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읽는'블로흐의 꿈' 좇아 원고지 1만3000장 번역"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원서 1쪽 번역하는 데 평균 9시간을 들이는 고역이었습니다. 원고지 1만3000여장 분량을 번역하고나니 제 인생의 40대는 훌쩍 지나갔고 눈만 나빠졌습니다.”
총 5권 3050쪽에 이르는 20세기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문제작 ‘희망의 원리’(열린책들)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끝낸 박설호교수(50·한신대 독문학). 장장 14년에 걸친 번역이었기에 지긋지긋했던 지난날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여느 철학책처럼 개념과 사고를 배열하는 게 아니라 문학 건축 음악 미술 종교 역사 철학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난해한 용어나 내용들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적어도 한국적 맥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에 대해서는 상세한 해설이 불가피했습니다.”
도대체 에른스트 블로흐는 어떤 인물이며, 또 ‘희망의 원리’는 어떤 책이기에 한 학자의 황금기 ‘40대’를 송두리째 앗아간 것일까? 1885년 독일 루드비히스하펜에서 태어난 블로흐는 20세기 초의 대표적 지성들인 루카치, 베버, 브레히트, 아도르노 등과 친교를 맺으며 사상적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다.

▲ 14년에 걸쳐 독일 사상가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작 '희망의 원리'를 번역한 박설호 교수 / 김창종기자 | |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체의 교조나 교리를 거부하는 성격으로 인해 그에게서는 ‘이단’의 이미지가 강했다. 왕성한 지적 탐구욕을 가진 블로흐는 철학은 물론 정치경제학 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법철학 예술 등 전방위적으로 저술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대표작 ‘희망의 원리’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인 ‘아직 아닌 존재’를 구체화시킨 것이다. 즉 그는 이미 있었던 것을 총정리한다는 의미에서 ‘황혼에야 날기 시작하는 올빼미로서의 철학’을 거부하고 미래를 끌어들인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아직 의식되지 않고 있는 무엇’ 등에 관심을 쏟는 것도 그 때문이다.
“블로흐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프로이트는 현재의 의식을 과거의 것에서 구하려 한 반면 블로흐는 미래의 것(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엇)에서 찾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꿈에 주목했지만 프로이트의 꿈은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窓)인 반면 블로흐에게 꿈은 미래를 읽어내는 단서였습니다.”
꿈꾸는 철학자였기 때문일까? 현실 속 블로흐의 삶은 우여곡절 그 자체였다. 박 교수는 “현실에는 둔감한, 좀 꺼벙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대인이기도 했던 그는 1933년에 나치에 쫓겨 스위스로 망명했다. 1935년 파리, 1936년 프라하를 거쳐 193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48년 라이프치히대학의 초빙에 응해 동독으로 돌아가지만 ‘동독적 현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1957년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소련에 대해서 극찬을 했던 ‘사회주의자’ 블로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1961년 서독 여행 중 서독 잔류를 결심하고 동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튀빙겐대학에 자리를 구하게 된 그가 취임하면서 행한 강연의 제목은 ‘희망이 환멸로 바뀔 수 있을까?’였다.
2004년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블로흐가 소개되어야 하는 까닭에 대해 역자 박설호 교수는 “개인이나 사물 모두 변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어떤 사상가나 철학자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역동성과 개방성을 배울 수 있다”며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리 사회에 요즘 필요한 정신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