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톨트 곰브로비치 장편소설 | 윤진 옮김 | 민음사 | 464쪽 

성숙과 미성숙, 완성과 미완성의 대치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해온 폴란드 작가 곰브로비치<사진>의 대표작으로,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에 의해 금서로 묶여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50년대 이후 프랑스에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실존 철학과 소설의 만남을 추구한 작가는 카프카와 견줘지며 현대 문학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폴란드 하원은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4년을 곰브로비치의 해로 정하고 연극제와 음악회을 비롯한 행사를 열고, 기념포스터와 우표를 제작하는 등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소설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과 모든 계획이 무가치하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서른 살의 작가인 주인공이 한 교사에게 납치되어 열여섯 살 소년들의 세계로 돌려보내지면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머릿속은 어른이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로 납치되어 성장기를 다시 겪는다는 설정은 환상소설이자 성장소설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실제 세상에서는 일어날 법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을 제시하는 작가의 전략은 무엇일까? 열여섯 살로 다시 돌아간 소설가의 눈으로 본 세상은 성숙과 미성숙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성숙의 세계는 미성숙을 형식의 껍질 안에 숨겨놓고 싶어한다. 미성숙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작가는 소년의 시신을 통해 성숙한 세계, 질서 잡힌 체계의 허구성과 폭력성,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소년 시절로 납치되어 돌아간 교실은 ‘순진함’을 주입시켜 모두를 어린애로 만드는 것을 교육철학으로 삼고 있는 학교였다. 미성숙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주된 내용은 성인들의 틀, 정상인의 기준, 기성의 체계를 강요하는 시스템일 따름이다.

불합리와 폭력으로 특징 지어지는 성숙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미성숙의 자유로운 힘을 캐치하는 것이 이 소설의 감상 포인트다. 작가는 성숙이 미성숙을 끊임없이 지배하고 통제하려드는 것은, 미성숙한 존재들의 반항은 성숙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은 에로스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육체의 각 부분의 길항작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머리는 명령하지만, 엉덩이, 넓적다리, 장딴지의 아우성도 들린다. 특히 엉덩이는 미성숙의 근원, 코흘리개 애송이들만 갖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갑자기 소년 시절로 돌아간 주인공은 정돈된 어른의 세계에 잠입하여 질서를 전복시키는 젊음의 힘을 발산한다. 그 세계는 큰 것은 작아지고 작은 것은 기괴하게 커지는 부조리한 세계, 한마디로 기존의 사고체계나 가치가 뒤죽박죽되는 혼돈의 세계다. 작가는 이를 통해 진실함과 성숙됨의 참된 모습을 모색한다.

“정상이란 비정상의 심연 위에 늘어뜨려진 곡예사의 줄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적인 질서 속에서도 언제나 광기가 섞여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을 무력화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단초를 선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점에서는 ‘망치의 철학자’로 불리는 니체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시작할 때는 내 적수를 누를 만한 날카로운 풍자 정도나 써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쓴 말들은 순식간에 격렬한 춤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고, 제멋대로 사납게 날뛰면서 그로테스크한 광기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갔다”고 회고했다.

이 소설의 제목도 아무 뜻이 없다. ‘페르디두르케’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즐겨 읽은 미국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작품 ‘배빗’의 등장인물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작품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 자체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장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려는 작가의 ‘비틀어보기’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나를 따라 달리라. 낯짝을 두 손으로 감싸고 도망가는 내 뒤를 따라 달리라. 이제 끝이다. 트랄랄라. 이 책을 읽을 사람한테 한마디하자. 제기랄!”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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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25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붙잡고 싶게 만드는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