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집시고, 강도고, 볼셰비키다'
현대 영미권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존 업다이크〈사진〉가 2차 대전 이후 미국 미술계의 흐름을 소설을 통해 되살려 냈다.
2001년 초봄, 미국 동북부의 버몬트주의 한적한 시골에 은둔 중이던 79세의 여류화가 호프 샤페즈는 야심에 찬 뉴욕의 잡지사 여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는다. 노(老)화가는 미국 화단의 추상 표현주의와 팝아트의 양대 산맥이었던 두 남자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 잭 맥코이의 모델은 액션 페인팅의 대가 잭슨 폴록, 두 번째 남편 가이 할로웨이는 엔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거장을 혼합해 놓은 인물이다. 항상 시대를 앞서야 한다는 긴장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들의 예술적 실험과 도전, 내적 고민 등을 통해 거장들의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를 되살린다. 인터뷰 과정에서 19~20세기 미국 미술계의 온갖 무용담이 당시 사회상황과 맞물리면서 등장해 현대 미국미술에 대한 교양서로도 읽힌다.
젊은 여기자와 노화가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며, 오전의 두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보았던 인터뷰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한 다발이나 되는 질문지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녹음기를 들이댄 여기자는 주인공이 피하고 싶은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두 여인 간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실험과 반동으로 점철된 미국 미술계의 단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잭슨 폴록 등이 활약했던 시기는 전통적인 유럽화단의 강세에 맞서 미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미술사조는 추상 표현주의와 팝아트. 작가는 소설의 상당부분을 잭슨 폴록 연구서와 추상 표현주의 명화집에 기대고 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피카소는 별로다, 너무 쉽게 너무 많은 것을 해낸다. 마티스는 괜찮다, 모든 것에 외적인 절제가 있고 노력을 통해 달성하며, 검소한 부르주아다. 피카소는 집시고, 강도고, 볼셰비키다.’(50쪽)
새롭게 태동하기 시작한 미국 화단은 투박함과 열정, 그리고 폭력에 가까운 형식파괴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다.
‘잭은 그림이 꾸며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해서 지저분하거나 깨진 유리잔을 물감이 아직 마르지도 않는 캔버스에 던지거나, 더러운 신발로 캔버스 위를 걸어다니기도 했다.’(76쪽)
거장들이 심혈을 기울여 작품에 몰두하는 과정은 “질문과 대답, 밀고 당기기”로 상징된다. 전쟁과 사회변혁 등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그 시대 예술가들에게 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예술이 인간이나 사회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탐색이기도 했다.
‘나는 모든 회화가 이야기, 즉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오. 화가가 하고 싶지 않은 것, 화가가 하고 싶어 하는 것, 화가가 죽기 살기로 시도하는 것,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일종의 뭐랄까, 궁국적인 섭리?’(352쪽)
캔버스는 하나의 모험이자, 인생과 사회를 담는 그릇이었다. 인터뷰 말미에 여류 화가에게 열정과 창조와 사랑과 진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그것은 온갖 역경을 거쳐 황혼기에 이른 자신의 얼굴이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