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227일간 바다에 떠 있었다면?
한소년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무려 227일 동안이나, 그것도 벵골 호랑이와 함께 바다에 떠 있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사투를 벌인 끝에 살아남았다?
“뭐야, 이거? 동화야?”
누군가로부터 이 소설, ‘파이 이야기’에 대한 대략적인 줄거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저 동화 같은 모험담이려니 했다. 그러나, 첫 장을 펼친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가서 볼펜을 가져와야 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달아나고 싶은 이유가 뭐든, 미쳤든 아니든, 동물원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동물은 ‘다른 곳으로’가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밑줄을 그으며 나는 이 소설을 읽어나갔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을 경영하고, 파이는 동물원에서 동물들과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힌두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통해 우리가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지, 나무는 길을 안내하고, 길은 공기를 인식하고, 공기는 바다를 생각하고, 바다는 햇살과 모든 걸 나눈다는 것을, 모든 종교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성경을 읽고 이슬람식 기도카펫 위에서 기도를 하는 힌두교도인 파이. 이 아이에게 신은 어떤 삶을 마련해 주셨을까? 그 삶은 나를 구원해줄 거라 믿었던 선원들에게 붙들려 이미 구명보트로 옮겨 탄 하이에나의 먹이로 내던져지는 것이고, 부모를 잃고 인도산 벵골 호랑이와 태평양 한가운데 버려지는 것이고, 공포 속에 내몰리는 것이다. 공포는 생명을 패배시키고, 관대함도 없고, 법이나 관습을 존중하지도 않으며, 자비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접근해, 손쉽게 약점을 찾아낸다. 이성은 그 앞에서 나자빠지고 우리는 초조감에 끔찍해진다.
죽음과 공포, 슬픔과 충격 속에서, 언제든 파이의 목숨을 끝장낼 수 있는 맹수 앞에서, 파이는 허우적대고, 울부짖고, 끝장내고 싶어하고, 그리고... 자신의 뭔가가 생명을 포기하려 하지 않음을, 놔주려 하지 않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이 소설, ‘파이 이야기’는 단순히 침몰한 침춤 호의 유일한 생존자인 파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용기와 인내를 보여준 놀라운 이야기일 뿐인가?

▲ 2002년 부커상을 수상한 얀 마텔. | |
30만t급 유조선이 파이가 타고 있는 구명보트를 그저 스쳐지나가고, 파이가 거품 이는 물결 속에서 출렁이며 또다시 버려졌다는 아픔과 분노와 외로움을 곱씹어야 했을 때, 파이 앞에는 공포의 대상인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 맹수를 향해 파이는 순수하게 외친다.
“사랑한다. 정말로 사랑해.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그리고 이제 육지에 닿자 영영 사라져버린 맹수, 리처드 파커는 파이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호랑이와 227일간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파이는 묻는다.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 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파이가 말한 동물… 상실이었다가 공포였다가 길들여야 하는 대상이었다가 위안이었다가 사랑이었다가 삶의 이면으로 자취를 감춰버린 그 어떤 존재는… 어쩌면, 그가 거기 있다는 것, 누군가 그와 대화하고 싶을 경우에 대비해서 거기 있다는 것, 영혼의 문제든, 무거운 마음이든, 어두운 양심이든,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사랑으로 들어주리라는 것, 그가 맡은 일은 사랑하는 일이었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주고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분이었을지도….
희망이 점점 커져 당신 심장 안에서 노랫가락이 되어 흐르기를, 첫 햇살의 따스함 속에 감싸이기를 바라다면, 뭔가로부터 달아나는 대신에 파이의 구명보트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보는 것은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