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옥한흠
옥성호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부자의 관계는, 부전자전의 관계  

우선, 저자 옥성호 씨를 뭐라고 불러야할까? 그는 이미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를 통해 기독교내에서는 알아주는 저술가 되었다. 나는 아직 그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책은 오늘날의 교회에 가차없는 비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공식직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교회평론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아버지 영정에 바치는 '사부곡'을 썼다.  아버지 옥한흠과 아들 옥성호의 관계는, 작년 9월초 옥한흠 목사님이 작고를 하면서 그를 추모하는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그러면서 저자의 이런 가차없는 성정이 과연 누구에게로부터 왔을까를 생각해 볼 때, 그건 확실히 아버지 옥한흠 목사에게서 그대로 나왔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옥한흠 목사님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빈틈이 없고, 때론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기도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그의 하는 일에 자신의 성정이 스며있는 법이다. 그분은 한마디로 타협을 모르는 꼬장꼬장한 어른이시다. 오늘 날, 부드러움과 유연함, 융통성, 타협, 관용 등이 요구되어지는 세계관에서 그것은 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인가? 정말 비타협적이고, 융통성없는 인물로 낙인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은 항상 옳은 것만을 외쳤다. 잘못되었으면 잘못됐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이건 또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듯한 세상에서 얼마나 청량제 같은 구실을 하였던가? 

하지만 그분의 그런 성정이 가족과의 관계에서는 역시 쉽게 받아드려질만한 건 아닌듯 싶다. 그런 성정을 아드님들이 그대로 이어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고슴도치 같은 것이 되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나는 옥함흠 목사님 타계 직후 모 잡지에 나온 추모글을 읽는 가운데, 그분의 세 아들 중 하나가, 그분의 저서 중 하나인 <예수 믿는 가정 무엇이 다른가?>란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아버지는 이런 책을 내실 자격이 없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사역 가운데 바빠 가정을 돌볼 틈이 없으셨던 분이셨기에 아들 역시 아버지를 닮아 둘러 말할 줄 몰랐나 보다. 그러니 목사님으로선 얼마나 큰 아픔이었을까? 우리네 같으면 그렇게 고생하시는 아버지가 있다면 속은 어떨지 몰라도 인정상 위로를 했을지 모를 일인데 말이다. 그러기에 같은 극끼리는 통하지 못한다고 했는가 보다. 하지만 또 그런 아버지의 성정을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세상에 나가선 아버지 같이 그 역할 그대로를 닮아 살게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두고 부전자전이라고 하는 것일게다.  

아버지의 삶을 말한다는 것에 관하여

이 책 초두에 보면, 저자가 이 책을 써야했던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의 소천 이후 주위에서 그런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만 글을 썼던 것은 아니다. 저자로 하여금 좀 더 쓰지 않으면 안 될 강력한 이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에 대해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프랭크 쉐퍼가 쓴 Crazy for God를 읽고 나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프랭크 쉐퍼는 저명한 기독교 철학자 프랜시스 쉐퍼의 아들이다. 프랜시스 쉐퍼가 말년에 림프암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아들 프랭크는 아버지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미술에 재능은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그림을 그만 둔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아버지에 관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그렇게해서  쓴 게  Crazy for God이고,  그것은 어찌보면 저자와 그의 아버지 옥한흠과 비슷해 보인다.  

프랜시스 쉐퍼는 아들의 미술적 재능을 높이 사 늘 그림을 다시 그리길 바랬지만, 자신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 아들에 대해 늘 마음 아파했었다고 한다. 옥한흠 목사 역시도 살아생전 아들의 책을 읽으면서 목회의 길을 가게 되길 바랬지만, 그것을 따라주지 않는 것에 늘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 프랭크가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해 아버지의 병실을 하나의 갤러리로 만들었던 것처럼, 저자 역시 옥한흠 목사의 임종을 앞두고 목회의 길을 갈 것과 아버지의 삶에 관해 쓸 것을 다짐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삶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떤 의밀까? 모르긴 해도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 두려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평범치 않은 삶을 사시고, 사회의 존망을 받으셨던 분이며 더구나 당신 자신에 대한 일체의 기록(옥한흠 목사님은 자신에 대한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나마 있던 몇 권 되지 않는 일기조차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삶을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저자의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했다. 앞으로 아버지의 평전을 누군가 쓰게 된다면 그것에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쓴다고.  

인간, 옥한흠             

옛 속담에, '될성 부른 나무 떡닢부터 알아 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꼭 그 사람의 성공을 점칠 때만 쓰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건, 어디에 될성 부르냐는 것인데  인간 옥한흠은 확실히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에서의 될성 부른 떡닢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 살아생전 가톨릭에 일정 정도 호의적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마더 데레사 수녀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인도에서 삶을 헌신한 테레사 수녀에 대해 존경을 넘어 일종의 열등감 내지는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89p)  그만큼 인간 옥한흠은 자신이 한 가정의 가장이고, 교회와 교단을 대표하는 중책을 맡은 것에 대해 늘 부담스러워 했다는 말도 될 것이다. 마더 데레사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옥한흠 목사의 사후 그의 삶을 증언하는 다른 글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름과 그에 헌신하는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아버지의 장례 때, 아버지를 가리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고백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나이와 상관없이,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늘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때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솔직했던 바로 그 점 그리고 그 점을 채우려고 어린아이와 같이 노력하는 모습  때문이라고 했다.(94p)  

목사, 옥한흠  

옥한흠 목사님은 자주 강단에서 자신의 이름의 뜻을 설명하시곤 했다. 물론 원래 가지고 있는 함자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누구도 동명이인이 되는 것을 선뜻 허락하지 않을만큼 독특하기도 하다. 그런데 목사님은, 한없이 흠이 많은 사람을  하늘 나라에선 옥에 티 한 점없이, 흠없이 들어 사용하여 주셔서 옥한흠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풀이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하나님이 자신을 분에 넘치도록 사용해 주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에겐 얼마나 못 믿을 말이고, 귀에 거슬리는 말일지 짐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신됨을 증명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비워 자신의 자신됨을 증명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확실히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독특한' 인생관일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으로 유명하고, 평생 그것을 목회철학으로 삶아 목회를 하신 분으로 유명한데, 그것 말고도 그분에겐 평생 짊어지신 십자가 있었다. 그것은 사분오열 갈라진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를 하나되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골이 깊고 치유 불가능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때문에 그분은 오래 전부터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를 창립에 교회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셨다. 또한  지난 2007년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 설교에서, 이미 암에게 자신의 폐가 점령 당하도록 내어준 상태에서 그는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설교했고, 기도했다. (114p~115p)  

그분은 제자훈련을 너무나 열심히 한 나머지 건강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변절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그에 대한 스트레스로 몸을 해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매번 설교에 자신의 모든 진액을 쏟아 붙곤 했는데, 그가 정년보다 일찍 퇴임을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설교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을 목회의 길로 내어 보내려고 하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호야, 목회자에게 필요한 건 딱 하나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하고,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목사는 딱 두 종류가 있다. 은혜를 아는 목사와 은혜를 모르는 목사다. 은혜를 알아도 은혜를 깊이 라는 목사와 피상적으로 아는 목사로 또 나눌 수 있다. 은혜를 모르는 목사가 설교를 하면 그럴듯하기는 한데, 그 설교는 결코 듣는 사람의 영혼을 때리는 울림이 없다. 성령의 감동이 없다. 너는 그런 설교가 어떤 것인지 가장 잘 알지 않니? 그게 바로 은혜의 차이 때문이다.(82p) 

 
   

  한마디로 은혜를 알고, 은혜를 끼치는 목사가 되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항상 교회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고 있는 것에 의문을 가졌고, 걱정을 했다. 원래 제자훈련이란 게 사람이 많아서 좋은 성질의 것이 아닌데, 사람이 이렇게 많아져 버리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할 수 없다고 걱정을 했던 것이다.  

옥한흠 목사님이 숨을 거두시기 직전, 아들과 나눈 필담에서(인공 호흡기를 찬 상태였기 때문에)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묻자, 그분은 힘들게 칠판에 쓰셨다고 한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즉 그가 평생 사랑하던 교인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목회자 옥한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옥한흠    

사실 일개의 교인으로서 나에게 그분의 이미지는'근엄함' 그 보다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감히 그분 곁에 다가설 수 없고, 그분의 그림자조차도 차마 밟을 수 없는 그런 분으로 인식된다. 그런 목사님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소나마 편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분도 한 가정에서는 천상 아버지였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소 엄한 아버지.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은 딸 보다 기가 세다. 그런 아들을 슬하에 셋씩이나 두셨으니 보통 엄해 가지고 되겠는가? 더구나 명망있는 집안의 자제들이고 보면 그 이름에 누가 될까봐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의 세도에 반기를 드는 자식은 어느 집이나 다 있다. 공교롭게도 옥 목사님에겐 큰아들 ,바로 이 책의 저자였는가 보다. 저자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를, 삼형제중 자신이 가장 공부를 못했으며, 아버지의 속을 가장 많이 썩혀 드렸다고 고백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성정을 가장 많이 닮았기에 가장 많이 아버지를 안타깝게 해 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가장 가깝게 또 가장 깊이 이해하는 아들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책 면면을 살펴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사안을 가지고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는 것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런 것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걱정하는지를 볼 수가 있다.  자식의 기를 살려주겠다고 무조건 잘한다고 박수만 쳐주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오늘 날의 아버지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잘할 땐 칭찬도 해 주지만, 그 칭찬 뒤엔 뼈있는 조언, 엄한 훈계도 엿보인다. 무엇보다 저자의 비판적 성향은 분명 아버지에게서 나왔을 터.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고 보면 아들의 이런 자세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야를 가지라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건, 중학교 시절 저자가 공부에 흥미를 잃고 방황하고 있었을 때 매번 아버지에게 꾸중과 잔소리만 듣던 중 한번은 그런 질문을 하셨다고 한다. "성호야, 이 아빠한테 사랑의 교회가 중요한 것 같니, 아니면 네가 더 중요한 것 같니?" 이에 아들은 교회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성호야, 아빠는 너를 위해서라면 사랑의 교회도 포기할 수 있어." (123p~124P) 같은 교회 교인이라면 섭섭할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가 중학교의 나이었다면 목사님의 목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고 한창 바쁠 시기였을 때 과연 목회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내가 그분의 아들이었다면, 난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분은 결코 허언을 하시지 않으시거니와 난 그분의 아들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어찌 그 아비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과연 아버지의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읽을 때야 비로소 옥한흠 목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도 세차게 불었다. 

                   

이 사진은 저자가 영정사진으로 고른 사진이라고 한다.  저 사진을 골랐을 때 한 소리 듣기도 했었나 보다. 저자는 독자에게 이 사진을 자세히 보라고 말한다. 이 사진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웃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울고 있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울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으며, 웃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저자 역시도 이 사진은 울고 있으면서 동시에 웃고 있는 사진이라고 말했다.  평소 사진 찍기를 즐겨하셨던 목사님이셨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상당한 수준급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분은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지만 백 퍼센트 만족한 사진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카메라의 렌즈에게 그만 자신의 본질을 그대로 노출하고 말았다고 한다.(171p) 그렇다면 저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되야하는 건 마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분 한 평생의 삶이 저 표정속에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눈을 감으시던 날 새벽은 바람이 몹시도 세차게 불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그날 태풍의 여파로 그런 것이었겠지만, 그날 하나님이 그분을 데려 가시기 위해 그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어댔나 보다고 우리들은 말했었다. 마치 선지자 엘리아처럼.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는 그 다음 날 조문을 위해 저 영상사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진은 따로있다.  바로 이 사진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그분의 사진 중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지금쯤 천국에선 저렇게 환하게 웃고 계시겠지.  

지금까지 책을 보다 울어버린 책은 고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란 책과 이 책이다. 앞의 책은 고인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 울었다면, 이 책은 고인이 너무 그리워 울었다. 그리고 공통점은 내가 이 분들이 살아계실 땐 관심없다가 작고하고나니 마음이 가는구나 싶다. 이제 내 인생에 있어 가급적 후회를 남기지 말고 살자 했는데 또 후회를 남기고 만다. 언제쯤 나는 똑똑해지려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비교적 얇은 책은 책이다. 옥한흠 목사님의 삶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좋아하는 나로선 이 책은 도무지 성에 안 차는 책이다.   아무리 아들이라하여 겸손하느라 그런다고는 하지만 책도 언제 다 읽었을까 싶게 다 읽어버렸다. 아쉬운 일이다. 이제 저자는 교회를 평론하는 일에서 아버지의 바람대로 목회의 길을 기기위해 신학교에 들어간 모양이다. 이 모습을 아버지가 천국에서 지켜 보고 얼마나 대견해 하셨을까? 당신은 참 좋은 아버지를 두셨다고 저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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