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연히 사고 지점 뒤에는 교통이 꽉 막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방향의 차량들은 왜 막히게 될까요? 미국의 예술평론가이자 사진비평가인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려하는 욕망 즉 관음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고와 상관없는 반대편 차선의 차량도 막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진에 있어서도 그녀는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다"고 직설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꼬집습니다. 그녀의 관찰에 의하면, 고통받는 육체나 잔혹함, 폭력의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타인의 고통은 일종의 스펙터클처럼 일회적으로 소비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전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폭력과 전쟁은 순식간에 매스컴을 타고 안방으로 전달됩니다. 그 폭력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현대인은 더 이상 사소한 폭력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좀 더 무서운 폭력과 잔혹함만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죠. 결국 현대인들이 이렇게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흥미를 잃게 된 것은 이미지의 과잉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밤 뉴스에, 아니면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이미지들입니다. 이미지의 과잉이 실재를 압도하고 있다거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의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가 건네주는 공포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고 하는 수잔 손탁의 분석에 한편으로 수긍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텔레비젼에서 생중계되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폭력의 현장이 매일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상관없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마어마한 고통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감정을 무디게 하고 결국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한 줌의 연민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말았을까요? 
저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보았던 사진들은 더 이상 지구 저편에서, 우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폭력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지는, 특권적인 지위에 있는 -직접적인 고통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의 관음증만을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사진은 그들의 고통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분노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미지의 과잉이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의 연민이 되살아나고 무관심을 극복하는 최초의 자극이 되기도 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