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소굴 된 문명도시가 더 야만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잭 웨더포드 지음 | 권루시안 옮김l이론과실천
루쉰(魯迅)은 말했다. “문명이 꽃이라면 야만은 꽃봉오리고, 문명이 열매라면 야만은 꽃이다.” ‘야만’과 ‘문명’이란 선험적으로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후자가 전자의 다음 단계였으며 그 척도는 그때마다 상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이 책은 말한다. 영어에서 ‘문명(civilization)’이란 말은 ‘도시(city)’에서 나왔고 ‘야만(savage)’은 ‘숲’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과연 지금, 그 ‘문명의 상징’이라는 도시는 어떻게 돼 버렸나?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범죄 조직과 포주와 마약상과 가출청소년들이 판을 치는 곳이라고 저자는 탄식한다. “사하라의 투아레그족 전사들과 이집트의 이슬람 교도 투사들은 워싱턴의 섹스산업 종사자들에 비하면 평화로운 족속이었다.” 문명은, 스스로 수천 년 동안 두려워하며 타자에게 투사(投射)시켰던 바로 그 ‘야만’을 스스로 몸속에서 길렀던 셈일까.
저자는 얼마 전 국내에서 출간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쓴 미국 매칼러스터대 인류학과 교수다. 그런 학자로서의 전문성이 인류와 세계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담담하면서도 깊은 향기가 풍기는 유려한 문체와 만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 호주 앨리스스프링스에 남아있는 수렵·채집 생활과 알래스카 세인트폴 섬의 물개 사냥 모습, 그 다음 장은 농경이 시작되면서 정착의 고통을 동시에 맛보게 되는 볼리비아 포코나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이것은 곧 ‘야만’으로 알려졌던 모습의 이면을 거슬러 올라가 ‘문명’의 계단을 하나씩 밟아 가는 체험이 된다.
수렵과 채집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생존방식이었고, 정착생활은 결코 그보다 우월하지만도 않았다. ‘문명’과 ‘야만’은 역사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면서 협력하고 교역했으며 통혼했다. 그러나 도시의 발달은 부족 간의 교류를 침식했고, 상업과 통신의 발달은 유럽 문명이 ‘야만적인’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식민지 시대 이후 ‘문명’은 ‘야만’을 폭압적으로 제압하면서도 한편으론 자기들 멋대로 ‘낭만’을 찾음으로써 스스로를 투영하는 도구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기존의 ‘야만’은 보호구역 울타리에 갇혀 있고, 진정한 ‘야만’은 ‘문명’ 자신의 한가운데에 도사리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문명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진화해 왔던 지난 1만년의 세월이 파멸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경고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문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존엄과 운명을 지킬 권리를 존중하는 것으로 첫걸음을 내딛자”는 저자의 말은 서구 중심주의의 오만을 벗어나 ‘문명’과 ‘야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 미국 뉴욕시 상공 헬리콥터에서 병사가 근무를 서는 모습. | |

▲ 필리핀 팔라완섬의 동굴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