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흔히 나침반, 화약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 중 하나로 간주되는 발명품이다. 중국 고사에 따르면 종이는 서기 105년에 후한(後漢) 대의 환관이었던 채륜(蔡倫)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 결과로는 적어도 그보다 250년 이상 일찍 발명되어 기원전 14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종이는 처음에는 뭔가를 기록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포장 재료나 의복, 개인 위생용으로 이용되었다. 기록 용도로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한 증거는 서기 110년경이 되어야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중동을 거쳐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제지술은 751년 경 중앙아시아의 슈마르칸트에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카이로, 모로코, 스페인을 차례로 거쳐 서유럽에 퍼졌으며, 14세기에는 서유럽 각지에 종이 공장이 생겨났다.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중세 서유럽에서 기록매체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는 이후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종이는 15세기 이후 발전한 인쇄술과 함께 지식의 대중화 과정을 주도하여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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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토박이였던 고대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뮤제온에서 천문학, 점성술, 광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알마게스트>라는 천문학 책인데, 이는 '가장 위대한 것'이란 뜻으로 훗날에 아랍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가 너무나 훌륭하다고 해서 원제목 대신 붙인 이름이다. <알마게스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에 바탕을 두고 행성의 움직임을 원운동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전원', '이심원' 등과 같은 복잡한 수학적 도구들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도구들은 행성들이 실제로는 타원 궤도를 따라 운행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자들이 행성의 움직임을 규칙적인 원운동으로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것들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다고 간단히 말하기 쉽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지동설과 타원궤도를 몰랐던 헬레니즘 천문학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여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알마게스트>는 원운동을 이용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매우 훌륭한 책이었다. 실제로도 이 책에 따라 행성의 운동을 계산한 결과는 매우 정확하였고, 이 때문에 그 후 1,500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최고의 천문학자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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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중국인에 의해 발명된 최고의 발명품으로 나침반, 종이 그리고 화약이 손꼽힌다. 이들 세 발명품은 거의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나침반은 지자기에 의해 자침이 항상 자기북쪽을 향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항해, 여행 등 먼거리를 이동할 때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도구이다.
자석이 지구의 북쪽을 향하는 성질은 유럽보다 중국에 먼저 알려졌다. 자석의 성질을 기술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후한(25∼220)시대 왕충(王充)의 저서 <논형(論衡)>에 의하면 '자석인침(慈石引針)' 외에 '사남(司南)의 국자(杓)'라는 기록이 있다. 천연 자석을 국자 모양으로 만든 것을 '사남의 국자'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테이블 위에 두면 그 머리가 남쪽을 향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자석은 '마그네시아의 돌'이라는 뜻의 '마그네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으나 그것이 나침반으로서 사용되게 된 것은 중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자석은 특히 14세기 이후 서양의 함선들이 전 지구를 항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 이후 자석이 없는 항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GPS, 즉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여전히 나침반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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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수학이 엄격한 논리적 사고를 북돋우는 기하학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도의 수학은 일찍부터 수의 추상화에 성공하여 복잡한 산술이나 대수를 발달시키고 있었다.
고대에는 인도인들도 그리스나 로마인, 또는 그에 앞선 고대의 이집트 사람들처럼 10진법을 쓰면서도 10, 100, 1000, 10000....등에 각각 다른 부호를 써야 하는 불편한 기수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이들은 같은 부호를 자리에 따라 다른 값으로 읽을 줄 아는 지혜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0'을 오늘날의 우리처럼 쓸 줄 알게 되었다.
자리에 따라 같은 부호로 다른 숫자를 나타내게 하는 방법은 이미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쓰여졌지만, '0'을 알게 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도 0을 발견하고 썼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그들의 영향은 대서양 저쪽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 아시아나 유럽의 구 문명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구대륙에 0의 사용이 퍼진 것은 인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도에서 0을 써서 남긴 기록은 적어도 5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실제로 0이 알려진 것은 그보다 수백 년도 더 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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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책을 인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금속활자가 처음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고려 시대 고종 21년(1234) 경이었다. 당시의 학자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후집에서 <고금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로 인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금상정예문>은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아 어떤 모양의 책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는 역시 고려 시대인 우왕 3년(1377)에 인쇄되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직지심경>이 꼽히는데, 이는 흔히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요한 구텐베르크보다 70년 가량 앞서는 기록이다.
그러나 활자 인쇄술이 사회적으로 더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정작 서양에서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지식층의 숫자가 적어 책의 수요도 많지 않았으므로, 활자 인쇄술이 지닌 잠재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반면 서양의 알파벳은 활자 인쇄술의 보급에 적절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1450년 평평하게 배열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여 수백 권의 책을 인쇄한 구텐베르크가 이러한 가능성을 최초로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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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나라 인도를 향한 스페인 왕실 소유의 탐사대는 드디어 1492년 10월 12일 벌거벗은 야만인들이 사는 한 해변에 도착하였다. 탐사대의 대장인 콜럼버스(Columbus, 1451∼1506)는 이 땅을 '구원의 성자'란 이름의 '산 살바도르'라고 불렀다. 신대륙에 유럽인의 발자국이 처음으로 찍힌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진짜 인도 대륙이라고 믿었다. 1497년 브라질을 탐험한 아메리고 베스풋치의 항해기로 신대륙이 널리 알려진 뒤 그 이름은 비로소 아메리카가 되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을 가져 10대 후반부터 아버지를 도와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가는 항해를 하였다. 제노바의 상선대 선장이 된 이후로는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면 반드시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483년 이 꿈을 포르투갈 왕에게 청원하였으나 거부되었으며, 몇 년 뒤 마침내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원조를 얻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세 척의 배는 인도로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어진 네 번의 항해도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에게 약속한 엄청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항해 내내 반란과 문책에 시달렸지만, 황금만큼 전세계 시장을 휩쓴 담배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는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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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x3 + x2 = c 라는 형태의 3차방정식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3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그리스와 이집트에서도 3차 방정식을 풀겠다는 노력은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최초로 3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한 것은 16세기 초 무렵 이탈리아의 수학자 페로(S. del Ferro)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해법을 공표하지 않고 사위인 피올레에게만 전수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전수받은 피올레는 해법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누구에게나 자랑했다고 한다. 그 소문에 자극을 받은 베니스대학의 교수 타르탈리아(N. Tartaglia)는 3차 방정식에 몰두하여 마침내 그 해법을 혼자 알아냈다. 1535년 피올레와 타르탈리아는 공개석상에서 서로 문제를 풀어 승패를 겨루게 되었는데, 타르탈리아가 피올레의 문제를 2시간 남짓 걸려 풀었는데 반해 피올레는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고 한다.
타르탈리아의 승리가 널리 세상에 알려지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 해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중 밀라노 대학의 카르다노(G. Cardano)는 타르탈리아가 언어장애자란 약점을 이용해 자기가 저서를 발표할 때까지는 절대로 남에게 공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법을 전수받았다.
몇 해 후인 1541년, 카르다노는 타르탈리아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고등대수학>을 출판하여 3차 방정식의 해법을 공표했다. 이 결과 불쌍하게도 3차 방정식의 해법은 카르다노의 방법이라 하여 인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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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 유학할 때 마침 붐을 이룬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단순하며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철저한 플라톤주의자인 그의 눈에 비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허점 투성이로 보였다. 그는 천동설에 반대해서 자신의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1543년에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한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 프톨레마이오스도 지구가 돌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모든 떨어지는 물체에 앞서 갈 것이며, 지구 위의 동물과 물체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대기권 안의 모든 것은 지구와 함께 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구와 같은 큰 땅덩어리가 돈다면 원심력 때문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더 빨리 도는 천체들은 무사할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와 같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운동한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보다 있음직한 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은 천문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중세의 우주관과 그것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밑둥부터 무너지게 되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가장 존엄한 존재였는데, 이제 인간은 여러 행성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작은 별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가는 존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야 했으며, 부질없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 체제는 차츰 깨어지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었으니, 코페르니쿠스야말로 이 변화의 첫 신호를 울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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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돈다고 하여 천문학의 혁명을 시작하던 시기에 해부학에서도 벨기에 출신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가 주도한 새로운 흐름이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파리와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에서 공부한 뒤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 뒤 당시의 관례인 대리 해부를 거부하고 직접 인체 해부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1543년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란 7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 실린 해부도는 너무나 생생하여 한동안 능가하는 책이 없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도는 사실적인 해부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새로운 연구 방법은 이후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들에게 이어져 해부학을 순수한 경험과학으로 정착시켰다.
16세기까지 널리 받아들여지던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은 소화, 호흡, 신경 활동을 각각 자연, 생명, 동물의 영혼에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해부학은 이러한 갈레노스의 이론을 검증하는 데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 결과 갈레노스가 말한 허파 좌우심실 사이의 격막 구멍이 없으며 정맥보다 동맥에 더 많은 피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베살리우스는 이러한 발견들은 세밀한 해부도와 교육을 통해 전 유럽으로 전파하였으며, 그 결과 새로운 해부학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이때 인체의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학 지식이 축적되었으며, 오늘날 사용하는 용어들이 거의 대부분 정립되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부터는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에서 기능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17세기 하아비가 피의 순환 이론을 바탕으로 생리학의 혁명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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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기존의 달력체계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달력체계를 선포하였다.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은 1태양년을 365.25일로 하고, 4년 마다 하루씩 '윤일'을 넣어 달력과 계절이 일치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측정할 때 생기는 약간의 오차로 인해 100년마다 하루씩 늦어지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밀린 날짜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14일에 달하자, 교황은 당시 3월 11일이었던 춘분을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 시대의 춘분 날짜인 3월 21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1582년 10월 4일을 기점으로 달력의 날짜가 열흘씩 앞당겨져 10월 4일 다음날은 10월 15일이 되었다.
그레고리력이 율리우스력과 다른 점은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 중에서도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가 아니면 윤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로 1600년, 2,000년은 윤년이다. 또한 4,000년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이 아니고 평년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어 2만년에 하루 정도 오차가 생길 만큼 정확하다.
개정된 지 1년 만에 그레고리력은 이탈리아의 소국가,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카톨릭을 믿는 독일의 소국가에 전파되었으며, 점차 다른 국가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699년에는 신교를 믿는 독일의 소국가들, 1752년에는 영국과 그 식민지, 1753년에는 스웨덴, 1873년에는 일본, 1912년에는 중국, 1918년에는 소련, 그리고 1923년에는 그리스가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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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작거나 멀리 있어서 맨 눈으로 분석할 수 없는 물체를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사용하여 확대해서 본다는 착상은 과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작은 물체를 확대하는 기능을 가진 현미경은 1590년에 네델란드의 젠센에 의해 최초로 발명되었고, 현미경의 초점 조절 장치는 1668년 이탈리아의 캄피니가 개발하였다. 1660년 네덜란드의 과학자 뢰벤후크는 최초로 현미경을 사용하여 박테리아를 관찰하였는데, 그가 만든 270배율의 현미경은 미생물과 인간의 혈구를 연구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었다. 현대의 광학 현미경은 배율이 수 천 배에 이르는데, 이 정도의 배율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렌즈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효율적인 광학 현미경의 설계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전자 현미경이다. 전자 현미경은 100만 분의 1밀리미터 정도의 물체를 전자의 파동성을 이용하여 관찰하는 장치이다. 전자 현미경에는 주사 전자 현미경과 투과 전자 현미경이 있다. 전자 현미경은 생물학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으며, 암석의 연구, 재료 과학, 반도체 제조 등에 요긴하게 사용된다.
전자 현미경은 1926년 한스 부쉬가 설계했다. 부쉬의 발명은 1873년 에른스트 아베의 이론적 업적과, 이를 이은 베를린 공대의 에른스트 루스카와 막스 크놀의 노력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은 1933년에 전자 현미경을 최초로 실용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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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런던의 유명한 의사이며 후에 궁정의가 되기도 했던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가 1600년에 출판한 책 <자석에 대하여>는 근대 자기학과 전기학을 태동시킨 저작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석에 대하여>는 자기 현상에 관한 기본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아 놓은 체계적인 논의였고, 이 주제에 관한 이처럼 방대한 저술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물론 이 책에 담긴 자료들 중에는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사실을 가려내서 실었고, 또 실험을 통해 수집하고 확인한 사실들을 싣는 등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논의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당시 여전히 널리 퍼져 있던 르네상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책이기도 했다. 길버트에게 자기 현상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힘들로 가득찬 우주의 가장 중요한 활동적 원리였으며, 그런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열쇠였다.
한편 이 책은 전기 현상에 관한 상당량의 탐구 결과를 담고 있는 최초의 책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길버트는 그동안 흔히 혼동되어 오던 자기 현상과 정전기 현상을 분명히 구분했고, 정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몇몇 도체들에 관해 기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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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갈릴레이는 먼 데 있는 물체를 확대하여 보는 '망원경'이라는 것이 네델란드의 미델부르크의 안경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스 리퍼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전해에 '망원경'의 발명특허권을 얻었다. 갈릴레이는 렌즈를 여러 가지로 조합하여 광학적 성질을 연구하고 손수 몇갠가의 개량된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그것으로 하늘을 살펴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했다. 그는 망원경 관찰을 통해 천체가 전통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지구보다 완전하거나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태양 표면에는 반점들이 있고, 높은 산이 있는 달은 지구와 비슷했다. 그는 달 속의 산 그림자의 길이로 그 높이를 추산했다. 그리고 달이 초생달에서 만월로 모양이 바뀌듯이 금성도 그 모양이 변하고 있다는 것과 목성에는 네 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따르는 태양계를 소규모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16세기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행성의 위치에 관해 톨레미 체계보다도 정확한 예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전통적 역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이 점차 진보하면서 코페르니쿠스 학설도 점점 힘을 얻게 되었고, 갈릴레이의 여러 발견이 그 타당성을 증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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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문학 혁명은 케플러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일했던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은 후 스승의 정밀한 관측 자료를 몽땅 물려받았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몇 개의 원운동만으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애써 봐도 8분의 오차를 없앨 수가 없었다. 이 8분의 오차를 없애기 위해 케플러는 '천체는 원운동한다'는 그때까지의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원운동이 가장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운동으로서 천상계의 천체는 원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케플러는 이 신념을 포기하고 타원궤도를 새로이 도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행성은 이제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도는 것으로 제시되었다(케플러의 제1법칙). 또한 행성이 타원 궤도를 도는 속도도 균일한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멀때는 천천히, 가까울 때에는 빨리 도는 것으로 설정하였다(케플러의 제2법칙). 그럼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주전원과 같은 복잡한 기하학적 모델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행성의 궤도는 부등속 타원 운동이라는 단순한 기하학적 모델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케플러의 업적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부등속 타원 운동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이 문제에 대해 태양에서 방출되는 자기적 힘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뉴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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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이래 서양에서는 로마 황제의 시의이자 의학자였던 갈레노스의 인체구조 및 작용에 관한 이론이 정설로 통용되어왔다. 갈레노스는 인체의 세 가지 중요기능--소화, 호흡, 신경--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여기에는 사람이 섭취한 음식물은 위와 장을 거쳐 간에 이르러 '자연의 영(natural spirit)', 즉 피로 바뀌어서 정맥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고 영양분으로 소모된다는 설명이 소화에 대한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부터 활발하게 행해진 인체 해부를 통해 갈레노스가 주장한 해부학적 지식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의학자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갈레노스 이론을 부정하고 피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하비는 맥박이 뛸 때마다 방출되는 피의 양과 맥박의 횟수로부터 적어도 하루에 300Kg 이상의 피가 방출된다고 계산해 내고, 사람의 체중의 몇 배가 되는 이 많은 양의 피가 매일 생성되고 소모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실험적인 증거를 통해 그는 피가 심장에서 나와 동맥을 지나 온몸을 돌고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주장을 펼쳤다.
비록 하비는 갈레노스처럼 인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체계를 세우지 못했지만, 혈액 순환이론이 등장하면서 인체에 대한 생리학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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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던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교육제도의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가 지은 저술 가운데 <학문의 진보>와 <과학의 신기관(Novum organum)>에는 17세기 초의 유럽 학문을 혁신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신감에 충만한 그의 기독교적 학문 혁신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있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자연 외적인, 즉 인간의 목적이나 관심이 과학에 들어오자 인간위주가 된 과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중세로 접어들어 여기에 종교까지 섞여 들어서 과학적 지식과 경쟁을 하게, 과학은 베이컨 자신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타락해 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근대과학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베이컨의 학문 혁신론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학문 혁신론이 탄생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그는 거의 깨닫지를 못했었다. 베이컨 이후 17세기 전체에 걸쳐 과학 사상은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업적에 지배되고 있다고 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그의 체계적 의심의 방법(method of systemaitc doubt)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한 가지 한 가지씩 부정해 나갔다. 그는 우선 감각에 의한 인간의 경험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의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따라서 부정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외부의 존재도 의심하고 부정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신의 존재와 그 완전성을 증명했고, 그에 바탕해서 다시 외부세계의 존재 및 여러 현상들에 관한 지식을 증명해 나가고 결국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에 대한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러한 지식체계에 바탕을 둔 것이 바로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이다. 이같은 데카르트의 지식체계는 아주 널리 받아졌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17세기가 끝날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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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갈릴레이, <두 개의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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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33년에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 즉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금지령을 내린 상황에서 갈릴레이가 <두개의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하고 지동설을 옹호함으로써 금지령을 어긴 것이 죄목이었다.
이 책은 3명의 가상 인물이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체계, 즉 천동설에 관해 나누는 대화 형식이었다. 갈릴레이는 드러내놓고 지동설이 옳다고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지지하는 새로운 역학 개념과 망원경을 통해 관측한 결과들, 예를 들어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금성의 위상 변화 등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지동설로 기울어지도록 유도했다. 특히 이 책은 전 유럽에 빠른 속도로 퍼져 천문학자가 아닌 수많은 지식인들의 우주관에 영향을 주었다.
만일 지동설이 옳다면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므로 인간의 지위,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 운동을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역학, 움직이고 있는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운동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와 달리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모색한 최초의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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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덥거나 춥다고 느끼는 감각을 결정한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접촉했을 때 고온의 물체는 시원하다고 느끼고, 저온의 물체는 따뜻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두 물체가 같은 온도에 도달했을 때는 열평형 상태에 도달했다고 한다.
최초의 온도 측정 장치는 써모스코프였다. 이것은 긴 튜브가 색깔 있는 물에 담겨 있고 그 끝은 유리구 형태로 되어 있다. 갈릴레오는 이 색깔 있는 물이 포도주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641년에는 공기 대신에 액체를 사용한 온도계로 발전되었다. 이 때에는 알콜이 사용되었다. 1664년에는 알콜 대신에 빨간색 염료가 사용되었다. 1702년에는 두 개의 고정점이 눈금의 기초가 되었는데 눈과 물의 끓는점이었다. 이 온도계로 1708-1709년에 코펜하겐의 날마다의 온도를 기록했다.
온도계의 액체로 수은이 사용된 것은 1724년이었다. 수은의 열역학적 팽창은 크고 균일하다. 수은은 영하 38.9℃에서 356.7℃ 까지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액체인 수은은 뜨거워질수록 부피가 팽창하는데 이 팽창률이 일정해서 정확하게 눈금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수은은 유리에 붙지 않고 넓은 온도 범위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는 특성이 있다. 또 색깔이 읽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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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들어와 서양에서는 공기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토리첼리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진공의 존재한다는 사실과 대기압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한쪽이 막힌 길고 두꺼운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운 다음, 한 쪽을 손가락으로 막아 수은이 담겨진 그릇에 세우고 손가락을 떼었을 때 유리관 속의 수은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때 유리관 안에 남아있는 수은의 높이는 76센티미터였다.
이 실험에서 두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토리첼리의 진공"은 인류가 만든 최초의 진공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는 명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에는 진공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험결과 수은주의 상단에 진공이 형성됨으로써 오랫동안 고수되던 권위가 사라졌다. 이것은 곧 실험과학의 승리를 의미한다. 둘째, 수은주가 일정한 점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대기압의 작용 때문인데, 그 대기압은 수은주 76센티미터를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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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정력학의 확립에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파스칼의 원리는 1652년 무렵에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종교가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 의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그것을 쉽게 풀어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밀폐된 용기 속에 있는 유체의 어느 한 부분에 가해진 압력은 그 유체의 모든 부분과 용기의 안쪽 벽에 똑같은 크기로 전달된다."
이 원리가 가지는 과학사상의 의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이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던 진공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17세기 유럽의 과학계에서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대해 기계적 철학이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었으며, 그 가장 첨예한 대립 지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진공에 관한 문제였다. 사이펀이나 펌프가 일정한 높이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계적 철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고,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실험 등이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원리를 고수하려는 기존의 자연철학의 궁색한 설명들의 타당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파스칼의 일련의 기발한 실험들, 즉 물과 포도주의 비교실험, 머리부분의 모양이 서로 다른 유리기둥들을 사용한 비교 실험, 퓌 드 돔 실험, 진공 속의 진공 실험 등이 제시되면서 유체의 압력(당시에는 아직 '무게'라고만 생각했지만) 전달 현상에 관한 기계론적인 설명이 부인할 수 없는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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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학은 곡선의 접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적분법은 곡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의 면적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법 자체는 그리스 시대부터 논해져 왔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적분법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은 1665년 대학으로부터 집으로 귀향하던 중에 그의 유명한 삼대 발견, 즉 빛의 분산, 만유인력의 존재, 미적분학을 이루어 냈다. 1687년에는 그의 역학 체계를 나타내는 대저 프린키피아를 출간하였다. 뉴턴 역학의 기초를 이루는 운동의 3대 법칙이 이 프린키피아에 기술되어 있는데, 1704년에는 3차곡선론, 곡선의 구적법을 발표하여 미적분법의 정식 설명을 공표하였다. 미적분학에 관한 계산법에 관해서는 라이프니츠와의 사이에 그 선취권에 관한 논쟁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발표는 라이프니츠 쪽에서 앞섰지만 실은 이미 그 10년 전에 뉴턴이 발견,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후대에 와서 밝혀지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1675년에 새로운 계산법, 즉 미적분법을 발견하였고, 이 결과를 1677년에 발표했다. 1686년에 발표한 〈심오한 기하학 및 무한소 분석에 관하여〉 라는 논문에서 라이프니츠는 많은 초등 함수들의 적분에 관한 법칙을 실었고 적분 부호를 이용했을 뿐 아니라 미분과 적분을 서로에 대한 역연산이라는 사실까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부정적분을 정적분과 분리하여 적분상수도 생각하고 있었다.
1693년에 그는 초월함수를 급수로 전개하여 여러 가지 결과를 얻기도 했으며, 1695년에는 함수의 적을 n회 미분할 때 쓰이는 공식을 발표하였다. 여러 가지의 용어를 도입한 것도 그의 공적이다. 미분, 함수, 좌표, 미분방정식, 산법 등과 같은 용어는 그가 최초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계산법은 1696년에 로피탈(l'Hospital, 1661-1704)이 처음으로 저작의 모양으로 만들어 〈무한소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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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크는 원형질이 없이 속이 빈 세포가 규칙적으로 배열해있는 것으로, 부피생장하는 식물의 줄기, 가지, 뿌리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보호조직이다. 영국의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당시에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하던 현미경을 이용하여 코르크를 관찰한 후, 이를 '작은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빌어 '세포(cell)'이라고 이름지었다. 1665년 그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상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그 구조를 상세하게 기술한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아 그가 관찰한 것은 세포 자체가 아니라 세포벽이었다. 또 당시 현미경의 성능상 한계로 더 자세한 세포 구조를 관찰하기 어려웠고 훅은 세포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800년대에 슐라이덴(Mathias-Jacob Schleiden, 1804-1881)이 식물세포설을 주장하고, 이어서 슈반(Theodor Schwann, 1810-1882)이 동물계까지 세포설을 확장시킨 후에야 비로소 생물의 구조적/기능적 기본단위로서의 세포의 중요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세포설의 등장으로 생물학은 발생학, 유전학 및 진화론에서 근대적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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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대의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정립한 역학 체계는 아인슈타인이 나오기 전까지 수 백년 동안 인류의 시공 개념을 장악했다. 흔히 고전역학이라고 불리는 이 역학 체계는 뉴턴의 힘에 관한 세 가지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 케플러가 제시한 행성의 타원 궤도 운동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만유인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역학 체계는 1687년에 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책이다.
16-17세기에 진행된 과학의 혁명적인 변화를 흔히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뉴턴의 혁명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문학의 문제들을 역학적으로 완전히 설명하고, 갈릴레오에서부터 비롯된 역학의 혁명을 완결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뉴턴의 역학은 이후 호이겐스, 라플라스 등에 의해 더욱 정교화되었고, 이후 모든 물리 과학(physical science)의 기본이 되었다.
나아가 고전역학은 특정한 초기 조건과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방정식이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믿음은 20세기에 들어와 양자역학이 성립되면서 상당히 퇴색되었지만,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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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증기기관의 등장은 사람이나 가축, 흐르는 물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고 기원 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실제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증기의 힘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1698년에 영국의 토마스 세이버리는 증기를 응축시켜서 얻은 흡입력으로 광산의 물을 뽑아올리는 수동 밸브 펌프를 만들어 최초로 특허를 받았고, 1712년에 토마스 뉴커맨은 피스톤과 실린더를 이용해 작동하는 최초의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산업혁명기에 증기기관이 널리 전파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제임스 와트이다. 1765년 그는 뉴커맨 기관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분리 응축기를 도입하여 연료의 소비량을 뉴커맨 기관의 1/4 정도로 줄이는 중요한 기술적 진전을 이루어내었다. 또한 와트는 이전까지 왕복운동만 가능하던 증기기관이 회전운동도 할 수 있도록 개량함으로써 증기기관이 물 펌프 용도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동력으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공장들은 수력을 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가에 자리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운송 채널이 다양하고 노동력이 풍부한 도시 근처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산업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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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스웨덴의 읍살라에서 태어난 린네(Linneaus, Carl, 1707-1778)는 18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식물학자이다. 흔히 '분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이명법을 분류학에 적용한 학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생물계를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식물의 성에 관심을 두고 꽃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린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식물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수술의 수에 따라 식물계를 24개의 강으로 구분하고, 이명법을 사용하여 식물의 이름을 종과 속으로 나타내었다.
1737년 린네는 <자연의 체계>라는 책에서 분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종래의 방법보다 식물을 나누는 데 매우 편리하였기 때문에 발표되자마자 많은 학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유럽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그의 3대 저서중 하나인 1737년 <식물의 속>과 1753년 2권으로 된 <식물의 종>을 연속적으로 발간하여 분류학의 계통을 확립하였다.
린네의 분류법은 정적인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생물의 질적인 변화, 즉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기계적 자연관이 풍미하던 그의 시대를 대표하는 생물학으로 꼽힌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식물의 분류 방법은 더욱 다이나믹한 사고에 의해 진전되어 상호 발생과 관련성을 중시하는 자연 분류체계의 발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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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기술자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수력 방적기의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영국의 섬유산업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크라이트가 1769년에 특허를 얻은 기계는 종래에 이미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던 롤러드래프트 장치와 플라이어가 붙은 방차의 꼬기, 감기, 기구를 멋드러지게 결합한 것이었다. 이 방적기는 보통 수차로 작동했기 때문에 수력 방적기라 불렸다. 그의 방적기는 날실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공정을 연속화했을 뿐 아니라, 숙련공을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인력 이외의 동력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방적 산업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후 그는 방적 공정과 그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기계를 유기적으로 결합, 배치하여, 이런 기계들이 공통의 동력으로 구동되는 생산 체계를 고안해내었다. 그는 이런 체계에 기반하여 대규모 방적 공장을 각지에 설립하고, 이것을 직접 경영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산업혁명기의 대표적 기업가로 손꼽힌다.
한편 그의 독점에 반대하는 면업 경영자들이 그의 특허에 소송을 벌여, 그의 특허는 85년에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착상이 비록 남의 것이었다고 판정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용화할 수 있는 기계로 발전시켜 근대적 공장제도를 창시하고 성공적인 경영관리 등을 이룩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86년에 그는 기사 칭호를 받았고, 87년에는 더비셔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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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무렵 화학은 다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주로 영국의 화학자들을 중심으로 대기로부터 이산화탄소, 이산화질소, 산소 등의 성분기체들이 분리되고 그 성질들이 다양하게 연구되는 등 경험적 자료의 축적 면에서 상당한 성과들이 있었던 반면, 그런 자료들을 포함한 많은 화학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전히 플로지스톤 이론이 동원되고 있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말하는 플로지스톤은 어떤 때는 '비물질적 작인'으로 설명되다가 또 다른 경우에는 '물질'인 것처럼 제시되기도 하는 등 모호한 면이 있었고, 특히 금속을 태우는 실험에서는 결정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말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에 의해 상당 부분 바뀌었다. 그는 연소, 하소, 호흡 현상을 플로지스톤이 아닌 산소의 출입으로 설명하여 정량적인 실험 결과를 뒷받침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량적, 체계적인 실험과 일반화라는 태도를 화학에 뿌리내리려 했다. 나아가 원소와 화합물 사이의 구분, 더 기본적으로는 물질의 개념을 명확히 하려 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화학명명법 체계의 수립을 시도했다. 1789년에는 이런 성과를 담은 화학분야 최초의 교과서와 전문학술지도 나왔다.
흔히 '화학혁명'이라 부르는 18세기 후반의 이런 다소 급격한 변화과정을 거쳐 화학은 하나의 독자적인 전문과학분야로 자리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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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한 최초의 실험을 하였다. 이는 화학 혁명을 향한 극적인 첫 발이자 라부아지에에 의한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론의 폐기라는 의미를 갖는다.
18세기 내내 화학 전반을 설명해 주는 이론 체계였던 플로지스톤 이론은 16세기 의화학을 창시한 파라켈수스가 제창한 것으로, 1700년경 독일의 화학자 슈탈(Georg Ernst Stahl)이 체계화하였다. 플로지스톤은 모든 가연성 물질에 포함되어 있고 불에 탈 때 연기와 불꽃으로 빠져 나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금속은 불에 탈 때 산화하여 오히려 무게가 늘어나는데, 이는 플로지스톤 이론의 반박증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1772년 유황, 인 등의 화합물로 실험한 다음,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에 타는 물체가 공기를 흡수하고 또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가설을 발표하였다. 1774년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공기'의 독특한 성질을 인식한 영국의 기체 화학자 프리스틀리의 연구 등에 힘입어,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가장 활력있고 가장 순수한 요소'를 산소로 정의하였으며 계속되는 연구에 의해 물의 전기분해를 밝히고 공기 중의 연소 이론을 완결지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산소가 갖는 역할을 최초로 발견해 낸 것으로, 화학이 연금술에서 탈피하여 근대 과학의 한 분야로 정착되면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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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는 라이든 병이 발명되고, 천둥이 전기방전 현상으로 설명되는 등 전기현상에 관한 초기의 연구들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 점은 생리학이나 해부학 같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생체에 미치는 전기의 영향, 특히 전기충격이나 전기뱀장어의 충격과 같이 생체가 나타내는 전기현상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1791년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갈바니(Luigi A. Galvani, 1737-1798)는 실험실에서 개구리의 다리를 절개하다가, 개구리 다리의 근육신경조직을 두 가지 다른 금속 조각들에 접촉시켜 놓으면 개구리의 다리에 경련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당시에 전기 현상에 관심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류 현상에 대한 착상을 하게 하여 전기에 관한 연구의 방향을 크게 돌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해부학자였던 갈바니 자신은 이것을 동물전기 현상의 한 가지이며, 전기뱀장어처럼 개구리의 다리가 전기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시의 실험기술은 동물의 신경자극 같은 복잡한 현상의 전기화학적인 성질을 밝히기에는 아직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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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은 물체 사이에는 항상 인력이 작용하며, 그 크기는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 과학자들은 화학결합이나 전기적 힘에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것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실이 바로 쿨롱의 법칙이다.
원래 프랑스의 토목공학자였던 쿨롱(Charles Augustin de Coulomb, 1736-1806)은 전기를 띤 물체들 사이에 중력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전기력이 존재함을 보이고, 그에 바탕해서 전기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이것은 전기력에 대한 구체적인 수학적 법칙을 제시한 것에 머물지 않고 18세기에 널리 유행한 뉴턴주의(Newtonianism)를 더욱 강화하였다.
쿨롱의 법칙 자체는 이후 맥스웰 방정식의 한 가지로 수학적으로 더욱 정교화 되었고, 이는 전자기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이 법칙은 여러 전기 법칙을 이끌어 내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오늘날 전하의 양을 표시하는 단위로 쿨롱(C)을 사용하는데, 이는 전기력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쿨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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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아일랜드의 한 성직자는 구약성서에 나온 여러 사건의 경과 시간을 계산하여 아예 지구의 탄생 시점을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오전 9시라고 못박았다. 퀴비에(Cuvier)같은 생물학자도 대홍수로 전체 생물종이 바뀌었다고도 하였다. 교회의 논리가 과학에 적용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 출신 허튼(Hutton, 1726∼1797)은 1795년 <지구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지구의 지형을 조사한 결과 지구 표면의 구조가 서서히 단계적으로 변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썼다. 허튼의 주장은, 성경에 바탕하여 대홍수와 같은 급격한 지구활동으로 짧은 시기에 지구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기존의 수성론(nepunism), 또는 격변론(catastrophism)에 반대되는 화성론(vulcanism), 균일론(uniformitarianism)으로 불리었다.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 라이엘(Lyell, 1797∼1875)은 유럽과 북미에서 행한 지질 조사를 근거로 허튼의 주장을 더욱 확고히 했다. 라이엘은 지상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연 현상은 과거와 같은 속도, 같은 양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작용이 누적되어 큰 결과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지층 층위론(stratigraphy)의 창시자로도 불리는 라이엘은 지층 분석을 통해 지표에 가까울수록 현재와 유사한 생물 화석이 발견되는 것을 발견하여 지층에 따른 시대 구분을 하였다. 그 결과 지구의 나이가 적어도 수십억 년이어야 함을 보였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비글호 항해 중 라이엘의 책을 읽고 지구의 나이가 그토록 길다면 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허튼과 라이엘의 연구는 지질학의 발전 뿐 아니라 진화론의 탄생에도 결정적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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