘래드(혹은 콘라드)를 읽은 적이 없다 하더라도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 콘래드의 <어둠의 속>(<암흑의 핵심>)이라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럼 좀 흥미가 생길 수도 있고. 그럼, 콘래드와 좀더 친숙해지자는 의미에서 논평 칼럼을 읽어보기로 한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는 폴란드 태생으로 선원과 선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영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낭만적인 생애에다가 그에게 제2외국어(프랑스어 다음으로)인 영어로 글을 써서 영국소설의 대가가 되었다는 이색적인 후광이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론 그의 문학 자체이며, 이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가 있었지만 20세기 유럽소설의 또다른 거장(巨匠)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다음과 같은 만년의 고백이 특히 흥미롭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라고 말할 때면 나는 얼굴을 감추고 싶어집니다. 넌센스지요! 나에게는 가당치 않은 호칭이며, 조셉 콘래드야말로—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사실인데—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가입니다. 나는 <노스트로모>(Nostromo)나 저 멋진 <로드 짐>(Lord Jim)을 절대로 못 썼을 것입니다. 물론 그도 <마(魔)의 산>이나 <파우스투스 박사>를 쓰지는 못했겠지만, 양쪽을 비교해볼 때 콘래드에게 훨씬 유리한 계산이 나옵니다." (1951년 8월 28일 The New York Herald Tribune지의 문학란 편집자 Irita Van Doren에게 보낸 편지)

-이런 콘래드가 전통적인 사실주의에 안주하지 않았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노스트로모>와 <로드 짐>을 포함한 그의 많은 소설들은 처음 읽는 독자가 어리둥절할 정도의 대담한 서사기법상의 실험을 수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노스트로모>는 한길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절판된 듯하다). 그런데 현실세계의 국한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또는 환상적 요소의 도입에 대해서만은 명백한 거부의사를 밝힌 이 또한 콘래드다.



-후기작에 속하는 중편(또는 경장편) <그림자 선(線)>(The Shadow-Line, 1916)에는 태국 연안을 항해하던 배가 바람이 없어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오도 가도 못하여 선장으로서의 첫 항해에 오른 젊은 주인공에게 잊지 못할 시련을 안긴다. 일등항해사는 실제로 배가 마법에 걸렸다고 믿고 그렇게 주장한다. 게다가 일부 독자와 비평가들마저 콘래드가 이 작품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도입했다고 해석했는데, 1920년판 '저자의 말'(Author's Note)에서 그는 이 점을 단호하게 부인한 것이다.

-콘래드는 자신의 상상력은 "살아 있고 고통받는 인간들의 세계의 범위를 너머로"(beyond the confines of the world of the living, suffering humanity) 진출할 만큼 신축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자기가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면 형편없이 실패했을 것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러나 곧바로 한결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의 모든 도덕적·지적 존재를 관통하는 불굴의 소신은, 우리네 감각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들은 무엇이건 다 자연에 속하며 아무리 예외적이라 해도 우리가 그 자의식을 가진 일부를 이루는 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계의 다른 모든 효과들과 본질에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진기하고 신비로운 일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들 진기하고 신비로운 것들이 우리의 감정과 지성에 작용하는 방식들 또한 정녕 불가사의해서, 인생을 마술에 홀린 상태로 파악하더라도 크게 탓할 수 없을 정도다."(*<그림자선>은 1976년에 폴란드의 영화감독 안제이 바이다에 의해 영화화된 적이 있다.)

-"그렇다, 단순히 초자연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기에는 진기함에 대한 나의 의식이 너무나 확고하다. 초자연적인 것이란 (누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결국은 제조된 품목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은 자 및 산 자와 우리의 관계가 지닌 내밀한 섬세함에 대해 무감각한 정신들이 만들어낸 인공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다정한 기억들에 대한 모독이요, 우리의 존엄을 해치는 일인 것이다."

-콘래드의 이런 다짐이 소설 속에 초자연적 또는 환상적 요소를 도입하는 일체의 시도를 비난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콘래드가 존경한 선배작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만 해도 사실주의에 뿌리를 두었으되 초자연적 요소를 끌어들인 훌륭한 소설도 여러 개 썼다. 19세기 최고의 소설가를 꼽을 때 으레 거론되는 발자끄나 디킨즈의 작품에도 초자연적 현상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콘래드를 인용하는 나의 의도 또한 작금의 팬터지 문학을 통째로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님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더구나 황석영의 오늘의 한국문학에서도 <손님>에서부터 박민규의 <핑퐁>에 이르기까지 환상이나 초자연적 사건을 활용하여 도리어 콘래드가 말하는 "살아 있고 고통받는 인간들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주는 훌륭한 소설들이 씌어지고 있는 터이다. 다만 팬터지 문학을 하건 다른 무엇을 하건 현실세계 자체의 진기함과 신비로움에 대한 콘래드의 도저한 존중심을 공유하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06.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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