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는 언제나 늦게 도착하라
프레데릭 베그브데 장편소설 ‘
(원제 99프랑)을 권해드립니다. 베그브데는 프랑스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가입니다. 모두 그를 두려워합니다. 문단에서도 그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제도와 시스템과 질서와 문명에 대해 그는 가차없는 칼날을 휘두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통쾌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이번 소설도 같은 종류입니다. 그중 한 대목을 여기 옮겨 놓겠습니다. 음미해보십시오.
<광고장이 십계명>
1)훌륭한 광고장이는 소비자가 아니라 파리에서 자신을 발탁해 줄 만한 이십 여 명의 인물(가장 우수한 이십여 개 광고 회사의 크리에이티브팀 이사들)을 노린다. 따라서 칸 국제광고제나 미술부장 클럽에서 상을 타는 것이 시장을 장악하는 일보다 광고주에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명심하라.
2)처음 떠오른 생각이 가장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 생각을 보고하기에 앞서 항상 3주간의 시간적 여유를 요구하라.
3)광고 직은 최선은 다하지 않고도 돈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다. 당신이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의했는데 광고주가 혹평을 하려 든다면 일단 당신의 보수를 생각하고, 그 사람이 내뱉는 말을 30초 안에 정리한 다음 야자수 몇 그루를 대본에 추가해 한 일주일 정도 마이애미나 희망봉으로 촬영을 나가라.
4)회의에는 언제나 늦게 도착하라. 시간을 지키는 광고장이는 믿음이 안간다. 45분 전부터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갈 때는 늦은 데 대해 사과하지 말고 오히려 이렇게 말하라. “안녕하십니까. 제가 여러분들께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딱 3분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롤랑 바르트의 말을 인용하라. “우리가 팔아야 하는 건 꿈이 아니라 센스입니다.”(좀 덜 근사하긴 하지만 레이먼드 로위의 이런 말도 있다. “보기에 추한 것은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러면 광고주는 과연 돈을 지불할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광고주들은 특별한 판매 아이디어를 찾지 못해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그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광고 대행사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광고장이들은 그들을 괴롭혀야 한다. 생산 부문 대표자들은 마조히스트에다 질투가 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욕당하기 위해 우리에게 돈을 지불한다.
5)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을 때는 맨 마지막에 발언을 하되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들을 취합하라. 어떤 회의에서도 항상 마지막 발언자가 누가 옳았는지를 가려주는 법이니까. 회의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라.
6)중역과 신참의 차이는, 중역은 일을 덜 하면서도 월급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월급을 많이 받을수록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잘 듣게 되고, 또 당신은 말을 적게 해도 된다. 이 직업은 중요한 위치일수록 입을 다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수가 적을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니까. 덧붙여둘 것은, 크리에이티브팀 이사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제출할 때, 광고장이는 그 아이디어가 마치 크리에이티브팀 이사의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고의적으로’ 자연스럽게 믿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광고장이는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열 것. “어제 이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라든가, “지난번 이사님의 아이디어를 제 나름대로 다시 연구해 봤는데요...”, 아니면 “저, 이건 이사님께서 처음에 제시했던 방향에서 나온 생각인데 말이죠....” 물론 크리에이티브팀 이사가 어제 한 말이나 지난번의 아이디어, 게다가 처음에 제시했던 방향 같은 건 없지만 말이다.
6-1)중역과 신참을 구별하게 해주는 또 다른 사실은, 신참은 희한한 농담을 해도 아무도 웃지 않는 반면, 중역은 썰렁한 농담을 해도 사람들이 다 웃어준다는 것이다.
7)자리를 자주 비워라. 점심때쯤 돼서 사무실에 나타나고, 사람들이 인사를 해도 절대 대꾸하지 말 것. 점심 먹는 데 한 세 시간 정도 보내고, 사무실에서 당신을 만나기 힘들게 하라. 이에 대해 누가 한마디라도 이렇게 말하라. “광고장이한테 근무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작업 기한만 있을 따름이죠.”
8)결코 자신의 광고 시안에 대해 누군가에게 의견을 구하지 마라. 의견이란 구하면 언제나 주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단 의견이 주어지게 되면, 그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9)모든 직장인들은 직속상관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수습사원은 크리에이티브팀 부장을 위해, 부장은 이사를 위해, 이사는 사장을 위해, 이런 식으로 말이다. 즉 직위가 높을수록 덜 힘든 것이다.(중략) 모든 업무는 수습사원에게 맡겨라. 결과가 좋으면 당신의 공적이 되고, 결과가 나쁘면 수습사원이 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니까.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혹사를 당하고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면서 온종일 커피 나르랴 서류 복사하랴 쉴 틈 없는 수습사원은 현대판 노예이며, 일회용 면도기 같은 존재나 다름없다.
10)동료가 근사한 광고 시안을 만들어 당신에게 보여주더라고 결코 좋다는 내색을 하지 마라. 오히려 형편없고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인다는 듯이 말하든가, 아니면 이미 그런 건 수백 번도 더 보았다든가, 또 오래된 영국 광고를 베낀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라. 대신 엉터리 같은 걸 보여줄 때는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내 맘에 쏙 드는군” 하고 말하라.
출처: 필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