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인생은 폼생폼사 ^^… 갈 데까지 가 보자고요
서울에서 남쪽으로 2시간쯤 차를 몰아 시인 고은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덜은 불운과 퇴폐가 없어.” 파리에 살고 있는 알바니아 출신 소설가 이스마엘 카다레를 찾아갔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인류 최대 발명품은 지옥(地獄)입니다.”
헉, 이게 뭔 말입니까.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폼生폼死 같은 암호나 말장난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뭔가를 찐하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을 것입니다. 예술적 인생을 한곳에 몰입할 때 그 극한까지 가야 한다는 충고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불운·퇴폐·지옥, 이 세 가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갈 데까지 가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길을 떠났다면 벼랑 끝을 봐야 뛰어내리든 돌아오든 하지요.
라이센스 패션 잡지의 기자로 일하는 김경의 에세이집 ‘뷰티풀 몬스터’(생각의나무)를 읽으면서 그런 말들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퇴폐’스럽고, 가장 ‘불운’할 것만 같은 이 젊은 여인이 ‘지옥’ 순례기를 씁니다. 이 책은 1년 전에 나왔는데요, “밤마다 술집을 전전하며 사다리 타기를 하고 폭음을 한 암컷 괴물”(5쪽)의 참회록+묵시록 같은 글쓰기가 압권입니다.
1미터50에서 1미터80 정도의 눈높이를 가지고 이 도시를 바라볼 때와, 아스팔트에 난짝 드러누워 바라볼 때는 전혀 딴판으로 세상이 보입니다. 사랑을 버리고, 빈 방에 돌아와 홀로 누울 때 “완벽한 자기방어와 주변관계의 단절이 최고의 생존술이며 교양이라는 것”(16쪽)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도시는 폐허처럼 쓸쓸합니다.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개한 이 책을 다시 한번 추켜 드는 이유는요, ‘아예 침대 위로 떠나는 2박3일 관능 여행’같은 버석버석한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간단한 식료품만 싸들고 외딴 산장이나 펜션에 숨어들어도 좋겠다’고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충분히 배우고 익혔지만 이성이나 교양만으로 제 몸을 지배할 수 없는 야성을 간직하고 있는 남자들이 나는 좋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글의 타잔이 초콜릿 맛에 타락하고 시들어 갈 때 아직도 싱싱하게 원시적 호흡을 유지하고 있는 ‘암컷 괴물’의 묘사가 너무 근사하지 않습니까. 잘 숙성될수록 거친 맛이 나는 풀향기 같은 포도주를 마시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영임의 소설 ‘레드 와인’(틈북스)을 함께 권해 드립니다. 손안에 꽉 끼면서 103쪽밖에 안 되는 이 책은, 김경이 대도시 지표 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땅밑 지하철 기관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투신자살 사고를 겪은 기관사의 아내가 남편의 가슴에 화인처럼 찍힌 상처를 조심조심 다독여 봅니다. 끝내 그 남편은 눈이 펑펑 내리는 선로 위를 걷다가 마주 오던 열차에 뛰어들어 자신의 생을 마감합니다. 지하철 자살 방지를 위해 선정된 곡은 일흔여섯 가지나 된다는데, 제발 그런 남편과는 함부로 붉은 포도주를 마실 일이 아닙니다.
근데요, 삶이란 폼입니다. 폼이 좋아야 멋지거든요. 매트 위 기계체조든, 바둑이든, 스턴트든, 요가든 폼이 좋아야 착지(着地)가 좋습니다. 불운, 퇴폐, 지옥이 괜한 헛폼이 아닙니다.
방금 선배 한 분이 ‘남친 없이 뜨거워지는 방법’이라는 광고 카피를 북 찢어 책상 위에 놓고 갑니다. 늦가을 등산 파커 광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