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지고 강물 흘러 | |
이청준은 기억의 저편에서 길어 올린 추억이나 인간사의 뒷면을 한 올 한 올 스웨터 짜듯 직조한다. 몇 해 전 25권의 전집을 묶어내고서도 중단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고 있는 그는 글의 장인(匠人)이다.
이번 소설집에 담긴 6편의 단편에도 시대의 유행이나 지배적 문학 조류에 상관없이 진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글이 맛깔스럽다.
표제작 ‘꽃 지고 강물 흘러’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힘들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온 형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는 일을 두고 ‘나’와 형수 사이에 형성된 은근한 갈등 기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남아 있는 집을 처리하는 문제와 겹쳐진다.
어머니는 30대 청상 과부가 되어 신산한 삶을 살아온 형수의 집안일을 도와주었으나 치매가 생기면서부터는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다. 서로 믿고 의지하던 고부 관계는 갈라지고, 어머니를 향한 형수의 타박이 심해진다.
장례 후 ‘나’는 고향 산밭에서 만난 형수로부터 “어머니와 함께 콩밭 걷이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형수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형상을 발견한다.
어머니는 살아있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나 형수의 마음을 잡아준, 보이지 않는 끈이자 의지처였던 것이다. 한때 형수에게 품었던 원망은 사라지고 이제 환갑을 넘어 늙어가는 형수가 편히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심경을 갖게 된다.
항상 ‘조연’으로만 머물고 있던 형수 이야기는 ‘오마니!’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변주된다. 단역 배우로 영화판에서 밥을 먹는 문예조는 ‘어머니의 생애’를 테마로 한 가족 영화에 사용할, 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들려준다.
그의 형수는 일본군 강제 지원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형의 유복자를 낳았으나, 어머니는 형수를 타박으로 일삼고 예조씨는 형수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는 열여섯 살 때 젖줄이 터지지 않는 형수의 불은 젖문을 빨아 젖문을 열어주었던 사연을 들려준다. 그 시절 형수에게서 어머니의 품내를 느꼈던 그가 몇십년 만에 부르는 “오마니!” 소리는 형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이런 애절한 사연을 들려주는 작가는 “이런 얘기가 있는데 들어보시라”며 독자들을 환기시킨 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문턱’은 소설쓰기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학창 시절부터 주인공에게 소설거리를 얘기해주며 소설을 써보라고 부추기는 친구가 있었다.

▲ 이청준은"살아있는 삶의 정보 자율체라 할 소설은 그 정보의 선악과 유용성을 가려내는 검색 기능으로 여전히 유용하다. 그런 믿음 위에 소설을 쓴다"고 말했다. | |
그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소설을 응모했으나 떨어진 주인공은 오기로 10여년에 걸쳐 계속 소설을 투고하게 된다.
그러던 중 사업을 같이 하던 동창의 배신감을 못 이겨 하던 그 친구는 뇌일혈로 죽고 만다. 주인공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그 친구의 죽음을 다룬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주인공은 친구의 죽음을 자기 소설이 세상과 만나는 문으로 해석한다. 그 친구는 왜 그런 식으로 살다 그렇게 갔는가? ‘그 알 수 없음의 화두야말로 우리 삶과 문학의 영원한 유예의 수수께끼, 숙명적 비의의 문이자 어쩌면 우리 삶 자체일지도 모르니까’(176쪽).
이청준 문학을 이해하는 열쇠로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심부름꾼은 즐겁다’와 ‘무상하여라?’는 이청준 문학에서는 보기 힘든 현실 정치비판 소설이다. 물론 풍자적인 필치와 뒤틀어보기를 통해서다.
‘심부름꾼…’은 지난 몇년 동안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끈 불법 정치 자금 수수를 둘러싼 배달 사고를 소재로 삼았다.
‘무상…’은 정치지도자와 얼굴이 닮은 한 출판사의 영업과장이 그 사람의 행세를 해나간다는 것을 유머스럽게 펼쳐보였다. 정치와 인생을 보는 작가의 성숙하고 여유로운 시선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