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2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역사상 독재로 악명을 떨쳤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쉽게는 히틀러를 비롯해, 필리핀의 마르코스,  비참한 처형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줬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그는 죽을 때 눈도 재대로 감지 못했었다), 가까이는 박정희와 전두환, 김일성이나 김정일까지. 물론 지구상에 독재자가 이들 뿐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독재자들이 판을 치고 살고 있는지 우린 다 알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김정일은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현재 위키백과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방금 전에 알았다.  

여기 우리가 기억할만한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다.  그리고 그 인물은 2010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의해 재탄생했다.  그는 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를 자신의 소설에 되살리려 했을까? 

왜 '염소들의 축제La Fiesta del Chivo'인가? 

스페인어 염소에 해당하는 단어 Chivo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한 것은 음모자들 사이에선 트루히요를 '염소'라 지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염소는 그냥 동물을 지칭하는 명사였을텐데 트루히요에게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는 트루히요의 과도한 성욕과 뛰어난 남성적 능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Fiesta  축제란 말로써 트루히요가 죽는 날 도미니카에 독재는 종식되고 커라란 축제가 벌어질 거라는 암시를 내포하며, 그것은 동시에 유혈 축제를 내포하기도 한다.  즉 말하자면 트루히요 음모자들끼라만 통하는 일종의 작전명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비슷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두고 그 작전명을 '여우 사냥'으로 지었다지 않는가? 이렇게 사람들은 상징성을 같는 이름내지는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은 다분히 독재자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음모자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트루히요의 인간적 면모를 지켜볼 수 있는 시선 하나. 그리고 이를 지켜봐야하는 친트루히요파와 음모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여성의 시각을 대표하는  우라니아 카브랄의 이야기. 무엇보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트루히요를 많이 연구했다고 하는데, 우라니아는 실제로 있는 인물이 아닌 가장의 인물이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어느 나라나 독재 치하에서는 여성들의 성적 압제로인한 상처를 간과할 수 없기에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 우라니아의 부분을 가장 관심있게 읽기도 했는데,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그다지 크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작가적인 한계는 아닐까 하는 의혹까지 가졌더랬다. 하지만 역시 작가가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히요의 시대 역시 페미니즘의 시대는 아니었고, 더구나 당시의 도미니카 같은 저개발 국가에서 여성이 주체적인 성의식을 갖는다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딸의 처녀성을 독재자에게 바치는 시대였다면 그건 정말 비극의 시대다. 아버지조차 이성을 잃어버린 시대를 산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대는 도미니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14살 어린 소녀가 무엇을 해 볼 수 있을까? 그나마 트루히요의 그늘에서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35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불구가 된 아버지께 자신을 증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반전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독재 체제에서 탄압받는 여성과 치욕스런 국민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 우라니아를 설정했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니 우리의 관점에서 우라니아를 해석하고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옳은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우리도 바로 한 세기 전 우라니아로 살아야했던 치욕스런 시대가 있었고, 지금도 우라니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우리가 우라니아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다면, 그건 신화적이며 영웅적인 뭔가의 아우라를 우라니아에게서 끝끝내 발견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역시 우리는 허리우드식 스토리텔링에 너무 많이 익숙해져 버렸다.  

그들의 축제는 어디로 갔나?         

이 소설은 그다지 쉽게 읽혀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이야기가 길기도 하지만, 시간의 병렬을 해체시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 저 이야기를 하고 다소 혼란스럽게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점잖게 플래시백이니, 회상과 다양한 화자의 등장이니 목소리의 중첩이니, 한마디로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 읽기는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익숙한 방법으로 읽히진 않는다는 소리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갖는 독특한 점은, 이야기가 사실적이지 않으며 우화적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각 등장인물의 특징과 심리상태와 대화에 주로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사실 독재자의 최후를 다룬 소설은 많다. 그런데 이걸 여느 작가가 썼다면 어땠을까? 감히 상상을 해 보건데, 아마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재자를 죽이기 위해 사용된 무기는 무엇이며, 어떤 동선을 짜며, 살상자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이며, 암살이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의 시나리오. 그리고 독재자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등을  굉장히 꼼꼼하고 장엄하게 썼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예상되어지는 연출된 상황을 배체한 채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채워 나간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갖는 필력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독재자의 암살과 그 이후에 대해 상당히 충실하게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독재자를 죽이는 것이다. 사실 누구 보다 죽일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진 존재다. 하지만 암살자는 무슨 테러 집단도 아니고, 자실 특공대는 더더욱 아니다. 꼭 죽이고야 말리라는 그 강한 의지 뒤엔 그에 못지 않은 강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독재자의 암살엔 반드시 종교가 함께 간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살상만은 안된다고 해야 옳을 가톨릭 신부들 조차 독재자의 암살에 가담한다. 이것은 비단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정의의 이름 또는 신의 이름으로 독재자는 처단되어 왔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 것이며, 신의 왕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뭔가의 생각이 깊어졌다. 하지만 나의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던 건 투루히요를 처단한 로만 장군을 비롯한 가담자의 이후의 행동이다. 그들은 일단 독재자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찌보면 나라에 더 혼란만을 가중시켰고 , 영웅이 되기는 커녕 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역시 한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힌다는 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못되는 것 같다. 투루히요의 죽음에서 기쁨을 누리는 군중이 있는가 하면,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이 이야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의 독재 체제가 무너졌을 때에도 똑같이 겪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축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 암살자들은 암살에 성공하고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 두려워 했다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 보다 

사실 이 책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었던 건, 어찌보면 이 책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의 기시감 때문이었다. 어릴 적, 나 역시 우리나라엔 대통령이 원래 단 한 분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신앙 같은 것이 되어서 앞으로도 이 분은 죽지도 않고 나라를 계속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분이 어이없이 죽고 나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났고 그것이 독재 때문이며 더 많은 혼란과 이전의 독재자 못지 않은 독재자가 나타나 민주화의 꿈은 좌절되는 줄만 알았다. 누구는 또 그랬다. 우리 나라는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으니 이전의 독재자의 재림이 필요하다고. 또 누구는 그 독재자의 암살자가 사실은 처형되지 않았으며 지구 반대편 어느 섬에서 살고 있다고도 했다. 과연 괴담 아닌 괴담이고, 그만큼 사람은 자율적이지도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못하며 뭔가에 기생해서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것은 이 소설에 그대로 녹아져 있다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궁금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독재자를 암살했을 때 작전명은 뭐였을까? 독재자가 있는 나라의 역사는 확실히 슬프다. 그래서도 난 이 책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현재의 북한의 상황 때문에도 이 책을 포기하지 못했다. 한 나라에 독재자가 있다는 건 불행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자기 세대를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뭐란 말인가? 3대 세습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이며 유일한 3대 독재 세습란 오명을 안게 되었다. 지금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체제에 시달림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과연 북한은 자생 능력을 상실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하게 만들었다. 이 악습을 보고도 암살을 꿈꾸는 사람이 없더란 말인가? 새삼 가슴을 쓸어 내렸다. 물론 독재가 있으면 반드시 암살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암살을 심판하기 전에 그것을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만큼 혁명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며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끝이 어떤 결과를 낳던지간에 말이다. 그런데 북한은 자기네 나라의 독재를 청산할 의지도 없이 삼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집단 패닉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는 말을 적이 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의 의식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언젠가는 그 독재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도 아주 어이없는 그 하나 때문에.  

이야기를 무시하면 안 된다. 이야기가 갖는 신화적 상상력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은  진실을 은폐한 거짓말 하나가 어떻게 나치즘을 붕괴시켰는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그런 것처럼 이 소설이 갖는 신화적 상상력이 어느 나라의 독재를 어떻게 무너 뜨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도 작가는 사실주의를 배제하고 우화적이며 상징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을지 모른다. 이 소설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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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7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트루히요와 그의 아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부자가
떠올랐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유신정권 시절의 우리나라랑 오늘날의 북한 정권이
동시에 연상되는,, 어쨌든 참 대단한 소설인거 같아요 ^^

stella.K 2011-01-28 13:18   좋아요 0 | URL
어쨌든 독재의 모습은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데 북한이 여타의 그것과 다른 건 그들 자체적으로 독재를 청산하지 못한채
독재자를 우상화하고 있다는 거죠. 어쩌면 좋을까 한숨만 깊어졌어요.ㅠ

근데 시루스님 밖에 없어요.뭐냐구요?
그냥 시루스님 조타구요!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