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 - 호모아키비스트, 기록하는 사람들
안정희 지음 / 이야기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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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회 청년부 홈커밍데이에 다녀왔다. 청년부를 떠나 온지 벌써 20년도 넘었다. 그런데 그 시절 사람들이 모여 홈커밍데이를 한단다. 학교로 치자면 동문회 같은 거겠지. 벌써 7회째인데 나는 그 모임이 처음이었다. 연락을 받기는 약 한 달 전이었다. 그 연락을 받는 순간(나에게 연락해 준 사람 또한 그 세월쯤 될 것이다. 그동안 뭐하느라 한 번도 못 만난 것인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고,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이었다. 

나가고 싶은 마음은, 당시 청년부는 생년이 같은 사람끼리 모임을 갖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그것은 사는 지역이 같은 사람끼리 모이는 것 보다 훨씬 응집력이 좋았다. 아무래도 같은 또래라는 것이 친화력을 높이는 중요 요소였던 것 같다. 나 역시 그 시절 또래 모임을 좋아했다. 그런 또래들을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 왜 안 나가고 싶겠는가? 하지만 또 홈커밍데이란 이유로 여태까지 안 만났던 옛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고 불편할 것도 같았다. 물론 결국 옛 추억이 어색함과 불편함을 이겨 그 모임엘 다녀오긴 했지만.

막상 모임 장소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옛 추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절 청년부에 오래 몸 담을 생각이 없어 공식 모임은 1년 정도였고, 또래 모임은 그 보다는 좀 더 오래 했다. 결론은 청년부 모임을 그다지 오래하지 못했다는 얘긴데 그래서 무슨 추억이 있으랴 싶기도 하겠지만 의외로 잊고 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난 언제부턴가 어떤 한 시절 또는 내 생애 있었던 이야기를 글로써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점점 더 강하게 한다. 그래서 난 그날(청년부 홈커밍데이)를 계기로 나의 청년부 시절을 글로 써 보고 싶었다. 사람은 왜 자서전 또는 자전적 이야기를 써 보고 싶어지는 것일까?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 되기도 하지만 그 중 또 하나를 들자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인간만이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다는 것. 이런 사람을 두고 이 책의 저자 안정희는 '호모아키비스트'라고 했다. 이는 기록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아카이브(archive)'에서 추출한 말이기도 하다. 아카이브는 원래 '정부의 기록' 또는 '공문서'를 의미하는데 지금은 '기록'이나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그렇게 말을 하자면 공적인 기록인만큼 공인이 써야하므로 사견이나 주관을 배재한 기록이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개인의 기록물을 더 중히 여겨 '민간 아카이브'를 지향한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간 아카이브의  수 많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아카이브는 왜 생긴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개별적인 인간은 소멸하되 기록하는 인류는 미래를 꿈꾼다'고. 그도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인간 역시 유한한 존재이기에 이 점은 동물과 같은 것이지만, 내가 이 지상에 살다 갔다는 불멸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아카이브는 발전해 오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문자가 없었던 시절엔 동굴 같은 데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또 낙서에서도 발견이 된다. 지금도 그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와서 그곳 카페나 유명한 장소에 내가 이곳에 왔다 갔다고 뭔가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기록하는 습성은 인간의 본능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아무 것이나 다 기록할 수는 없고, 기록에도 반드시 형식은 존재한다. 저자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스토리텔링의 기본 요소와 다르지 않으며 단지 아카이브는 기억저장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공공성 또는 공유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 조건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아카이브가 될 수 있을까? 어렵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기록의 대상이요, 아카이브다. 가장 흔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게 역사일 것이다. 그것도 정치사나 사회사 같은 거시적인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미시사나 일상사 같은 것이 오히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행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여행한 곳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요즘 흔히 하는 방식이다. 먹방의 세대라고 요리도 그 대상이 될 수가 있고, 카페나 레스토랑 기행도 아카이브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독특하게도 단추 모으기나 버스 승차담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는데 그런 흔치 않은 분야에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기록하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 저마다 알게 모르게 한 가지 이상은 다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늘 책에 관한 관심이 있어왔고, 인터넷 블로그가 생기고부터는 서평을 줄 곧 써 오곤 했는데 이것도 아카이브일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보게 된 건 로렐 대처 울리히가 쓴 <산파일기>(57~p~)란 것이다. 사실 이건 울리히가 직접 쓴 책은 아니다. 마서 밸러드란 17세기에 살았던 산파가 무려 27년 동안 자신이 산파 일을 하면서 쓴 일기를 발견해 번역하고 그로인해 퓰리처상을 받고 하버드 교수까지된 사례를 기술해 놓았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할까? 그 내용도 별 것 아니라고 한다. 그냥 언제 누구의 아기를 받았다는 내용만 단조롭게 써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발견했을 뿐인데 그게 한 사람의 생을 그렇게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일기엔 굉장한 의미가 숨어 있었다. 즉 그 일기를 통해 17세기 미국 여성들의 사라진 삶을 밝혀낸 것이다. 그 별 것 아닐 것 같은 일기가 미국 건국의 역사의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보여 준 것이다. 읽다보면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 하나가 훗날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일기를 다시 써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앞에서 청년부 홈커밍데이에 참석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친김에 그 시절에 있었던 일을 글로 써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기록에는 공공성 내지는 공유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막상 공공성을 얘기하자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내가 이것을 글로 쓴다면 위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22세기나 23세기쯤 누군가에 의해 별견되어 우리나라 역사의 어느 시기의 근간이 되고, 한 사람을 영예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해서 아카이브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예를 보면 소소한 것에서부터 대의를 불태우는 내용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이러 이러한 것들이 아카이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은, 저자가 읽은 책들을 위주로 썼다는 점에서 마치 또 한 권의 서평을 보는 듯도 하다. 특히 저자는 거의 모든 분야를 아카이브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데 하다못해 소설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뭐 소설도 기록이라면 기록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역사 소설이라고 해도 소설은 픽션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해 볼 수는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물론 그 소설을 쓴 작가에겐 하나의 기록물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이 부분은 저자가 아무래도 의욕이 과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 날은 공유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유가 흔하다 못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엔 역시 디지털 기술과 SNS의 발달이 압도적인 기여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공유는 자유로워도 아카이브는 아날로그적으로 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게 진정한 아카이브의 정신이니까. 또 그만큼 이 기록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지난한 작업이어서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다. 하다가 중단하면 아니한만 못하다는 옛말이 있긴 하지만, 그 말에 일침을 가하는 말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이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말하고 싶다. 거기다 시작이 반이란 말도 덧붙이고 싶다.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마음에만 간직하지 말고 오늘부터 시작하라. 또 누가 아는가? 자신의 아직 있지도 않은 손자나 증손자가 보게될지. 나아가서 1세기나 2세기 후엔 나라를 구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만이 기록을 남기고, 기록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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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8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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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8 18: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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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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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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