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 개봉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은 10대 소년 둘이 학교에서 총을 마구 쏘아 친구들을 살해한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파고듦으로써 미국 사회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다큐멘터리란 결국 세계를 읽어내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무어는 자신이 믿는 바를 최대치의 설득력으로 전달하려 합니다. 미국의 권력층을 ‘조롱’함으로써 ‘저항’하는 무어는 빼어난 효과를 발휘한 편집과 극영화 이상의 치밀한 사전 기획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무어 주장의 핵심은 미국의 권력층이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이익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흑인에 대한 공포를 키워 백인들을 결집시키고, 침입자에 대한 공포를 조장해 총기산업을 유지하고, 테러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해 미국사회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지적이지요. ‘갱스 오브 뉴욕’ 같은 작품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인물 ‘도살자 빌’이 뉴욕에 자신의 ‘왕국’을 세워나갔던 비법이 바로 ‘공포의 조장’에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두려움은 분명 ‘돈’이 됩니다. 이는 각종 광고를 눈여겨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입냄새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켜 껌을 팔고, 일상 속 위험을 강조해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식이니까요. 물 부족 사태에서 에너지 부족 사태까지를 섬뜩하게 강조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려는 ‘공익광고’의 전술은 또 어떻습니까.
아마도 두려움은 사람들을 가장 조종하기 쉽게 만드는 감정일 겁니다. 왜냐면 유기체의 행동 원칙 자체가 두려움에 바탕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이 두려워 식사를 하고, 에너지 소모가 두려워 가장 적게 몸을 쓰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식이니까요. 하긴, 삶 자체가 죽음에의 두려움을 그 동력원으로 삼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공포로 조종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무어의 발언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닙니다. 그러나 그의 사회분석에 대한 동의와는 별개로, 공포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기능이 있음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리학자들은 생물체가 진화하는 과정 중 뇌의 변연계에서 발생한 최초의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온갖 돌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가 바로 공포라는 거지요. 원시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위험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인류는 멸종됐겠지요. 그러니 두려움이 인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문명 자체가 공포의 산물일 수도 있겠지요.
신경쇠약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두려움을 자주 느낄수록 두려운 상황을 피하기 쉽습니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겸손을 만들고, 타인에 대한 두려움은 예절을 생산하며, 역사에 대한 두려움은 정의를 낳습니다. 아마도 인간은 생래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일 겁니다.
쇼펜하워는 “내가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을 때, 바로 그때 나는 가장 큰 두려움을 갖는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정말로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행동할 때입니다. 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그때야말로 가장 두려운 상황이 펼쳐지겠지요.
2003.4. 28 이동진 /dj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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