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한국 시나리오 선집 -하 - 제24권 2006 한국시나리오선집
영화진흥위원회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과연 우리나라에 시나리오 책이 얼마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검색을 해 봤다. 그랬더니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제법 많이 나와 있었다. 그래도 희곡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권수를 자랑하고 있다. 얼마 전, 나의 사부님께 인사겸 찾아 뵜을 때 이 부분에 대하여 의문반, 걱정반으로 여쭤 보았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영화 자본주의의 논리지. 영화시장은 돈이 안될 것 같으면 관심을 두지 않거든."  어찌보면 선생님의 그 말씀은 나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씁쓸했다. 그저 어딜가나 돈.돈.돈. 과연 돈 가지고 예술을 논하고, 예술을 생산해 낼 수 있을거라는 게 뭔가 맞지 않아 보인다. 이 땅엔 돈에 영혼을 판 좀비만이 득실거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젠장!

그러면서 남의 나라 부러워할 자격이 과연 있는 걸까? 얼마 전, 허리우드 작가들의 파업을 우리는 신문지상을 통해 접해서 알고 있다. 그 기사를 접하고 나는 좀 놀라웠다. 그쪽 나라 작가들이 그토록이나 입김이 세단 말이야? 오죽했으면 난다 긴다하는 배우들까지도 보이콧을 하고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것에 대해 나의 사부님은 얼마 전 '씨네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엄청 부러운 일이라고 솔직히 고백하셨다.

그분은,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들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고 했다. 지금 기억에 남는 말은, 어떤 작가가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어서 500만원에 어느 영화사에 판권을 넘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화사는 시나리오만 사 들였지 7년 동안 그 작품 가지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영화사에 팔려고 했는데 판권을 이미 넘긴 상태라 작가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므로 법의 저촉을 받는다고 했다.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내가 쓴 시나리오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니...지금 우리나라에 시나리오 작가의 위상은 영화판에서 타이피스트 정도 밖에 안 된다고 성토 하셨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좋은 영화도 만들텐데 시나리오 작가들을 키우질 않는다. 설혹 좋은 시나리오를 쓸 자질을 갖춘 사람이 있으면 뭐하겠는가? 영화 제작자들이 그 시나리오 보고 이리 가위질하고 저리 가위질을 해 작가의 창작 의욕을 꺽고 있는데...그것은 영화판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때 음지에서 연극 대본 하나 써 보겠다고 멋 모르고 길을 나섰다 깨진 나였으니 그 상황이 어떨지 감히 상상이 간다. 그러고 보면 난 김수현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엔 김수현 같이 깐깐한 작가가 더 많이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현 씨를 보라. 그는 너무나 완벽한 대본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쯤되고 보니 우리나라의 연출가도 쥐락펴락 하지  않는가? 그만큼 작가는 자기 작품에 최선을 다 해야하고 그것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다는 좋은 선례를 남기고 있다. 처음부터 영화제작자들에게 말랑말랑해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거든 그렇게 해라. 그러나 내 작품에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거든 영화판 김수현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사실 시나리오는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하나의 설계도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시나리오 쓰는 법을 배웠는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몇개되질 않는다. 그 상태에서 워크샵에 낼 시나리오를 쓰려니 쓰면 쓸수록 자신이 없었졌다. 나는 시나리오 용어 조차도 제대로 쓰지 않은 채 그저 지문에만 의존해서 글을 써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글 쓰기를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구? 소설은 서술과 문체라 마구 자유롭게 늘려써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물론 그렇다고 소설 쓰기가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고도의 테크닉과 러닝 타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매우 함축적이고 그 짜임새가 촘촘하다. 난 그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래서 비록 습작이지만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거기엔 나의 의지박약도 한 몫하고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영화 중흥기를 맞으면서 영화 시나리오는 그 어느 때보다 내용면에서나 아이디어면에서 탁월한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가 죽을 수 밖에.

그러나 읽으면서 내내 만화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마치 영화 자체보다 제작일지가 더 흥미를 자극하는 것처럼 수록된 작품을 읽어내는 것은 마치 X-파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대사나 지문, 영화용어에서 그런 흥취를 더하였을 것이다. 특히 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시나리오는 <천하장사 마돈나>다.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도 봤는데 인상 깊고도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시나리오로 읽는 기분은 어떨까? 다음은 그 작품을 일부다.

   
 

아버지: 쓸데없는 짓 했다..건방진 놈.

  이를 악무는 동구. 다시 침묵이 이어지는 식탁.

  아버지, 갑자기 한쪽 엉덩이를 들고 방귀를 뀐다. 길고 요란하게, 뿌웅----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꾹 참는 동구.

  고문이 따로 없는 밥상인데, 아침 햇살은 곤혹스러울 만큼 따뜻하다. (282p)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것을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묵직한 뭔가가 느껴진다.또 다른 곳을 보면,

   
 

엄마: ...내가 왜 당신이 싫은지 알아...?

아버지: ...

엄마: 맨날 술 먹어서 싫고...맨날 소리 지르고 집어던지고...당신...너무너무 싫은 사람인데...무엇보다 진짜싫은 건...당신은 당신 자신을 너무 미워해...

(중략)

엄마: 근데...동구는...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 나 그거 되게 감사해. 알아, 앞으로 동구가 얼마나 힘들게 살게될지...아마 지금보다 더 많이 싸우면서 살아야겠지...근데, 난 결정했어. 그 싸움, 말리기보단...잘 싸울 수 있게 응원해 주기로.(중략)

  아버지, 껑충 짧게 타버린 꽁초를 힘겹게 빤다. 그 모습을 잠시 보는 엄마.

엄마: ...아프지도 말고...죽지도 마...

  아버지를 보는 엄마. 두 눈에 고이는 눈물.

엄마: 당신 아파도 안 볼 거고...당신 죽어도...안 볼 거니까...그냥 그대로...살아 있어...

  아프게 듣고 있는 아버지. 얼굴에 한 줄기 눈물이 뚝, 흐른다.

엄마: ....당신 우는 거 보니까 이상하게 맘이 편하다.

  눈이 반짝이는 엄마, 그러나 끝내, 눈물을 참는다.(342p)    

 
   

이 부분은 대사도 좋고, 그림도 그려진다. 그러니 나 같은 문자중독자(?)는 영화를 소장하고 싶기 보다 시나리오 대본집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선다. 그렇다면 내가 애초에 이 글 초두에서 말했던 작자들이나 출판인들은 영화 제영화시장의 자본의 논리 틈새를 공략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엔 드라마와 소설을 동시에 팔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은 일반대중이 그 어느 때보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데 비해 안타깝게도 그들은 시나리오를 일반 대중에게 팔겠다는 의지도 마케팅도 없어 보인다.

당장 이 책의 장정을 보라. 페이지는 거의 500페이지를 육박하고 있지만 표지디자인도 웬만한 동인지 정도로 후지고 허접하다. 이래가지고서야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이젠 잘난 영화 DVD로만 간직하게 하지말고 책으로도 소장할 수 있도록 예쁘게 만들줄도 알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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