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종주먹질 하는 ‘풋것과 쉰것들’


이청준 산문집‘머물고 간 자리, 우리 뒷모습’
그림 김선두|문이당|222쪽|10000원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이청준의 글은 “아직도 가슴 속에서 종주먹질을 해대는 것들”(66쪽), 혹은 그런 “몹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의 가슴 속에서 사라져 주지 않고, 끝내 작가의 흉중을 물고 늘어지는 인물들이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히려 눈덩이처럼 몸집이 커지면서 더 큰 의미로 확대되거나, 혹은 색다른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인물들이다.

이 책은 이청준이 새 천 년 이후에 쓴 단문들을 모은 것이다. “문학 주변과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느낌을 적은” 것이라고 했으나, 또한 “사람다운 냄새와 따뜻한 눈길”을 담아 보려 애썼다고 했으나, 결국은 그의 가슴 속에 종주먹을 들이댄, 밉고도 고마운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서 이청준은 동료 후배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새로 터득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생각을 쓰고 있다. 김형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오늘의 여성은 자기 성의 주체적 행사를 통해 종래의 종속적 삼각 관계 애정 구도에서 온전한 사랑의 주권을 누릴 수 있게 됐다”(16쪽)고 말한다.

정이현, 성석제, 김영하, 이만교, 이기호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작가가 끝내 시선을 드러내지 않는 탈가치 지향성 소설들이 자신과 세상 속에 감춰진 우리 삶의 어이없는 허방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20쪽)는 사실을 일깨운다.


문학과 신앙에 대한 소회도 털어놓고 있다. 그는 우선 “종교의 언어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섭리자 중심의 교조적·수직적 권력 언어”임에 반해, “문학의 언어는 인간성과 인간 정신의 창조성에 바탕한 자율적·수평적 해방 언어”라고 전제한다.

이청준은 “문학에 나름대로의 삶을 기대어 온 내가 새롭게 어떤 신앙을 맞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더 이상 문학의 길을 버텨 내지 못하고 버리는 격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 동료 문인들이 입교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 또한 “절대적인 섭리에 의지해 순응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청준은 풍족하고 잘난 것들보다, 결핍된 것들, 못난 것들이 인간의 삶을 더욱 존엄하게 할 것이란 이야기를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증언한다. 평생 한쪽 다리의 장애를 안고 사셨던 20여 년 손위의 누이 한 분을 통해, 그리고 한쪽 팔이 없으셨던 중학교 시절의 영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통해, 그분들이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할 것인데), 얼마나 자연스럽게 사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산문집은 네 장으로 엮어져 있다. 문학 작품을 둘러싼 현장 비평적 성격의 글, 우리 삶의 의미과 가치를 되돌아보는 글,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세태를 꼬집은 시사적인 글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그 중심을 흐르는 생각은, “소설이란 작가가 지난날의 제 삶을 한 번 더 살아내는 일”이란 전제하에,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은 비워내야 더 큰 이룸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청준의 산문은 덤비지 말고 읽어야 제 맛이 우러난다. 달려들면 도망가는, 숨기는 글이기 때문이다. 빙긋 웃게 만드는, ‘문학 9단’의 품격이 단번에는 잘 안 보인다. 점잔찮은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고전주의자의 연륜이 풋것에서 쉰것까지, 그리고 향내에서 비린내와 구린내까지 모두를 품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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