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밥헬퍼 > 사람만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책을 다시 읽는다. 지난 책들은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반추하게 한다. 그의 책은 이미 절판되었고, 그의 삶은 그의 말처럼 제대도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 주변에 여전히 그가 제시한 말들이 뿌리를 내리고 일어나고 있다. 그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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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97년 노동시인 박노해는 자신의 옥중에서 집필한 글들을 모아 “사람만이 희망이라”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당시 그의 시는 현실을 고뇌하면서 그 굴곡된 상황을 사실적 언어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극찬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수환추기경은 그의 들을 평하면서 그에 대해 ‘이제는 그가 외부를 향한 외침보다도 내면의 자기와의 투쟁으로 전환하면서 인간적 고뇌를 담지한 겸손한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시 2편을 먼저 읽어보려고 한다.
<다시>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은 사람은
그 자신의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변화 속에서>
사람은 세월이 쌓여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을 때 늙어가는 것이다.
이상도 하나의 생명이라서 계속 성장시키지 않으면 죽고 만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세월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거친 세월이 흘러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사람은
변한 세월만큼
변화의 빠름과 크기만큼
치열한 자기 변화를 이루어내서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굳건히 지켜가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세월이 쌓여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을 때 늙어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가슴벅찬 감동을 가지고 두고두고 되새겨 보았던 기억도 있다. 그의 글들은 사실 그 막강한 힘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처럼 그의 글들이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운동력을 담보해낼만큼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 읽으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고 되새겼던 것은 ‘도대체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과연 이 시대는 사람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는가?’하는 것에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주제인 듯 하다.
2.위에서 잠깐 읽어본 두 시에서 공통적인 것은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더불어 ‘사람’안에 담겨진 위대한 가능성에의 찬사이다. 시인의 마음 속에 그려지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 자기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희망의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희망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자기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시인이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는 이상적 자아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이 땅의 모든 문제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실존적 자아이다. 바로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에 가득찬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의 희망 그 자체가 될 수 있으며 길 찾아 떠나는 사람은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길의 개척에 이른 것이다. 첫 번째 시에서 시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다시’라는 용어이다. ‘다시’라는 말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존재로 전환할 때 갖게 되는 기대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움‘을 향한 의지를 담은 결단의 표현이다. 또한 그것은 안으로의 굴곡이 아니라 밖으로의 지향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다음에 우리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언어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그가 바라보는 희망은 밖으로의 지향이 아니라 인간 내면으로의 회구인 것이다.
시인은 지금 인간 내부로의 회귀를 통해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려고 시도한다. 또한 시인은 존재하는 인간에게서는 희망이 없음을 선언한다. 그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희망 찬’ 마음을 가지며, ‘길’을 찾기도 하고, ‘참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시집에서 읽은 두 번째 시에서는 시인이 추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사람은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자신을 꿋꿋이 지켜 변하지 않는 것을 굳게 지켜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제시하는 방법론이다. “변한 세월만큼/변화의 빠름과 크기만큼/치열한 자기 변화를 이루어내서”라는 것. 즉 이 시대의 변화에 그저 파묻혀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을 항상 변화시켜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며, 다시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로 그러한 사람만이 희망일까?를 생각해 본다. 어느모로 보나 기댈 것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희망이 없는 것일까? 우리 주변만 돌아보더라도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서로 앉겠다고 아우성치며 이전투구하는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땅의 정의와 억눌린 자들이 삶을 대변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 던진 그들에게 희망이 쉼쉬고 있는 것일까?
마음을 추슬러 그의 시들을 다시 읽어본다. 시인은 희망을 걸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을 제대로 간직하기 위해 자신을 늘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시인의 전력을 생각해 볼 때, 아마도 자신과 같이 투쟁의 선봉에 선 사람들,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부정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싸움의 주체인 민중들에게 이러한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그들의 강철같은 의지가 불변의 세계를 지탱할 것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본다. 결코 변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지……
그런 점에서 이 시들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결정적 한계는 불변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켜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늘 푸른소나무인 것 같다. 그러나 늘 푸른 소나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땅에서 변해서는 안 될 것을 막연히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를 비추어 보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3.나는 여기서 다시’ 구약성경을 읽는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40-55장은 구약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심판과 멸망에 직면해 있는 이스라엘에게 제2의 출애굽을 통한 ‘다시’ 살아남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락 속에는 먼 옛날 출애굽을 회상하는 것과 하나님의 창조사건이 새롭게 기술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처음으로 신학화되는 순간이기도하다. 이러한 서술은 하나님의 이 땅의 주인이시고 온 세상 역사의 주관자라는 ‘경험적 사실’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여 선포하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특수한 선민의식을 자랑할 수 없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온 우주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규정될 뿐이다. 이스라엘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이 변하지 않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역사 속에서 선포한다. 이러한 자의식의 결정적인 내용이 가장 함축적으로 이사야 40장6-8절에 소개되어 있다. 그 본문은 이렇다.
<6절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7절 주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고 그 답을 찾는다. 그들은 더 이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들 속에 영원토록 삶을 지탱할 힘과 지혜와 능력을 독점하듯이 주어져 있지도 않다. 그들은 다만 풀이며, 꽃이다. 만약 하나님의 기운이 바람처럼 불기만 한다면 곧 스러질 그런 풀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그 내용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서술하고 있는 말들이 절묘한 문학적 기법을 통해 말의 의도가 아주 논리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6절의 ‘모든 육체는 풀의 꽃과 같다.’는 것과 7절의 ‘이 백성은 풀이다.’ 그리고 8절에서 선언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구절은 일정한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요한 특징은 바로 6-7절과 8절의 대조라는 것이다. 그 대조의 내용은 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에게 대조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동동한 창조물이라고 스스로 우쭐되었던 인간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조되는 존재임을 다시 일깨우게 된 것이다.
성경의 의미를 올바르게 추적하는 것은 인간은 마르고 시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과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두 표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궁극적으로 부여잡고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나아가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가변적 선언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희망이다.’ 라는 불변적 선언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한 방향을 보게 할 것이다.
즉 이사야의 선언과 시인의 말이 궁극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자리는 바로 변하지 않는 주체를 설정하는 것이다. 시인의 말 중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은 변할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현실 중에서 스스로를 변하지 못하도록 제어해야 하는 것을 노래한 반면 이사야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즉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선언을 노래한다. 시인이 인간의 의지에 강조점을 둔다면, 이사야는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변화되지 않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읽을 때 우리는 이 말이 제한적 진리를 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변하지 않는 ‘말씀’의 온전한 대리인으로 ‘다시’존재할 때 비로소 거기에 희망을 가져도 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곧 희망찬 인간이 되도록、또한 길을 찾아가도록, 늘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면서 희망의 주체로 등장해야 할 것이다. 변하지 않는 말씀을 담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모든 것이 희망없는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들에게는 더욱 희망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약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연약하다고 인정할 때 가장 강하고 놀라운 존재로 ‘다시’ 서게 되는 것이다. 그 안에 진정한 ‘힘’과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고서 말이다. 시인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서 간직하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살아가며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