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나의 따뜻한 오아시스
소지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0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도둑이 들까봐 전전긍긍하는 날들이 있었다. 아파트 게시판에는 언제나 도둑주의보가 꽂혀있으며, 기존의 새시를 뜯어내고 철창으로 단단히 봉쇄한 집들이 많다. 아파트 1층 베란다와 창문에는 어김없이 철의 장막이 흉물처럼 버티고 있어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그 안에 사는,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어두운 낯빛을 상상한다. 돈만 노리는 도둑은 그래도 좀 괜찮은걸까. 언제 나타나 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공포와 불안의 상징으로서의 도둑을 견제하는 방법이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만든 열쇠를 인간이 열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허를 찌르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은 전무후무.

그가 문화부장관이 되기 전부터, 영화감독이 되기 전부터 나는 은사님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소설 잘 쓰는 이창동' 으로 시작되는 은사님의 이야기 끝에 그가 언젠가는 영화를 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도 딸려나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감동 받은 사람들이여, 소설도 읽어보시기를. 군데군데 그의 소설적 장치가 곧 그를 영화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이끌고 있었음을, 연극적이고 영화적이나 문학적인 면면이 돋보이는 수작을 마음에 품어보시기를.

흥미와 페이소스, 또한 작가적 소견을 발휘하며 상징과 비유를 적절히 구사하는 소설들은 재밌게 읽힌다. 쉽지만 결코 쉽게 넘어갈 수 만은 없는 사회비판의식도 잘 버무려져 있다. 그는 세상과 소통하는 자신의 방법, 글을 통해 무조건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때로는 의뭉스럽고 때로는 어눌해 보인다. 등단작 <전리> 의 주제와 메시지는 아주 강하지만 이후부터 그가 능수능란한 소통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소시민의 기지를 발휘한다.

가장 재미나게 읽은 작품들은 이러하다.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할머니가 소변을 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의 할머니는 이기적이고 위악적인 인물이나 할머니의 가슴 한 켠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 짠순이 아내와 피서를 떠난 남편. 아내는 바가지를 씌우는 한철 장삿꾼에게 생돈을 내지 않고, 수영복 차림으로 논두렁 밭두렁을 걸어 민박집으로 향한다. 아내의 몸은 섹시하지도 않을 뿐더러 창피함도 없다. 그녀가 내집 마련을 위해 아끼는 돈, 그래서 아이도 미루게 만드는 세상의 돈은 아내의 욕망을 꺾는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인간이기에 해소가 필요하다. 아내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정체불명의 춤을 춘다.  그저 몸을 거세게 흔들며 무아지경에 빠지는 한 여자의 몸짓을 <춤> 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망설여 질 때,  한 개인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검은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 어떤 상징이니 의미를 미뤄두고라도 <춤>의 아내가 욕망의 향유지인 피서지에서 벌이는 알뜰한 행태, 그것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고 수긍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자전소설로 추측되는 <불과 먼지>를 읽을 때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겨우 세살 바기 아이가 아빠에게 줄 꽃을 사들고 오는 길에 트럭에 치였다.  그 후 1년이 지난 아비는 아이의 뼛가루를 뿌린 뚝섬에 간다. 그에게 이런 아픔이 있었다는 걸 얼핏 들은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소설.

나는 가만 있는데 어디선가 툭툭 치고 달아난다. 나는 조용히 그저 내 생활을 꾸리고 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 호화 저택을 지킬 겸 해서 전세살이를 하는 <빈집>의 부부도 언제 닥칠지 모를 도둑의 침입에 공포를 느낀다. 원칙대로 살고 가진 것 만큼만 소유하며 살아가려는 상수는 본사 부장과 용팔의 담합에 소용물이 된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가 공모하는 어떤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공모는 이뤄진다. 자본주의적 인간형으로 변하는 용팔의 변신은 무죄인가?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과거만 기억하고 현재는 모르는 노인의 기억력처럼 현재에 적응하는 속도를 때에 따라 조절하는 능력이 이 땅에서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이념이 휩쓸고 간 자리를 메운 도시화, 산업화. 무르익은 그 세상에서 우리가 벌일 수 있는 굿판은 휴유증처럼 병폐처럼 비틀거리는 것. 왜 우리가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지 이유도 모른채 앓는다. 어디에 누워 평화롭게 안식을 할 수 있으려나...에고에고...일체아금개참회.

줄다리기를 하는 그 중간 지점에 이창동은 서있다. 그는 임철우 처럼 직선으로 가지 않고 윤흥길처럼 에둘러 가지 않는다. 그가 그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건 소시민적 삶에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인물들은 패배도 승리도 아닌 지금 그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주어진 세상에 길들여지는<슈퍼스타를 위하여>의 김노인 같은 순박한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저지른 죄가 아닌데도 아비에게 씌어진 굴레 때문에 나의 꿈과 희망을 접어버린 <소지>의 성국,  오래 살라고 지어준 이름값도 못한 <전리>의 장수는 누구의 품에 안겨 토로하여야 하는가... 개인의 일상에만 천착한 소설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한우물을 파기전 우선 그 땅을 좀 살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리. 호사스러운 시간을 독식하는 그들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 이창동이 지향하는 오아시스에서 박하사탕을 오물거리며 초록 물고기를 감상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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