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움직이는 건 연방대법원 판사들
블랙먼, 판사가 되다
린다 그린하우스 지음|안경환 감수|안기순 옮김
청림출판|368쪽|1만8000원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아시오?”
미국정치를 전공하는 한 학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흔히 미국은 대통령 중심제로 알고 있지만 사실 미국을 움직이는 건 연방대법원 판사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돌이켜보자. 공화당 조지 부시 후보와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박빙의 승부를 벌였다.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에 따라 백악관의 주인이 결정될 상황. 연방대법원은 “더 이상 재검표 절차를 진행하지 말라”고 판결을 내린다. 재개표 요구, 지리한 법정 공방, 국정 공백으로 불안했던 정정(政情)은 그날로 종결됐다.
민주당 고어 후보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무조건 승복한다. 만일 그가 승복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겠느냐고? 그건 미국정치를 모르는 이야기다. 혹 불만이 있을지라도 연방대법원 판결에 승복하지 않으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비(非)국민으로 간주된다.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아홉 명의 판사가 재직한다. 판사 한 자리의 임명을 둘러싸고 종종 온 나라가 들썩이는 이유는 국가의 운명이 이들 ‘아홉 명의 늙은이’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24년간 연방대법원 판사로 재직했던 해리 블랙먼(1908~1999)에 대해 쓴 전기다.
블랙먼 판사는 1999년 사망하기 직전 5000만 건 이상의 공적인 자료와 개인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탁했다. 1585개 상자에 담긴 자료는 높이가 무려 183m에 달했다. 퓰리처 상을 탄 뉴욕타임스의 연방대법원 출입 기자인 저자는 5년 후 공개된 자료를 통해 그의 일대기를 썼다.
낙태의 자유, 소수민족 우대정책, 사형과 성차별 등 미국사회를 흔든 논쟁에 대한 블랙먼 판사의 견해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단지 그의 의견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를 통해 미국사회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 행정수도 이전, 새만금 사업 등 우리도 법원(헌법재판소)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상황이 많아졌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과연 정치의 영역에서 논의한 정치의 결과를 법이 재단할 수 있는가. 법 만능이 또 다른 재앙을 부르진 않을까.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논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