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절판


그런 배신의 충동은 자주 일어날수록 좋다. 현실에서는 한 사람의 연인에게만 충실한 것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독서의 세계에서는 가요 순위프로그램처럼 베스트50, 베스트20, 적어도 베스트10을 뽑으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작가와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읽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 명의 독자로서 내가 꿈꾸는 작가에 대한 열망은 그렇다. 그런 이유로 사실은 폴 오스터의 책 중에 몇 권은 일부러 읽지 않고 얌전하게 모셔두었다. 자연의 법칙에 의하면 나보다 함참 많은 폴 오스터는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고 어쩌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될 경우도 있고, 따라서 언젠가는 읽어야할 그의 새 책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읽어야할 그의 책이 읽다는 사실은 숨겨둔 애인처럼 나에게 흥분을 안겨준다. -93~94쪽

오직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아마도 오직 나만을 위해서 쓰인 듯한 책도 있지 않을까. 나는 어쩌면 그런 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95쪽

어떤 사람들은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기 좋아하는데, 정말 현명해지려면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세술에 관한 책은 결론을 가르쳐 주지만 소설은 결론으로 나아가도록 생각하는 법을 몸에 베게 해준다. 스스로 생각하여 얻은 결론만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189쪽

어쨌든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어차피 죽을 운명인 것이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사랑이 죽는다. 사랑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 어둠의 세계에서 편안히 휴식하는 평화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빛의 세계를 행해 질주할 기회만 노리는 자들에게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들은 사람과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면서 그래서 그것이 더더욱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사람의 죽음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죽음과 상관없이 그들은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죽음 못지않게 이기적이다. 진심으로 나는 사랑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동정한다. -221쪽

최대의 복수는 적 없이도 행복해져서 적을 잊어버리는 것이다.-236쪽

소동파의 <마음속의 대나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와, 옛날에 글을 짓는 사람들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대. 산천의 구름과 안개, 초목의 꽃과 열매도 충만하고 울창하게 되어야 밖으로 드러나듯이, 마음속 생각이 충만하면 글은 저절로 써진다고.

--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 죄짜지 말고...-273쪽

'나는 오직 돈을 벌기위해 곡을 쓰는 음악의 고리대금업자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살려면 얼마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 이는 베토벤이다.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의 <상업문화예찬>에 의하면 T.S 엘리엇은 글쓰기를 지속하기 위해 로리드 은행에서 일했으며, 제임스 조이스는 돈벌이를 위해 영어 과외를 했고, 증권 중개인 노릇을 하며 번 돈으로 경제적으로 안락했던 폴 고갱은 이마저도 부족해 높은 그림 가격을 받으려고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선전하기도 했다. 유희가 소설을 계속해서 쓰려면 우선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소설가라는 건 정체성이지 직업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274쪽

책은 이 시대의 소비물 중 그리 비싼 축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소유하는 데는 역시 돈이 필요하다. 책을 꽂을 튼튼한 책장, 그것을 안전하게 둘 서재, 그리고 집.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르고 소유는 중독된다. -283쪽

사람이 죽으면 '21그램'의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육체의 죽음에 앞서 정신이 먼저 죽는다. 육체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떠나가는 영혼을 붙잡기 위해 그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298쪽

소설에는 철학도 있고 여행도 있고 인문학적 지식도 있고 과학도 있고 역사도 있고 우주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나는 소설이 가진 포괄성과 유연성이 아주 마음에 든다. 가능하다면 나는 소설 같은 인간이 되고 싶다. -325쪽

나한테는 이미 익숙해진 읽기와 이해의 방식이 있다. 책을 읽듯 사람을 읽는다. 그는 한 번 읽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책은 책이다. 처음 읽으면 이야기가 보이고, 두 번 읽으면 인물이 살아나고, 세 번 읽으면 배경이 그려지고, 네 번 읽으면 움직임이 읽히고, 다섯 번 읽으면 낱말 하나하나가 다르게 다가와서 세월을 두도두고 읽어야만 하는 책, 나는 그를 다시 읽게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나에게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있다.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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