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생'만한 드라마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왜 이리도 재밌는지, 왜 이리도 공감이 가는지.

우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드라마에 끌리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드라마를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드라마를 통해 계약직 사원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는지도 알게 되고, 말도 안 되는 또는 저건 좀 너무하지 않아 하는 부조리를 현실감있게 묘사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엔 계약직이라는 것도 뭔가 사람을 구제해 주기위한 장치로 만들어진 제도였을 것이다. 실업자 또는 한번도 직업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에겐 얼마나 희망이 됐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차별의 문제를 불러왔다. 드라마가 저 정도라면 실제는 더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요즘엔 이 차별의 문제 때문에 계약직을 없앤 회사도 있다고 하던데 그게 좋아할만한 일인지 그도 의심스럽다. 계약직이 없어졌다고 각 기업체의 머릿수 제한이 완화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럽더라도 계약직이 더 난 건 아닐까? 그래도 이력서 쓸 때 한 줄은 더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아, 사람 구실하며 사는 게 왜 그리도 어려운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대사도 어쩌면 그리도 뭉클한지. 어젠 장그래에게 묘한 열등감을 느낀 장백기가 장그래를 처음으로 이해하는 순간이 다다르면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장그래 씨와 나의 시간이 다르지만 아무튼 내일 봅시다."하는데 이 멘트가 뭔가 있어 보인다. 

 

우린 나 보다 잘 난 사람에게는 열등감 같은 건 잘 느끼지 않는다. 주로 나 보다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나 보다 인정을 받으면 열등감을 감추는 대신 뭔가 알지 못하는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장백기를 욕하다가도 나도 저런 때가 있지 오히려 이해가 된다. 솔직히 장그래는 흠잡을 구석이 없다.

 

자신의 모자람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무조건 노력하는 사람한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그저 안쓰럽고, 잘 되기를 바라며,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지.

오리려 욕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다. 어제 같은 경우 장백기, 장그래와 함께 인턴으로 일하다 잘린 거 누구더라...? 뺀질이 말이다. 자기가 그 회사에서 잘린 것이 장그래 때문이라고 생맥주집에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며 씩씩거리던 그놈 말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스펙을 쌓기위해 장그래 못지 않은 노력을 했을 거란 건 인정하겠다. 그를 보며 세상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상실감이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장그래에게 뒤집어 씌운다는 게 좀 그렇긴 하다. 그래봐야 장그래는 계약직이다. 있는 사람으로 없는 사람의 그것까지 배 아파한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는가?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도 그러지 않는가?(나 황희정승 다 됐다.ㅋ)

 

안영이나 장그래를 보며 의욕만 너무 앞서도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좋은 사업 아이템인데도 회사는 좋다는데 직속 상관한테는 협박반, 까이는 것 반 접어야할 상황이다. 아무리 장그래, 안영이라도 나중에 5년차되고 10년차 되면 적당주의자 되고 후배 가르친다면서 그들의 선배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런 선례가 없다며 계약직에게 사업 지원을 맡기지 못하는 건 또 얼마나 장그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가.  드라마는 한 예를 보여주는 거지만 그런 회사가 한 둘이 아니라면 우리나라 산업이 구조적인 문제를 나을 것이며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젊은애들 기 살려주면 버릇없어진다는 건 도대체 어느 발상인가? 회삿밥 먹고 늙어버린 노땅들이 그렇게 젊은 사람 발목이나 잡아서 나중에 더 나이 먹어 얻을 건 뭐란 말인가. 그래서 젊은 사람이 나이 먹은 사람 싫어한다는 거란 말 밖에 더 듣겠는가? 특히 마 부장은 정말... 

 

그런데 나 개인적으론 감정이입 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한석률이다. 물론 외모는 내가 결코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는 악하지는 않은데 '누구든 당한만큼 갚아 준다주의'의 사람이다. 그게 참 나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드라마에 나온 사람 보고 그렇게 느끼기는 또 이번이 처음은 아닐까?ㅋ). 누구는 그런 성격을 두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정의의 사도쯤으로 말하기도 하겠지만, 그건 그저 다듬어져야 할 인격일뿐이다. 젊어서 그럴 수도 있고, 자기 영역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인정을 받아야 일하는 타입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 하기란 쉽지 않다. 겉으론 아무 문제없이 사람도 잘 사귀고 차별없는 좋은 성격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 모 협회에서 무임으로 일했던 나의 짧은 간사 시절이 생각난다. 나를 그 협회로 인도했던 분은 처음엔 봉사 정신으로 하는 거라며 쉽게 얘기를 했지만, 달이 나만 쫓아 온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다 나 같거나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그분도 그랬겠지. 나 역시 나의 능력을 잘 모르고 그의 손을 덥썩 잡은 것도 있고. 훗날 협회가 정식 인증을 받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을 때 난 정식 간사에서 제외 됐다. 물론 그때 받은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난 역시 장그래가 아니다. 될 수도 없다. 나 자신을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간사 제의는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덕분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어서 꼭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그땐 그분이 참 야속했는데 지금은 감사할 수 있다. 뭐 덕분에 나의 폼나지 않는 이력에 한 줄은 넣게 되지 않았는가? 전 00협회 간사라고. ㅋ 

역시 분수를 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석률이 나의 페르소나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벌써 1년 넘게 이 인간만큼은 밟아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왜 그런지 생각이 복잡하다. 리더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어떤 망상에 사로잡혀 그것이 믿음인 양 휘젓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목소리 높여 싸울 수는 없고, 그래서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요즘 읽기 시작한 책이다. 요즘 미생이 인기 있는 것만큼 그것을 키워드로 삼고 책소개를 해 읽고 있는데, 미생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 역시 싸우게 되면 목소리부터 커지는 족속이라 그게 싸움의 가장 안 좋은 자세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아도 맨 첫장에 "말로써 이기려 하지 마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벌써 그 사람을 말로써 이겨 버렸으니. 

"말로써 흥하기를 바라지 말고, 말로써 망할 것을 두려워 하게.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분노를 살 수도 있으니 도움이 될 게 없지."(16p)    

그렇다. 모래를 꽉 쥐면 손아귀를 빠져 나간다고 난 말로써 이겼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과 더 멀어졌다. 물론 그 사람은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인간류긴 하지만.

 

그래서 싸움의 고수가 돼 보고자 모처럼 읽는데 이런 책류는 또 하도 오랜만에 읽는 것이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로버트 그린의 <권력을 경영하는 48법칙>이던가 하는 책을 읽었는데 위의 책과 비슷한 맥락의 책인데 역사적 사건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어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내가 권력에 엄청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착각하리만큼.

 

그런데 나는 그 보단 역사 이야기가 재밌었던 것이다. 위의 책도 역사적 인물과 그 행적을 다루기는 했지 저자가 중국인인만큼 내가 중국 역사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로버트 그린의 책만큼 재미있을런지 잘 모르겠다. 

 

그 보단 난 미생을 보고 있으려니 오래 전 읽다가 조용히 모셔둔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속이고 짓밟는 인간처럼 더럽고 치사한 인간류가 없지만 그런 인간한테 당하고 씩씩거리는 건 또 얼마나 초라한가. 그러지 않거나 덜 그러기 위해 읽어줘야 할 것 같다.

 

이제 미생도 종반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거 끝나면 꽤 허전할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요즘 막장이 아니면 드라마가 아닌 것 같은 세상에서 모처럼 건강하고 위로를 주는 드라마가 있어 좋았다. 제2, 제3의 미생 같은 드라마가 나와 줬으면 좋겠고, 우리의 장그래가 계약직 사원이 됐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줬으면 좋겠다. 그런 뻔한 결말은 제작진이 허락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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