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인간아 > 사람다움의 사라짐

사라짐, 사라짐, 사라진다.

어감이, 의미에 비하면, 놀랍도록 아름답다. 내 인간다움의, 사람다움의 심지는 아직도 굳건한데, 정작 그걸 태울 수 있는 지방질의 젤라틴 같은, 굳은 기름 같은 엉겨붙는 덩어리가 소진되어 남아 있지 않다. 홀로 심지만 새까맣게 다 태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사라짐, 사라짐이었으면 좋겠다.

1월 4일 동생이 100일 휴가를 나왔다. 출근 전에 얼굴을 보고 얼싸안고 근황을 정신없이 묻고 시간이 촉박해 갈비탕을 먹고 헤어졌다.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늘었다는 말에, 벌써 자신의 나이를 자조적으로 말하는 걸 어투에 담긴 미묘한 어감에,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용돈을 좀 쥐어주고, 아쉽게, 헤어졌고, 나는 담배를 태우는 동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뒤돌아보다가 출근했다.

시를 쓰고 있는 형은, 새벽 3시 경에 무덤에서 들려오는 음산하고 처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다. 늘 술에 절어 있는 목소리에는 고독과 회한과 자조가 가득하다. 누구도, 그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 아마 형에게서 이런 감정이 모두 사라진다면 형의 삶은 증발해버릴 것이고, 형의 시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형도 그걸 알지만, 자신의 시의 자궁이 지옥 같은 고향이며 악마구리 같은 가족이라는 사실에 매순간 몸서리치고 있다. 원죄이면서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거대한 축복인 운명 앞에서 형은, 오로지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초월해내야 한다. 나는, 위로라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말을 한다. 그리고 한참 형의 말을 듣다가, 겨우, 형, 건강하세요, 하고 말한다. 그리고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전화는 끊어졌다.

필리핀으로 돈 벌러 떠났던 형이 22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얼굴은 다행하게 좋아보였고, 건강도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주말을 맞아, 백석에 사는 형의 집에 모여 놀았다. 형수의 얼굴은 예전보다 더 어려졌고 와병중에도 자상하고 싱그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형은 황제의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유쾌하고 흥겹고 사치스럽게 놀다가 아쉽게도 헤어졌다.

그리고 새해 처음 들어 내 서울의 고향 같은, <숨어있는 책>과 <공씨책방>을 들렀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들렀는데 뜻밖의 대단한 책들이 눈에 보였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스코틀랜드의 여왕>은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많이 보인다. 이 반가운 책을 쓰다듬다가 사지는 않았다. 이제는 책 선물하고 싶은 욕망이 많이 사라졌다.

 

 

  흥미로운 책을 보았다. <안경의 에로티시즘>이라니.

검은 안경의 모호한 위상은 감춰진 시선이 역설적으로 주의를 끌며, 비밀은 폭로되기를 바라며, 익명은 알려지기를 요구하며, 신비는 있는 그대로 제공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검은 선글라스나 색깔 넣은 안경은 얼굴의 신비를 향해 문을 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감추는 이미 본 얼굴 앞에서 뒤로 물러서고 망설이게 한다. 그렇게 되면 안경은 수수께끼를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일종의 난해한 사물이 된다. 고대 중국의 판관들은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연수정 렌즈 뒤로 시선을 감추었다. 안경은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들을 감추게 해주고, 평정을 지키는 듯한 허상을 제공하며, 욕망의 표현을 감추고, 타는 듯한 탐욕적인 눈길을, 이글거리는 눈빛을 지워버린다. - 본문 125~126쪽에서

본문의 말처럼, 안경은, 나를 감추는 동시에 나를 드러내는 역설의 장식이며, 패션이며, 도구며, 실용품이다. 몸의 기관의 확장이며 연장인 동시에 미학과 광학으로 이루어진 연장이다. 예전에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 안경에 대한 열망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막상 안경을 쓰게 되다보니 열망은 짐짝처럼 거추장스럽게 변질되어버렸다. 욕망은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고, 저속한 탐욕으로 타락하기도 한다.

  미완의 작품을 보는 건 애잔하다. 그리고 완성이 아니면서도 더욱 읽고 싶다. 완성되지 못한 사연에 담긴 의미가 작품을 감싼다.

 

 

 

광기로 가득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역사의 현장에서 씌어진 소설이다. 각계각층의 프랑스인들을 비극적인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은, 1940년 6월의 집단 탈주를 그렸다. 하층민을 역겨워하는 부르주아들, 폭격의 공포에 휩싸인 부상자, 피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저지르는 비열한 행위들과 깨지기 쉬운 동포애를 신랄하게 묘사한다.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 이렌 네미로프스키는 전쟁과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한 시골 마을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또렷이 의식하며,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

작가 사후 60년 만에 빛을 본 이 미완성 유작은 생존 작가에게만 수상 기회를 주는 르노도상의 관례를 깨고 사망한 작가에게 수여된 첫 작품이다. 작가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될 당시 열세 살이었던 장녀 드니즈는 엄마가 사지로 끌려가기 직전 건네주었던 <프랑스 조곡> 원고가 든 가방을 들고 도피하여, 62년 후인 2004년 이 책을 출간하게 된다.

1부 '6월의 폭풍'은 1940년 6월 파리가 함락되기 직전 앞다투어 피난길에 오른 다양한 인물들의 행로를 추적함으로써 전쟁의 실상과 부조리,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맞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군상의 진면목 그려나간다. 2부 '돌체'는 한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전쟁이 파고드는 과정을 통해 전쟁이 개인들의 관계와 삶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보여준다.

부록으로 실린 '메모와 집필 계획'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성찰과, 그녀가 탐구하고 구상했던 소설 기법, 전체적인 줄거리의 윤곽이 드러나 있다. '서신 모음'에는 작가가 체포될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과 남편과 지인들이 작가를 구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나타나 있다.

  동생의 군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화장품을 주문하다가 가격이 맞지 않아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샀다. 장석원 시인의 <아나키스트>. 시가 길고도 길다. 차근차근, 은 아니고 툼벙툼벙 물고기를 함부로 쫓는 발걸음으로 읽고 있다.

 

 

 

  이난아 선생의 번역작, 쥴퓨 리반엘리의 <살모사의 눈부심>을 읽었다. 백석까지 가는 지하철 안에서 절반을 읽었고, 형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드문드문 읽었다. 하렘과 술탄과 절대 권력과 피는 언제나 사람을 흥분시키고, 욕정을 돋게 한다.

 

 

  문학과 지성사와 대산 재단이 함께 출간하고 있는 대산세계문학총서 44권과 45권이다. 중극의 작가 장아이링의 소설 <경성지련>과 <첫번째 향로>를 형에게 선물받았다. 얼마나 행복한지! 책을 선물받는 쾌락은, 뭐랄까 능욕당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버리는 황홀감 같은 감정이다.

부디 대산세계문학총서 같은 일련의 기획이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기를, 인지도를 얻기를, 많이 팔려 좀더 알찬 기획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민음사에서 나온 <19호실로 가다>를 샀다. 도리스 레싱 외 여성 작가들의 단편을 모았는데 '세계 페미니즘 단편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윌리엄 보이드의 책들이다. 내가 산 건 1996년에 나온 구판 <아프리카에서>이다. 1999년에 <굿맨 in 아프리카에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으나, 역시 이 책도 절판되었다. 표지 장정은 구판이 훨씬 예쁘다. 아름다운 아프리카 소녀의 사진이 담겨 있고, 사이즈도 깔끔하고 앙증맞다. 그리고 함께 보이길래, <푸른 오후>도 샀다. 1996년에 나온 책, 역시 절판되었다. 윌리엄 보이드의 책을 일단 사두었으니 시작할 일이 남았다.

  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의 <소들의 잠>을 샀다.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좀더 필요하다. 아울러 검색되지 않는, 내가 사랑스럽게 모으고 있는 벽호출판사의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7번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를 샀다. 바렌찐 라스뿌찐의 작품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 책! 대박인 이 책! 내가 몹시 아끼는 - 죽어버렸으니 아낀다는 말의 어감은 알맞지 않지만 -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작품 <챈스 가드너, 그곳에 가다>를 샀다. 찾던 책이 미묘하고도 운명적인 이끌림에 의해 단박에 눈에 박히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다. 실로 오랜만의 느낌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저지 코진스키의 다른 책에 이미 수록된 단편인 듯 하다. 그러나 뒤에 담긴, 저지 코진스키의 대담만 하더라도 이게 어디냐. 행복하다. 추운 바람을 맞으며 겨울을 산책하다가 바짝 마른 몸으로 감옥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보람이 있다.

 

  내 고마운 분께 선물받은 책이다. 이 놀랍도록 친근하고 벅찬 책을 받아들고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 몸이 반응하며, 수긍되는 경험을 했다. '책에 미친 인간'이 많이 있겠지만 내 스스로를 돌아볼 때 나는 책에 미친 게 맞다. 몸이 허락하는 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내 힘으로만 이사를 다니고 싶은 게 내 소망인데, -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짐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게 필수다 - 따스한 봄날이 오면 곧 이사를 갈 예정인데, 이사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짐이 바로 책이다. 어림잡아 30번 이상은 거대한 가방 두 개로 옮겨야 할 분량이다. 그러나 책을 옮기는 행위는, 짐을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내 영혼을 짊어지는 행위인 동시에 내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책임지는 행위이다. 책은, 내 책임이다. 곧 내 책임이 아니게 될 때가 올 때까지만. 귀하고 값진 책을 선물해주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 즉 도서수집가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책의 제목인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는 한마디로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미친 점잖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한 표현에서 차용했다.

5년여에 걸쳐 수집한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의 1부에서는 고대부터 1940년에 이르는 도서 수집의 역사와 수집가들의 열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2부에서는 1980년대의 도서수집 현상을 그 대표적인 인물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3부에는 인명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17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는 인명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 속에는 전설적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부터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장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컬렉션들에 얽힌 숨겨진 일화들이 가득하다. 또한 현대 미국 작가들의 초판본 발굴에 앞장섰던 카터 버든, 사양길에 접어든 이디시어 책들을 보전하기 위해 분투하는 아론 랜스기와 같은 일련의 아마추어 수집가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훔친 2만 3,600여 권의 희귀본을 가지고 '블룸버그 컬렉션'을 구축한 희대의 책 도둑 스티븐 블룸버그에 대한 내용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표정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연수,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중서 등 책에 미친 세 사람이 3년만에 번역을 마쳤다. 책의 '역자 후기'는 이 세 사람이 번역하면서 있었던 일과 느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나눈 이야기로 대신했다.

결국 집은 감옥이다. 상상만이, 공부만이, 시간 감각과 공간 감각이 사라질 정도로 집중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만이, 나를 도피하게 할 것이다. 농담처럼, 곧, 필리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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