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박경리 지음 / 현대문학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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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총체적으로서의 개체이며 총체느 개체로서 이루어지고 고리사슬에 엮여진 존재일 것입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고리사슬을 물어 끊으려는 모반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고리사슬이 풀릴 것을 두려워하여 합일을 치열하게 소망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역의 욕구와 개체에 대한 두려움에 보다 예민한 사람이라 해야 옳겠지요.-15쪽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공간의 확장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니 공간을 창조한다는 말이 적당하고, 작가는 문학적 공간을 확보하고 그곳에다 문학을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공간이 없다면 존재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
작가는 상황과 방식과 현상을 끈질기게 추구하지만 공간이나, 생명의 본질, 삶의 본질인 시간에 대해서는 질문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16쪽

문학 그 자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 없이 투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존엄성이란 자유를 이르는 것입니다. 어떤 무엇에도 사로잡히거나 굴종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대등한 평가야말로 존중하는 일이며 존중받는 일입니다. ... ...불우한 것이야말로 치열한 문학전신이 될지언정 처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18쪽

어찌하여 생존보다 뽐내고 호령하고 지배하는데 그처럼 수백, 수천배의 재물을 낭비하는지, 실체보다 어찌하여 허상에 그토록 정력적인지요. 사람은 모두 저마다 유혹에 빠지기 쉽고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문학은 그와 같이 인간의 욕망,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헤치고 부정을 하든 긍정을 하든 들어가보아야 할 분야입니다. 하기야 자신을 통하여 규명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허상임을 알리는 곳에 작가는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19쪽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방식이며, 상황이며, 형상입니다. 그것은 모두 시간의 껍데기지요. 나는 작가는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작가는 칠흑과 안개를 향해 왜냐고 묻는 사람입니다. 왜라는 질문이 없으면 문제는 없거나 종결되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문학도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엄연하게 생과 사의 상반된 것을 포태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문학의 골자로서 어떤 작품에서든 그 갈등과 모순, 운명과의 싸움은 전개되는 것입니다. ... ...문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하고 '왜'라는 질문 그 자체가 문학을 지속적으로 지탱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20~21쪽

옛날에 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한 사람들,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삶 속에서 이룩하지 못한 이상과 영원을 예술이라는 작업으로 재현하는 것, 이 경우에도 반드시 문학이나 미술이나 기타 예술행위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일이라 해도 좋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이라 해도 좋습니다. ... ...셋째는 알기 쉽게 말하면 속물의 삶이지요.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소설 속의 주인공을 모방하는 인생입니다. ... ...여러분들 중에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남을 모방하는 껍데기 소설을 안 쓰게 됩니다.-24~25쪽

문인인 사람이 작가를 보고 고독해서 어찌 혼자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나는 대답할 바를 모릅니다. 고독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참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좀 자주 고독해보세요. 고독하지 않고서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고독은 즉 사고니까요. 사고는 창조의 틀이며 본입니다. 작가는 은둔하는 것이 아니며 작업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도피하는 것이 아닌 작품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27쪽

여러분들도 자기 나름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자기 나름의 틀도 한번 짜보세요. 교본과 틀리다 해서 남이하는 말과 다르다 해서 갑먹을 필요는 없어요. 언제까지나 남이 만들어놓은 틀에 매달려있다 보면 창작의 길은 막혀버립니다. 보편성을 수립하면서도 창조는 늘 관례를 깨고 나가야만 해요.
... ...포크너는 "헤밍웨이는 성공한 작가이다. 그러나 나와 토마스 울프는 성공할지도 성공 안 할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사전에 없는 말을 쓸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 ...외국에서 무슨 이론이 들어오면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을 틀로 삼고 본으로 삼고 본으로 삼는 한국의 고질적 문화 풍토에 젖지 말고 가장 친숙하며 잘 아는 자기 땅의 것을 그리고 내 것을 만드는 데서 여러분들은 출발해야 합니다.

... ...작가는 생각 속에서 범람하는 사물을 이성과 정열로써 골라내어놓고 그리고 나서 말을 찹아나서는 것입니다.-40~41쪽

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 작가입니다. 현실주의자는 가시 밖의 것을,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그곳을 헤메어야 할 사람입니다.-55쪽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르포르타주가 아닌 이상 작가는 사실에 매달리면 안 됩니다. 근원적으로 창작이란 작가의 주관적 산물이니까요. 사실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작품도 어느 틀 속에 갇혀버리고 결국 진부한 얘깃거리가 되고 마는 거지요.
... ...
아까 문학을 위하여 기억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하고 말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작품을 쓰는 사람의 기억은 오히려 희미해진 편이 좋아요(내 경우는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격동기나 변혁기에는 좋은 작품이 안 나온다는 말이 있지요. 그것은 사실에 사로잡히고 사실에 집착하니까 그래요.
... ...남을 흥분시키려면 자기가 냉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의도니까요. 작품도 의도가 아닙니까? 의도는 감정하고 다릅니다. 목적이 있지요. 희극배우가 남을 웃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신은 울어야 합니다. 사감私感이 개입되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공평성이란 말을 했지요? 작가는 작품에 임할 때 기를 모으듯 공평성에 집중해야하고 자신도 그 공평성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거예요. 남에게 공평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공평하지 못하다면 작품은 찌그러지지요.-63~64쪽

여러분 중에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론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사로잡히면 작품 못 써요. 사는 것을 생각하세요. 끊임없이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자연과 모든 생명의 신비를 감지해야 합니다. 넓고 깊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그 속에서 이론이든 이치든 발견하십시오. 남이 간 길을 뒤쫓지 말구요. 대개 우등생이 작가로서는 시원치 않다는 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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