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페일레스 > 기형도 - 제대병

제대병
除隊兵

기형도
奇亨度


위병소衛兵所를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본 1982년
8월 27일의 부대 진입로 무엇이 따라오며
내 낡은 군복 뒤에서 소리쳐 부르고 있었을까
부르느냐 잡으면 탄피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사계
여름을 살면서 가을을 불시착하고 때로는
하찮은 슬픔 따위로 더러운 그리움으로
거꾸로 돌아가기도 했던 헝크러진 시침時針의 사열査閱

떠나야 하리라
단호히 수입포 가득 음습한 시간의 녹 닦아내며
어차피 우리들 청춘이란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 아니던가
많은 기다림과 직립과 살아 있지 않음들 또한 땅에 묻히리라
잊혀지리라 가끔씩 낯선 시간 속에서 뒤늦게 폭발하는
불발탄不發彈의 기억에 매운 눈물 흘리며
언젠가는 생을 낙오하는 조준선照準線 위로 떠오르는
몇 소절 군가의 후렴에 눈살 찌푸리며 따라 일어설
추억들이란 간직할 것이 못 되었다.
물론 먼먼 훗날 계급장 떼어버린 더욱 각도 높은 경례의 날을
살아가다가 거리에서 문득 마주치는
군용 트럭 가득가득 실린 젊음의 중량 스쳐가며
마지못해 쓸쓸히 웃겠지만
그때까지 무엇이 살아 있어 내 젊은 날 눈시울 축축이 적셔주던
흙길의 군화 자국 위에서 솟구쳐올라
굳은 땅 그득히 흘려줄 내부의 눈물 간직할 건가

잘 있거라 돌아보면 여전히 서 있는 슬픔
또한 조그맣게 잘리며 아스라히 사거리射距離를 벗어나는
표적지標的紙처럼 멀어지거늘
이제 나는 어두운 생의 경계에 서서
밤낮으로 시간의 능선을 넘어오는 낮은 기침 소리 하나하나 생포하며
더욱 큰 공포와 마주서야 하는 초병哨兵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 있거라 내 젊은 날 언제나 가득히
그 자리 고여 있을 여름, 그 처연悽然한 호각 소리여
훈련이란 우리들 행군간의 뒤돌아보지 않는 연습의 투사透寫일진대
오,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하늘
입간판立看板을 돌아설 때 한꺼번에 총을 겨누는 사계
뒤돌아보면 쏜다. 그리하여 두 손 들고 내려오면 위병소
그 질척한 세월의 습곡濕谷 아아, 사나이로 태어나서

- 기형도 전집 편집위원회 엮음,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185-186.



  나 역시 '떠나야 하리라'. 그리하여

  '잘 있거라'.
  내가 그곳에 남겨둔 '음습한 시간'과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들이여.

  강제로 나를 불러들인 군대는
  갈 때도 강제로 등 떠밀어 돌려보내는구나. '움직이면 쏜다'가 아닌
  '뒤돌아보면 쏜다'. 그렇게 위병소를 지나오며 만나는
  '그 질척한 세월의 습곡'.

  그렇게
  '계급장 떼어버린 더욱 각도 높은 경례의 날을 살아가다가' 스쳐가는
  '군용 트럭 가득가득 실린 젊음의 중량'. 마지못해
  씁쓸하고 쓸쓸한 웃음을 날리겠지만

  '나는 어두운 생의 경계에 서서'
  '밤낮으로 시간의 능선을 넘어오는 낮은 기침 소리 하나하나 생포하며'
  '더욱 큰 공포와 마주서야 하는 초병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잘 있거라 내 젊은 날 언제나 가득히'.

  예비군중대에서 펜대 굴리던 상근예비역 주제에 꼴값하지 말라고? 허나 나는 꼴값을 한다. 하고야 만다. 나의 군생활 역시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의 연속이었기에. 그 속에서 이렇고 저런, 삶의 '어떤 단면'을 언뜻 보았기에. 허나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시를 쓴 기형도 역시 방위였기에(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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