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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 문제로 황급히 빠리로 떠날 때
내 여행가방 세 개에는 마흔 권 남짓의 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책이 김치와 고추장, 멸치 등의 단골 품목을 단번에 밀어내게 된 것은
당분간 한국식 식단을 포기하는 있더라도
아이들의 독서 습관부터 서둘러 챙겨야 겠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집안에 그런 전례가 없는데
큰 아이가 그곳 학교에 빨리 적응하는 바람에
다른 친구들보다 한 학기 빨리,
오는 9월이면 고등학교 진학을 하게 됐다.
대개 해외유학을 가면 언어나 현지 적응문제 때문에
반년에서 일년 가량 늦춰지는게 보통인데
주위에서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큰 고비를 넘기게 됐다.
그러던 어느날 빠리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고교진학 상담을 하는데 담임선생님이
구태여 경쟁률이 높은, 이른바 명문학교에 갈 게 아니라
일반 고교로 가라고 강력히 권유하더란 것이다.
말씀인 즉은, 댁의 아이가 영어, 수학, 과학, 스페인어 등은 월등하지만
아직 불어와 역사, 지리, 철학 등에선 중간보다 약간 높은 정도라서
중학교 땐 제법 잘한다는 얘길 듣고 있어도
그런 아이들만 오는 세칭 명문고에 가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언어에서 밀리면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될 것이고
정서상 좋지 않으니 굳이 그런 곳에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듣고 우선 담임선생님에게 감사했다.
얼굴 한번 뵌 적 없지만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동양, 특히 한국의)부모들이 혹시 가질 수 있는 욕심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는 그 분의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서울이나 빠리의 모든 어른들은 아연실색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며 나에게 속히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독촉했다.
아이들 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많으신 모친은
열 일 제쳐두고 빨리 가서 상황정리를 하라고 다그치셨다.
어머니는 큰 아들인 내가 고교진학과정에서 중대한 판단착오 때문에
무진장 고생했던 것이 모두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대를 물려 나타날까봐 더 예민하게 신경을 쓰시는 듯 했다.
도착 첫날 저녁 큰 아이와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아비가 왜 여기 왔는지 설명을 하고
그것이 앞으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내 경험으로 예를 들어 자세히 말해주었다.
설사 한국에 있었더라도 나는 절대 외고나 특목고에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명문고에 꼭 가야한다는 부담은 손톱만큼도 가질 필요 없다라고
거듭 전제했다.
아이는 명문고에 가면 무엇이 좋으냐고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열심히 할 때
뛰어난 친구들과 선생님이 곁에 있다면 훨씬 재미있을게다.
경쟁을 통해 일취월장한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게고,
항상 새로운 목표들이 너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물론 네가 도전하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그 경쟁이 힘겹고 보람을 못느낀다면
지금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아이는 도전해서 실패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가끔은 노력하지 않아도 재수좋게 성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전하는 자만이 느끼는 행복이 있다.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그 전에는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많은 새로운 것들을 갖게 된다.
네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고, 느끼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야 하듯이,
도전해야만 너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설사 그 과정에서 실패한다 해도 이미 변화된 네 자신을 되돌릴 수는 없을게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의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이는 도전해보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내가 물었다. 지금 네게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냐?
아직 언어문제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에 있지 못하다고 했다.
어떻게 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표현력>만 더 키우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작문과 토론을 잘하면 스스로 만족할 것 같다고 했다.
<표현력>은 명확한 논리전개와 적절한 어휘구사가 핵심인데
그걸 키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 생각을 물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데...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할 지 모르겠어요.>
아뿔싸.
아이가 어렸을 때 신경을 못 썼더니 책 읽는 습관이 붙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늦게까지 교과서와 문제집을 열심히 뒤적이는 걸로 봐서는
성적엔 무척 신경쓰는 눈치인데,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은 항상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니
공부말고 독서는 도통 안하는게 분명했다.
그날 표현력을 보강하는 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아이는
어디서 논술문제집 같은 것을 사들고와 열심히 풀고 있었다.
역사, 지리공부도 문제집을 열심히 보면 성적이 오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번에 꾸려간 책보따리를 풀어놓고 한동안 뒤적거렸다.
서점에서 한나절을 골라 나름대로 좋은 책만 골랐다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다 싶었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반성했다.
아이에게 무슨 책을 읽힐 것인가?
고전이 정답이었다.
아이들에게 고전을 읽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저 책읽는 재미를 붙이는데만 골몰한 나머지 반짝하는 책들만 사들고 왔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곰곰히 짚어보니
소싯적에 고전을 제대로 읽어본 경험이 없었던 게다.
주마간산으로 훑어보고 별 재미없네 휙 집어던지기만 했지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시대정신, 상황의 전형성, 뛰어난 표현 등을 잘근잘근
씹어서 그 맛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대표로 나가서 생뚱맞은 시험을 보고 메달을 받았던
시월 유신 식(?)<고전읽기 경연대회>의 텍스트가 고작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재에 천여권의 책이 있어도 고전은 가물에 콩나듯 듬성듬성 눈에 띨 뿐이구나.
지금 나는 60권의 고전 리스트를 뽑아놓고
목하 뒤늦은 고전읽기 캠페인을 시작할 참이다.
벽장을 뒤져서 찾아낸 어린이 세계명작문고에 그 도서목록 중 절반가량이 포함돼있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뽑아서 쌓아놓았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어보니 어린이책이지만 제법 재미있다.
공연히 두꺼운 책 사다가 졸면서 침묻히느니 맛보기용으론 그만이다.
유감스러운 말씀 한마디 덧붙인다.
얼마 전에 서울대연대고대 교수님들께서 <대학생이 꼭 읽어야할 고전 100선>을 발표했던데
만약 내가 그 작업에 참여한 교수라면 백 권의 소중한 책에 대해
사람들이 야 한번 읽어봐야겠다 결심하게끔 맛보기 글이라도 묶어서 내놓았을 것 같다.
인터넷 서점들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사실은
세간의 베스트셀러엔 깨알처럼 소개문이 붙어있는데 반해
정작 고전에 가까울 수록 이렇다할 안내문 한쪽 변변히 없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님들께서
이 시대 이 사회의 선각이요, 지식인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좋은 책 골라주고, 그 책 꼭 읽으라며 다정하게 이끌어주는
서비스 정도는 해줘야 하는게 아닌지.
하기야 서울대생들한테 설문조사해봤더니 그 백권중에서
평균으로 읽은 책이 단 두 권이었다나.
더 한심한 사실은
서울대 도서관 대출도서 1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망>이요,
2위가 김모라는 중국 소설가가 쓴 무협지였다니
유구무언이올시다.
출처:와이즈맨클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