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한 달 전 어느 학회의 발표회장에서 18세기 유럽을 휩쓴 여행 열풍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18세기의 조선과 일본에서 여행의 열기가 뜨거운 현상에 대해 흥미를 느끼던 터라 동시대 유럽에서도 그랬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호기심을 자아냈다. 우연히 서양사의 중요 사건을 요령 있게 소개한 ‘뉴턴에서 조지오웰까지’(랭어 엮음, 푸른역사)를 읽던 중 이 여행 열풍을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큰 사건으로 흥미롭게 설명한 글을 접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비싼값의 외국 여행을 통해 귀족 자제를 교육했으며, 고대문화의 유적지 이탈리아 여행이 유럽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그랜드 투어’라는 여행을 통해 유럽 전체가 세련미와 고상한 취향을 획득하게 되었고, 현대인의 외국 여행의 단초가 여기에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경이의 땅 이탈리아의 여행을 통해 유럽인들이 본 것은 바로 로마문화의 위대함이었다. 로마의 장엄한 역사와 문화에 매료되어 이 열풍의 대열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1737~94)도 들어 있었다. 기번은 20대 후반 18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로마의 유적을 구경하다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로마를 바라보는 벅찬 감격과 얼떨떨한 도취 상태의 체험이 후에 로마의 역사를 저술하도록 유인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내친 김에 영문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장의 하나라는 평을 듣는 기번의 로마사를 구해 읽었다. 마침 6권에 이르는 거창한 내용을 데로 손더스가 발췌하여 편집한 ‘로마제국쇠망사’(황건 옮김, 청미래) 개정판이 나왔다. 기번의 저서가 지닌 명성은 진작부터 알고 있어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동양 고전에 편중된 독서의 편식을 만회할 기회도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1400년간 이어진 대제국의 역사 가운데 트라야누스황제 시대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 400년간의 역사가 이 발췌본의 내용이었다. 읽어보니 기대 이상으로 흥미와 감동이 연속되었다. 특히 로마의 번영과 쇠퇴를 좌우했던 수십명의 황제들이 발산하는 매력은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고귀한 이상과 단호한 행동을 보여주는 황제가 있는가 하면, 극도의 타락과 사악함을 보여주거나 나약하고 무능함을 보여주는 황제도 있다.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교활한 음모와 살벌한 투쟁이 있는가 하면, 권력의 장악이 장난 같고 우연스러운 점도 있다. 아우구스투스황제 시대를 정리하는 중에 기번은 이런 말을 했다.

“로마 황제들의 연대기는 현대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호하고 복잡한 인간상을, 실로 강렬하고 다양한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군주들의 행동에서 극단적인 덕망과 사악함을, 인간의 가장 완전한 형태와 가장 비천한 타락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말은 로마 황제들의 실제 행적을 보면 거짓이 아니다. 악명 높은 네로나 콤모두스의 살육과 광기,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나친 관대함과 그 관대함의 우산 아래 숱한 남자와 부정을 행한 아내 파우스티나 등등 황제와 그의 가족, 그들을 둘러싼 숱한 인간의 톡톡 튀는 강렬한 개성은 허구의 문학이 제공하지 못할 개성을 발산했다.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장중하고 때로는 익살스러운 문장이 그 매력을 한결 더하게 만들었다.

로마사 여행을 통해서 고대의 환영에 잠시 빠져 있었다. 기번이 서로마제국의 붕괴를 개관하면서 “이 장엄한 변천은 현 시대에도 유용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강대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 통치자의 악덕과 미덕이 전 세계에 파란을 일으키는 21세기의 인류에게 로마는 여전히 생생한 역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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