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C 미친 바보들] <2> 좋아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내 책, 내 책"… 불난 집 뛰어들다 질식사
칼 수집… 매일 한 자루씩 바꿔차…
돌에 미친 사람은 호를 석치(石癡)로상주가 입던 상복·두건 모으기도
"벽(癖)이 없는 인간과 사귀지 말라" 비정상적 몰두·집착이 자랑거리
정민·한양대 국문과교수·‘미쳐야 미친다’ 저자
 


▲ 돌만 보면 벼루로 만들어 석치 정철조가 깎은 벼루를 무호 이한복이 그렸다. 벼루 위쪽에 이용휴의“돌에서 무엇을 취할까? 치(癡)와 벽(癖)이 으뜸이다”란 글이 새겨져 있다.
참판을 지낸 이의준(李義駿·1738~1798)은 《옥해(玉海)》란 책에 벽이 있었다. 《옥해》는 송나라 때 왕응린(王應麟)이 펴낸 200 권에 달하는 총서다. 21문(門) 240여 항목에 걸쳐 천문 지리에서 길상선사(吉祥善事)에 이르기까지 온갖 내용을 모은 책이었다. 그는 평생 이 책만 아껴, 단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밥 먹을 때도 변소 갈 때도 반드시 이 책만은 지니고 갔다. 밖에 나들이 갈 때도 그랬다. 젊어서도 그랬고 늙어서도 그랬다.

그가 말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하루는 밤에 관아에 불이 났다. 잠이 덜 깬 채 뛰쳐나온 그는 뒤늦게야 《옥해》전질을 방에 두고 나왔음을 알았다. 큰 소리로 “내 옥해! 내 옥해!”하고 외치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연기 속에 뛰어들었다가 질식해서 죽었다.

홍한주(洪翰周)는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벽(癖)을 ‘남들이 즐기지 않는 것을 몹시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한 후 이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 일을 두고 “벽(癖)은 제 몸이 죽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게 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판서 윤양래(尹陽來, 1673-1751)의 상복벽(喪服癖)을 소개했다.


▲ 꽃 그림만 그린다 돌에 벽(癖)이 있었던 신위의 아들 신명연(申命衍)은 꽃 그림에 벽이 있었다. 그가 그린 옥잠화.
윤양래는 상주가 입던 상복과 두건을 모으는 벽이 있었다. 친척이나 벗이 탈상(脫喪)하는 날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날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상주가 입던 상복을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 이렇게 모은 상복과 두건이 100벌이 넘었다. 비가 와서 손님이 뜸한 날만 되면 그간 모아둔 상복을 방과 마루에 잔뜩 늘어놓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없이 즐거워했다. 벽치고는 해괴한 벽이다.

중국에 사신 갔던 신위(申緯·1769~1847)는 돌아오는 수레에 기석(奇石)만 싣고 왔다. 표면에 이끼가 낀 돌, 구멍이 숭숭 뚫린 돌 등을 수레에 가득 실어 수레의 주인이 돌인지 사람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 희한한 광경을 그는 동행한 화가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자신은 시로 지어 노래했다. 그는 돌에 벽이 있어 가는 곳마다 돌 줍느라 바빴다. 심지어 근처 나무꾼까지 이상한 돌만 보면 그에게 가져다 줄 정도였다.

이유신(李維新)이란 화가가 있었다. 그도 괴석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가 정초에 새배 드리러 신위의 집을 찾아갔다가 책상 위에 놓인 괴석 하나를 보았다. 절하는 것도 잊은 채 괴석을 만지작거리며 차마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하도 좋아하니까 신위가 종을 시켜 그 돌을 가져다주게 했다. 그는 환호작약하여 두 손으로 직접 그 돌을 받쳐 들고 나가며 천하를 얻은 듯이 기뻐했다. 그의 호는 석당(石堂)이었다.

김억(金檍)은 영조 때 음악가다. 중국에서 들여온 양금(洋琴)을 처음으로 제대로 연주했던 사람이다. 그는 칼 수집에 벽이 있었다. 칼마다 진주와 자개를 박아 방안에 걸어 놓고, 날마다 한 자루씩 바꿔 찼다. 1년 내내 바꿔 차도 끝이 없었다는 전언이다.

정철조(鄭喆祚)는 벼루에 미쳤던 사람이다. 호도 아예 돌에 미친 바보라 해서 석치(石癡)라고 지었다. 주머니에 칼을 들고 다니면서, 돌만 보면 즉석에서 벼루를 깎았다. 그러고는 벗들에게 그저 나눠주었다. 그는 엄연한 벼슬아치였다. 벼루를 깎아 돈을 벌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기쁘고 즐거워서 했다. 당시 사대부로 그가 깎은 벼루를 하나쯤 갖지 못하면 수치로 알 정도였다.

김석손은 매화시에 벽이 있었다. 집에 수십 그루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시에 능하다는 사람이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매화시를 받았다. 그렇게 모은 매화시 두루마리가 소 허리통보다 굵었다. 사람들은 그를 매화시전(梅花詩顚), 즉 매화시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18세기에는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몰두와 집착을 그들 스스로는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벽이 없는 인간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고,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벽은 확실히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코드였다.

화가 김덕형(金德亨)은 꽃 그림에 미쳤다. 그는 1년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꽃밭에서 살았다.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과 잎새의 모습을 하나하나 사생하여 세상에 단 한 권뿐인 《백화보(百花譜)》란 꽃 그림책을 펴냈다. 그가 꽃밭에 나가 있을 때는 손님이 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비웃었다.


박제가와 유득공이 이 미친놈을 위해 서문을 써주었다. 박제가는 이렇게 썼다.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벽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이 책을 보고 경계로 삼을진저.” 벽도 없이 무언가에 미칠 줄도 모르면서, 나는 저런 멍청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책을 보고 부끄러운 줄을 좀 알라고 일갈한 것이다. 그는 문화의 위대한 성과가 언제나 이런 미치광이들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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