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맹세 위로 덮치는 망각과 세월의 함정
루이스 세풀베다 소설집 '외면'
권미선 옮김/ 열린책들/ 318쪽


▲ 루이스 세풀베다 소설집 '외면'
참희한한 것은, 우리들의 사랑의 기억들이 대개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서야 망각의 밤을 딛고 살아나온다는 사실이다.(297쪽) 순수한 언어의 침묵들로 축조된 오랜 세월의 심연을 건너야만 비로소 사랑의 힘이 세워 놓았던 낡은 인생 계획표가 연인들의 눈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정을, 흐르는 시간을, 사랑을, 그리고 자기자신’(목차)을 ‘외면’(책 제목)해 왔는지 세풀베다가 조용히 독자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비밀의 문을 열어 보인다.

이 책에는 모두 27편의 작은 이야기들이 묶여 있고, 그것들은 다시 다섯 덩어리로 나뉘어 있다. 그중 세 번째 덩어리가 ‘사랑을 외면하다’이고, 그 속에 ‘솔로르사노 부인에 대해 말해주마’라는 짧은 소설이 들어 있다. 길이는 짧지만 커다란 울림으로 생의 복판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작품이다.

아마도 칠레 출신 문인(저자 자신)일 것으로 추정되는 ‘나’는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체코 시인)의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하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증기 기관의 역사’라는 스페인어 책을 발견한다.

모국어로 쓰여진 책이라는 단순한 반가움에 책을 훑어보던 나는 그 책의 소유자였던 사람들이 책 앞장에 파란 잉크로 휘갈겨쓴 개인 메모를 보고 깜짝 놀란다. 흔히 책을 선물할 때 적곤 하는 메모인데, ‘이 책을 헤나로 블랑코에게 바칩니다. 우리를 이어준 모든 것과 그의 꿈을 기리며. 필라르 솔로르사노 드림. 1909.8.15’라고 돼 있었던 것이다.

블랑코는 ‘내’가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가 데리고 와서 우리집에 함께 살게 된 무정부주의자이자 기계 발명가였던 노인이다. 내가 열두 살 때 죽은 그 노인은 틈만 있으면 나를 불러 옆에 앉혔는데, 그때마다 “이리 와라, 너에게 필라르 솔로르사노에 대해 말해주마”라고 말했던 것이다.


▲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과 더불어 현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칠레 출신의 루이스 세풀베다.

당시 집안 식구들은 솔로르사노 부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의심하면서, 노인의 망령된 헛소리쯤으로 치부한다. 그후 까마득히 잊고 말았는데, 수십 년이 흐른 어느날 ‘내’가 이역만리 동유럽 땅을 걷던 중 충격적으로 조우한 그 책에서 블랑코의 얘기가 모두 사실이었을 가능성에 가늘게 몸을 떨게 되는 것이다.

‘나’는 솔로르사노 부인의 실존 기록들을 찾아서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고, 이미 고인이 된 블랑코와 솔로르사노가 함께 찍은 여러 사진까지 확인한 후 “세월이라는 함정이 사랑의 맹세 위로, 어리석은 이성을 흐리게 하는 행복의 열병 위로 가차없이 덮쳤다는 것”을 상상해본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전 세계에 수천만 독자를 갖고 있는 세풀베다(Luis Sepulveda·55)는 칠레에서 태어났다. 피노체트의 독재를 피해 망명길을 떠나야 했던 그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방황하다가 1980년 독일로 이주했고, 암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기리는 장편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절판된 작품집에 실린 작품, 혹은 미발표 작품 가운데 세풀베다가 가장 아끼는 작품들만 직접 고른 것으로, 그 다양한 소재나 주제는 물론이고, 뛰어난 예술성과 인생론에서 단연 돋보이는 수작들이다.

번역을 맡은 권미선씨는 “망각과 착각, 우연과 필연이 교묘히 교차되면서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여유와 낭만이 물씬 배어 있고, 비참한 현실을 아프게 꼬집는 무서운 독설도 함께 묻어 있다”고 말했다.

세풀베다는 1997년부터 스페인에 정착했다. 지금까지 국내 번역 작품은 ‘지구 끝의 사람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연애 소설 읽는 노인’ ‘감상적 킬러의 고백’ ‘귀향’ 등이 있고, 이번 책이 여섯 번째다.

삶이란 ‘나’를 비켜간 운명의 부스러기가 장난처럼 쌓인 흔적일 뿐이라고 낙심하고 있을 독자들께 이번 소설집을 권한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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