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마음의 칼을 벼리게 하는 화가,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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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올더스 헉슬리는 “고야는 슬픔을 알고, 슬픔의 끝까지 알았던 인간의 거의 완벽한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타고난 독설가로 문명(文名)을 날린 올더스 헉슬리가 저렇게 말하는 화가 고야는 어떤 인물일까? 나는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라는 주제로 구성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내심 미술 분야의 시작을 고야로부터 하려고 마음 먹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고야에 대해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있다. 내가 처음 고야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교과서에 실린 "나체의 마하(마야)"를 통해서였을 테지만, 그에 대해 내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89년 무렵의 일이었다. 고야를 좋아하기 전까지 내가 좋아했던 화가는 으젠느 들라크로와였다.
1989년 무렵 나는 천안의 공단에서 살았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온통 절망과 분노로 칠갑을 한 듯 어둠 속에 있었다. 주말에 답답한 마음이라도 가시게 해볼 요량으로 찾은 천안역 인근의 서점에서 우연히 작은 화집들을 발견했는데, 처음 고른 것은 당연히 들라크로와의 화집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손바닥 한쪽만한 판형에 인쇄 수준도 형편없었지만, 문화적인 갈증에 시달렸으나 벌이는 시원찮았던 나에겐 감로수같은 책이었다. 천안에 사는 동안 나는 주말이면 시립도서관을 찾아 여러 책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골목 담벼락엔 비밀스럽게 "강철통신" 몇 호가 나왔다는 벽보가 붙어 있곤 할 무렵이었다.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두권씩 화집을 사모았는데 그중 한 권이 "프란치스코 데 고야"의 것이었다.
그의 그림을 본 나의 첫 소감은 아마도 어둡고, 칙칙함이었을 게다. 지금도 나는 그의 회화보다는 판화들을 더 좋아하지만, 판화를 즐겨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간간이 마음의 칼을 꺼내 벼르고 싶을 때만 그의 판화들을 볼 뿐이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고야는 내게 교양의 일부였지, 내 마음속의 화가라는 지위까지 얻지는 못했다. 나는 여전히 들라크로와와 고흐를 더 좋아했다. 그 무렵 판화가 이철수가 옮기고, 과학과사상에 출판된 사카자키 오쯔로오의 "반체제예술"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은 1990년에 나온 것으로 현재는 절판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케테 콜비츠를 화가로서 나의 어머니로, 프란치스코 데 고야를 아버지 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나이 19살 무렵엔 그렇게 해서라도 어딘가 누군가에게는 크게 기대고 싶었다.
국내에 알려진 정도로 보았을 때, 처음엔 고야가 먼저 알려졌겠으나 의미있는 연구랄까,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건 케테 콜비츠가 먼저였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고야는 잘 알고 있고, 잘 알려져 있다는 의식 때문에 도리어 잘 알기 어렵고,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다. 다른 의미에선 오히려 곡해받은 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케테 콜비츠에 대해서는 지난 1980년대 이미 정하은의 "케테 콜비츠와 노신"과 같은 책들로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던 반면, 고야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요근자의 일이다. 케테 콜비츠의 경우엔 1980년대 민중미술진영의 선호가 분명히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텐데, 1,2차 세계대전 무렵의 콜비츠에 비해 고야는 나폴레옹 제정 시대의 사람이니 마르크스 원전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먼저 수입되었던 당대의 풍토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인 박홍규 선생이 고야에 뒤이어 콜비츠를 다룬 책을 펴낸 것을 굳이 고려에 넣지 않더라도 이 두 사람의 화가는 시대를 초월해 서로 호응하는 측면이 있다.
앞서 나는 20세기의 문화예술을 다루는 사이트를 운영한다고 했는데, 거기에 왜 나폴레옹 시대의 사람인 고야를 넣으려고 했을까. 물론 개인적인 호감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나 개인적인 미술사란 측면에서 고야는 18세기의 화가가 아니라 20세기의 화가이기때문이다. 다소 주관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실제로 고야에겐 제자가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 낭만주의 화가들은 고야의 계승자들이 아니었으며, 그들 자신도 고야를 계승한다는 의식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고야는 그 시기에 나타나기 어려운 화가가 돌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나의 관점에 따르면 폴 세잔 역시 그런 측에 들지만, 세잔의 고립은 오래지 않아 계승자들이 출현함으로써 해결되지만, 고야만큼은 거의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고야는 최소한 우리에겐 이해받지 못한 화가였다.
그런 점에선 이 책, 박홍규 선생의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도 비슷한 입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홍규 선생의 이 책은 비전문가가 저술한 고야 평전으로서의 장점과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법학을 전공한 교수가 어째서 고야에 대한 평전을 쓰게 되었을까? 좋은 책, 훌륭한 저자는 "들어가는 말(서문)"에서 독자의 이런 궁금증을 절반쯤은 해결해준다. 그건 이 책의 서문 역시 동일한데, 박홍규 선생 자신이 들어가는 말의 제목을 "왜 고야인가?"로 뽑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고야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거나 책을 내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선수를 빼앗긴 셈이다. 그것은 고야에 대한 나의 관점이 또한 박홍규 선생의 관점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이렇게 생각하면 후학으로서 억울해지기 시작한다). 박홍규 선생은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벤투리의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고대 시가 호머에서 출발하듯이 현대 회화는 고야에서 시작된다"고 이탈리아의 벤투리는 말한다. 프랑스의 말로도 고야가 현대회화의 막을 올렸다고 비유한다. 고야와 같은 스페인 사람이 한 말이 아니니 믿어도 좋겠다. 그러나 나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듯이 고야에 의해 "미는 죽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이나 미는 낡은 그것이다. 즉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까지 이어진 고전미가 죽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옛 눈으로 보면 고야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본문 7쪽>
이 문장은 이 책 전체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는 핵심이면서, 이 책이 도달해야 할 경지가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를 보여분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책은 뛰어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책은 비전문가의 미술가 평전이다. 그런데 전문가라 할 수 있는 국내 미술사가들 가운데 특정 작가를 중심으로 한 권의 책을 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런 점만 놓고 보더라도 이 책의 장점은 차고 넘친다. 게다가 평전 읽기에 있어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분위기, 정치경제사회적인 측면을 저자가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편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책은 매우 뛰어난 점이 있다. 이 책은 모두 5장 18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장 "스페인"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스페인의 역사를 장장 50여 페이지에 걸쳐 정리해주고 있다. 스페인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따진다. 그런 뒤에 비로소 본론에 해당하는 스페인 미술과 고야의 출생과 출세 과정을 따지기 시작한다.
나는 박홍규 선생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저술했다고 추측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를 통해 고야만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고야를 통해 당신이 주장하고 싶은 바, 이야기하고 싶은 바를 말하고자 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박홍규 선생이 고야를 이야기하게 된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그 핵심엔 물론 고야 자신의 반체제성과 권력의 미학에 그가 반기를 든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 스페인은 스페인 시민 전쟁(유일무이한 경험 - 아나키스트들의 전쟁)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은 주석을 제외하고, 본문만 270여쪽에 이른다. 그런데 제1장 스페인이 50여쪽을 차지하고, 제5장 현대 스페인이 또 40쪽 정도를 차지한다. 전체 지면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지면을 스페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즘적 입장에 서 있는 박홍규 선생에게 스페인이란 나라는 애써 범상한 어조로 말하지만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곳이리라 유추해본다. 그는 군데군데 이런 저자 자신의 자의식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지식인으로서의 그것이다.
그러나 나이 40이면 대가 행세를 하고, 아예 군림하고자 하며, 과거만을 뜯어먹고 사는 조로 권위 현상이 아직도 대세인 한국에서 나는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고야에게 겨우 배우기 시작한다는 점을 자랑으로 삼는다. 사실 고야의 그림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죽기 직전 82세에 그린 "지금도 나는 배운다"라는 작은 소묘이다. 여든에 페르시아어를 새롭게 배우는 괴테처럼 여든에도 새로운 배움을 찾는 고야는 감동적이다. <본문 9쪽>
박홍규 선생은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해주고, 고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애쓴다. 우리가 "고야" 하면 단박에 떠올리는 작품은 열에 여덟 정도는 "나체의 마하"일 것이다. "나체의 마하"는 사실상 고야의 유일한 누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어째서인지 이 유일한 작품이 고야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좌우한다. 그런데 박홍규 선생은 "마하(maya)"의 이름부터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음을 지적해준다. "마야"가 아니라 "마하"이며 마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건달녀'의 의미를 지닌다. 즉, 술집에서 일하거나 천한 일을 하는 조금은 낮은 신분의 여자라는 거다. 회화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을 안다면, 이 차이가 얼마나 큰 인식의 차이를 가져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홍규 선생은 고야에 대한 이런 왜곡을 바로 잡고 싶었을 것이다.
평전을 역사의 일부로 볼 것인지, 문학의 일부로 볼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어느 경우든 저자의 관점이 녹아드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박홍규 선생은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본인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과도하게 전하는 편이다. 박홍규 선생이 종종 고야의 작품을 통해 논증(비평)하기 보다는 앞질러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이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페인이란 화가의 배경을 앞뒤로 포개어놓다 보니 정작 화가 자신이 그 사이로 숨은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예전의 리뷰에서 "티토 평전"에 특별히 높은 점수를 준 까닭은 작가 자신이 티토의 일대기를 풀어가며 사이사이에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당시 티토의 선택을 끼어놓는 방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진한 수프같이 걸쭉해졌기 때문이었는데, 박홍규 선생에게 스페인과 고야는 마치 샌드위치럼 포개진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한데 어울리기 보다는 따로따로 떼어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그보다는 "들어가는 글"에서 밝히고 있는 "왜 고야인가?"에 대해 충실한 대답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박홍규 선생은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고야 이후 "미는 죽었다"고 선언적인 문장을 이용해 말하고 있는데,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에는 이에 대한 설득이 부족해 보인다.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좀더 명징하게 납득하고, 설득되고 싶은 아쉬움을 채워주기엔 부족해 보인다. 박홍규 선생은 이 책 전체에서 고야의 회화보다는 판화에 좀더 비중을 두고 다루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는데, 실제 도판의 사용 빈도수란 측면에서도 고야를 다룬 다른 책들과 비교해도 판화를 많이 다루고 있다. 물론 고야의 작품 비평이 아니라 인물과 사상을 이야기한다는 측면에서 판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예전에 고야의 판화 전시회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무렵 같이 전시되었던 인상파 회화전을 보는 것 보다 훨씬 인상적이었고, 마음에 남는 것이 많은 작품들이었다. 나는 박홍규 선생의 이 책이 고야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왜곡을 바로 잡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자신이 일관된 태도를 갖는 것은 중요하지만, 독자들 역시 저자의 글을 읽으며 자신만의 결론을 추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 역시 중요하다. 특히나 저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박홍규 선생이라면 더욱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벤투리는 어째서 고야를 현대회화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했는지에 대해 선언적인 이야기,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저절로 수긍되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처럼 여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평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작가연보와 일반적으로 미술책엔 대부분 포함되는 도판목록이 누락되어 있는 점, 색인과 참고 문헌이 누락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시대의 모범이 되는 스승으로 박홍규 선생을 존경하고, 당신의 저서 대부분을 구해서 읽고 있는데, 물론 이 책에 대해서도 내가 열거하고 있는 몇몇 문제들보다는 좋은 점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