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문학 전기/ 김홍근 지음/ 솔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입력 : 2005.02.04 17:01 04'


 

문학의 테마는 단 두 개다. 하나는 한 인간과 다른 인간과의 관계다. 다른 하나는 한 인간이 우주와 자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후자다.

이 책의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존재의 뿌리가 뽑혀나가 빈탕한 데를 떠도는 것 같은 놀라움! 눈앞의 평범한 광경, 그 속의 사물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며 그려내는 판타지! 보르헤스를 읽다보면 자주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다. 존재론적인 당혹감과 형이상학적인 공포! 얼핏 뒷걸음치게 만들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게 되는 매력적인 문자의 미로….’

독자보다 저자가 먼저 혼미해져 말부터 젖어드는 책은 함부로 믿지 말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보르헤스의 숨결을 가깝게 느끼면서, 독자는 덩달아 혼미해진다. 20세기의 숱한 대가들이 앞다투어 정신적이고도 예술적인 스승으로 모셨다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1986)를 한국인 저자가 이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낸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미셸 푸코는 “보르헤스의 글은 지금까지 간직해온 내 사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말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의 대가가 인류에게 장차 1000년을 먹고 살 양식을 남기고 갔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새 천 년의 이미지는 바로 월드 와이드 웹이다. 조이스는 그것을 언어로 구축하고, 보르헤스는 아이디어로 디자인하였다.”

이 책의 구성은 스페인 마드리드대 문학박사 출신인 저자가 2001~2004까지 한 문학 월간지에 연재했던 글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저자는 여러 책을 인용하면서 줄거리를 만들었지만 미국 예일대학의 로드리게스 모네갈 교수가 쓴 보르헤스 전기를 뼈대로 삼았다고 밝혔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 책은 보르헤스가 위대한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그가 밟은 문학수업, 그의 생업, 그의 가족, 그의 열정과 변신, 그의 기록들을 뒤쫓고 있다. 보르헤스를 그려가는 원근법과 구도는 그의 생애를 꿰뚫는 원대함을 보일 때도 있고, 미세한 디테일을 발굴할 때도 있다. 보르헤스는 어떤 사람이며, 그는 왜 탱고에 빠져들었는가. 그의 실명(失明)은 유전인가. 그가 우정을 나눈 사람은 누구이며, 서로는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삶에는 균열이 있다. 때때로 그 갈라진 틈 사이로, 놀랍게도, 선홍빛 피가 스며 나온다.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가는 인생이지만, 삶에는 묘한 구석이 있는 법. 예컨대, 꿈을 꾸고, 가슴 설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바람결에서 태곳적 냄새를 맡기도 하고, 영혼을 마비시키는 그림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문득 달려오는 멜로디 한 소절로 마음속에 홍수가 일어나기도 하고, 그리고 당혹스러운 보르헤스의 단편과 만나기도 한다.’

참고로 원래는 시인이었던 보르헤스는 삼십대 말에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열려 있던 창문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여 여러 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났는데, 그 직후 자신의 머리가 정상인지 아닌지 테스트하기 위해 새롭게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쓴 단편소설들이 후에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게 된다. 대표 작품집인 ‘픽션들’은 그렇게 탄생한다.

혹시 지금 삶이 무료하다고 느끼는 분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집 가까이에 있는 창틀에 머리를 부딪쳐 볼 일이다. 다시는 못 깨어날 만큼 세게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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