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논쟁사 100년으로 살펴 본 우리 역사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은 계간 역사비평이 통권 50호 기념별책으로 만든 책이다. 지난 1987년 9월 부정기간행물로 시작한 "역사비평"은 이듬 해 여름호부터 "역사종합계간지"로 새롭게 출범했다. "역사연구의 대중화와 새로운 역사인식의 정립"이라는 목표 아래 오늘날까지 우리 역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점검하고, 시대와 호흡하는 계간지로 중요도는 날로 더해가고 있다. "역사비평"은 2004년 가을호, 현재 통권68호를 발간하고 있다. 통권 50호라를 맞이한 지난 2000년 "역사비평"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의 역사를 조망해보는 기획을 준비했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논쟁사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개화파 사상과 근대국가 건설론"으로부터 시작해서 1970년대 이후 "박정희 신드롬"에 이르는 우리 사회의 논쟁들 가운데 주목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다룬다. 시대 구분에 의한 구분에 따르면 일제 식민지 시기, 해방 이후 1960년대, 1970년대 이후의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대충 헤아려 보니 56개 가량의 논쟁들이 각기 다른 필자들에 의해 다뤄지고 있는데, 한 논쟁당 할애하고 있는 지면이 200자 원고지 50매에서 60매 내외인 듯 싶다. 이 말은 이런 류의 책들이 지닌 기본적인 한계로부터 이 책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종종 한 명의 필자가 아닌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작업한 공동저서의 수준이 한 명의 필자가 집필한 책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부류의 책이 보다 좋은 책인가 하는 문제는 최종적으로 어떤 기획자, 어떤 편집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전적으로 달라지지만, 그 못지 않게 필자들의 고른 수준과 각기 다른 이야기가 어떻게 전체 기획 안에서 통합되는가에 따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논쟁으로 본 한국 사회 100년" 역시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문제점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얼마전 헌재의 판결에 따라 신행정수도 이전이 위헌이란 판결이 났다. 이 판결은 몇 가지 점에서 논쟁거리를 안고 있다. 성문헌법 국가라 해서 관습헌법의 존재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으나 어느 수준까지 관습헌법 혹은 불문헌법의 가치를 존중할 것인가를 놓고, 헌법재판소라는 사법부 기관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권한을 어느 수준까지 견제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신행정수도 이전 논쟁(?)만큼이나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어떤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논쟁이 없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지금 우리 사회가 과도한 논쟁으로 과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판국에 나는 한가롭게 과거 100년의 논쟁사를 들척이고 있었다. 일제 관변 학자들의 주도 이래 조선시대의 당쟁사는 사색당쟁이니, 망국당쟁이니 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선의 국력을 쇠망에 이르도록 한 원인으로 지탄받지만, 최근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 아닌 논쟁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조선 시대의 당쟁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한탄이 절로 든다. 최소한 조선 시대의 당쟁은 밑바탕에 철학을 깔고 있으며, 비록 상대를 역적으로 몰아 죽일 지언정 상대의 논리(학문) 자체까지 전적으로 부정한 예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헌재의 판결과 그로 인해 불거진 논쟁들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지난 100년의 우리 논쟁사가 압축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고 여겨진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논쟁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책의 44쪽에 실린 "개신교와 전통사상의 충돌"에는 일제하인 1920년대 우리 사회에서 불거진 기독교 토착화 논쟁을 다룬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공식 선교 활동은 1900년에 신약이 1910년에 구약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한글판 성서의 출현은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간 유교 경전에 부여되던 권위는 고스란히 성서를 대하는 신자들의 태도로 전이되고, 모든 신앙생활은 성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성서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은 이전까지 사용되던 신에 대한 전통 표기 방식인 "하느님"을 몰아내고, 숫자 "하나"에 "님"을 붙이는 우리 문법 체계에는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돌아가시다"라는 "죽다"의 높임말이 "자연회귀"와 같은 전통 사상을 담은 뜻이라 하여 "죽으시다"와 같이 전례없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데 이른다. 이와 같이 초기 개신교는 종례의 전통 사상과 대립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초기 개신교의 전례가 맞닥뜨린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료와 교육사업을 강화하는 간접선교방식을 채택하고, 이전에 도입되어 있던 가톨릭과의 차별화를 위해 "우상숭배"니 "정교일치"와 같은 비판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주된 타깃은 샤머니즘과 같이 정교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지 못한 토속 신앙에 대해 쏟아졌다. 유교나 불교와 같이 정교한 사상체계와 제도가 구비된 종교에 대한 공격은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웠던 반면, 전통 토속 신앙이었던 샤머니즘에 대한 공격은 무자비했고, 단호하게 실시되었다. "악마숭배"니, "우상숭배"니 하여 악마 척결을 당연시했다. 약한 상대에겐 철저히 강하고, 강한 상대에게는 그들의 철학적 기반, 사상 토대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의료와 교육과 같이 토착 종교 세력이 해줄 수 없는 것들을 대신하는 의료와 교육 등의 간접 선교 방식을 택한 것인데, 우리 논쟁사 100년에 두드러진 하나의 사례는 이렇듯 비타협적이고, 절대적 승부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논쟁으로 진행된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특히 성서에 수록된 모든 것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이르기 까지 모두 성령에 의한 것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축자영감설에 기반을 두고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현재 우리의 논쟁들을 보노라면 이렇듯 상대의 논리에 철저히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들을 엿볼 수 있다. 일방적 승리, 아니면 일방적인 패배만 있는 논쟁에서 논쟁을 통한 사회와 공동체의 통합을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은 "1920년대 중반 프로문학 논쟁"과 "일제시기 단군논쟁"을 살펴보도록 하자. 1920년대 우리 문학은 카프로 대표되는 프로문학과 비프로문학 사이에서 문학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프로문학진영과 비프로문학진영 그리고 이들을 통합해내려는 염상섭과 양주동의 소위 절충파 세 가지 입장이 충돌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보야 할 것은 이들을 통합해내려 했던 염상섭과 양주동의 견해인데, 이런 논쟁은 마치 훗날 벌어질 "순수와 참여, NL과 CA"와 같은 우리의 모든 논쟁들을 예견이라도 하듯 많은 요소들을 담고 있다. 염상섭은 프로문학의 계급, 사회운동과 비프로문학의 민족운동이 서로 분열되어 있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양자를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지향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일찌기 민족을 초역사화한 존재로 규정하는 민족주의에 반대했고, 프로문학이 계급을 강조한 나머지 민족문제에 무지한 것에도 반대했다. 만약 이것을 80년대 초중반의 NL대 CA논쟁으로 옮겨 놓으면 이런 말이 된다. NL의 민족모순이 계급모순에 우선한다는 주장은 궁극적으로는 우경화와 개량화의 위험이 있으며, CA의 주장은 현실과 괴리된 공리공론의 한계에 머물고, 현실을 무시한 좌경화는 결국 소멸의 위험이 있다는 말이 된다. 염상섭의 주장이 이 양자 사이의 통합을 통한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낙관론에 기댄 것이라면 양주동의 주장은 염상섭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양자간의 통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니 이 둘은 각자 병행과 협조를 통해 서로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NL과 CA의 논쟁이 NL과 PD의 논쟁으로 전이되어 가면서도 끝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한 끝에 1987년에 열린 잠깐의 틈에서 소멸되어 버리거나 급격히 우경화된 끝에 개량화된 비판적 지지라는 지리멸렬의 수순을 밟아 그들이 그렇게 목놓아 비판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 것은 우리 논쟁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즉, 논쟁의 중도 과정에서 끝을 보지 못하고, 어느 일방이 사라져버리거나 양측 모두 과거의 그런 논쟁을 추억으로 삼아 버리는 것으로 종료되는 것 말이다. 앞서의 프로문학 논쟁 역시 논쟁의 지속적인 결말을 보지 못하고, 해방 정국과 분단을 맞이하며 월북과 납북 등으로 소멸되어 버리고 말았다.
논쟁이 지속되지 못하고 지리멸렬해버리는데는 이렇듯 이념적인 차원의 문제, 이념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의 지리멸렬만의 문제만이 아닌 "일제시기 단군논쟁"과 같이 그 주체들이 민족모순에 갇혀 소멸되어버리거나 왜곡된 전례도 있다. "단군논쟁"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서로 다른 여러 층위의 대결 속에서 결말을 보지 못하고 현재진행형의 미로에 갇힌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우선 단군논쟁의 첫단계는 일제하 관변사학자들의 주장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단군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문제를 들어 단군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후세에 새롭게 창조된 전설상의 인물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최남선은 여러 증거를 대며 이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려 애썼고, 실제로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중도에 친일로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뒤이어 단군논쟁에 뛰어난 맑스주의 역사학자 백남운은 신채호와 최남선의 주장에 반대하며 단군신화는 문헌상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건국신화인 만큼 귀중한 사료이긴 하나 이를 실재화하거나 신비화하는 것은 계급을 합리화하고, 민족주의를 부각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백남운은 1947년 월북하였다. 이후 논쟁은 과거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선에서 반복되는 듯 보인다. 이렇듯 우리의 논쟁은 본의 아니게도 외부 여건의 변화와 논쟁 당사자들의 소멸 등과 같은 연유로 인해 중도에 멈춰버리고 마는 불철저한 것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논쟁이 드러내고 있는 것과 그 이면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김윤식 사회장 파동","정비석의 <자유부인>을 둘러싼 공방"과 "이승만과 한글간소화 파동",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논쟁들이 그것이다. 1922년 1월 21일 88세의 일기로 숨진 운양 김윤식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그의 죽음을 사회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한 동아일보와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입장이 엇갈리며 빚어진다. 3.1운동 이후 내부 분화되기 시작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이 문제를 두고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내부적으로는 서로의 입장이 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비석의 통속소설인 "자유부인"을 두고 벌어진 논쟁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은 문학의 윤리이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이야기거리를 숨기고 있다. 평남 양덕 출신의 법학자 황산덕은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 중이던 "자유부인"을 대학신문에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불과 5개월여 남짓한 시점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자유부인"은 당시 변화된 사회 분위기와 통속을 소설에 반영하면서 뜨거운 인기를 얻었다.
황산덕은 소설 속 한글학자인 장태연 교수가 양공주와 다를 바없는 은미(실제로는 양공주가 아니라 미군 부대 군속이었지만, 황산덕 교수는 구분 없이 모두 양공주라고 했다)에게 잠시나마 매혹당한 점과 그의 아내 오선영이 대학생의 품에 안겨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사건 묘사에 대해 "대학교수를 양공주에 굴복시키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는 "스탈린의 흉내"를 내는 작가의 고집으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공격한다. 1950년대 중반 무렵 한국사회의 이혼율은 0.27%, 댄스붐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사건이 터졌고, 부산 피난 국회에서 개정된 간통쌍벌죄 형법의 첫 고소사건이 있었다. 황산덕은 이런 윤리의 혼돈을 싸잡아 정비석의 "자유부인" 문제로 몰아부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황산덕의 시선이다. 이에 비해 전 해병대 대위였던 박인수는 약혼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모 대령에게 시집가버린 일에 충격을 받아 비행을 저지른 박인수 사건은 당시 사건 판사였던 권순영의 판결 "인생의 청춘을 향락하기 위해 스스로 제공한 정조를 법은 보호할 수 없으며 거기에 간섭해서도 안된다"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훗날 황산덕은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사건 때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권순영은 판사직을 그만 둔 뒤 재야 법조인으로 시국사범들을 변호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통속소설인 것은 분명하나 "자유부인"은 또한 사회비판풍자소설이기도 했다. 정비석은 논쟁 중에도 꿋꿋하게 소설을 썼고, 공무원, 국회의원들을 모두 비판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그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교수를 모욕했다고 황산덕을 발끈하게 만든 한글학자이자 교수 장태연이었다. 이선근 문교장관은 취임 2개월만인 1954년 4월 21일 느닷없이 "한글간소화방안"을 발의한다. 간소화방안의 내용인즉 '한글이 사용하기 너무 어려우니 복잡한 받침들은 열개로 통폐합하고, 어간을 무시하여 표기하도록 하자'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간소화의 기본 골격은 이승만 대통령이 소싯적에 읽었던 한글번역본 "신구약성서"의 표기 체계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즉, 대통령이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해온 탓에 우리 말과 글에 서투르니 대통령이 익숙한 한글 체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골자로 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서 그리고 있는 주인공 장태연 교수는 이에 맞서 국회 청문회에서 우리 한글을 사수하자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그의 춤바람 난 아내는 이에 감동해 훌륭한 남편에게 되돌아온다고 결말을 맺고 있다. 정비석의 통쾌한 풍자가 빛을 발하고 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이승만 대통령은 끝끝내 자신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정부만이라도 간소화된 한글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1국가 2문법 체계를 갖추자는 웃지못할 제안은 결국 대중의 무관심과 반발 속에 8년만에 사그라들었지만 결국 그는 한글 신문을 잘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통치가 말기로 갈수록 점차 귀머거리가 된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신드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박정희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게 된 것은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여전히 과거의 박정희식 모델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제 성장의 주동력을 여전히 과거의 성장모델에서 찾으려 하는 전근대적인 방식에 머물고 있는 탓에 그렇다면 차라리 예전의 박정희가 낫지 않은가 하는 시대착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논쟁에는 그 이면에 다른 의미를 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시 현재의 문제로 돌아와 행정 수도 이전이란 어찌 보면 절차상 전혀 문제가 없는 이것이 헌재의 심판을 요구받고, 한쪽에서는 결사반대를 다른 한 쪽에서는 찬성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행정 수도 이전이 단순히 행정수도이전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에 대한 감정적 반대,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이 느끼는 극단적인 위기감이 한데 결합하여 표출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헌재의 문제점이나 절차상의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논쟁의 핵심으로 보이나 그 이면에는 위와 같은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다. 이렇듯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은 오늘의 우리 현실을 되돌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이며, 과거의 논쟁이 현재에 와서는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 내용에 따라 읽기 쉬운 것들도 있고, 다소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들도 있으나 두루 살피다보면 우리의 근 현대사의 면면을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논쟁이 아니라 논쟁의 결과 도출된 합의와 그에 따른 승복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