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나. 예측불가능한 나. 그런 내게 일어난 일을 글로 쓰려면 누구나 고민에 빠진다. 여러 갈래의 마음이 다투고 이때의 나와 저때의 나는 다르거늘 글로 쓰면 한 가지 상태로 고정되니 쓰기에 애매하고 쓰고도 찝찝하다. p.167. 쓰기의 말들. 은유
두 달에 걸쳐서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을 다 읽었다. 아니 오디오북으로 들었으니 다 들었다. 작년쯤 종이책으로 1권을 읽고 미뤄두었던 나머지 이야기들을 오디오북으로 끝낸거다. 오디오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귀로 듣다보면 종종 연관성을 찾기도 힘든 다른 생각으로 빠지곤했다. 집에서 앉아서 혹은 누워 들으면 잠이 왔다. 이 좋은 방법을 두고 수면제가 왜 있는걸까? '노인과 바다'를 오디오북으로 시도했는데 바다에 나가자마자 표류해버린 내 집중력은 헤밍웨이를 삼류작가로 만들었다. 그런데 나폴리 4부작은 달랐다. 야한 장면 묘사가 인상적이었다는 플친의 말에 듣기 시작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하필 그 장면이 시작되었는데 마치 스피커로 그곳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렇게 성우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는 소설 속으로 나를 집어삼키는 듯 했다. 나는 릴라가 되었다가 레누가 되었다. 나폴리에서 가장 빈곤한 마을에서 싹튼 우정. 그들은 서로에게 눈부신 친구였지만 질시의 대상이기도 욕망의 원천이기도했다.
지금껏 릴라가 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형태를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조종했는데도 액체가 범람하면 릴라는 스스로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럴 때면 혼돈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나 활발하고 용맹한 릴라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무無가 되고 말았다.p.244.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릴라와 레누는 이탈리아의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청춘과 중년의 시기를 거쳐 노년을 맞이한다. 릴라는 고향마을에서 이웃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엔초와 함께 나름 성공적인 삶을 이룬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했음에도 여전히 똑똑한 그녀답게 IBM사에서 일하는데 대형 컴퓨터에서 점점 데스크탑으로 변모하는 기술을 선도한다. 레누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니노 때문에 뒤늦게 많은 것을 잃게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릴라와 관계를 회복해 고향 마을에 정착한다. 전후 이탈리아의 복잡한 정치상황, 68혁명, 테러리즘과 부패 추방운동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둘러싼 이탈리아 현대사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많은 굴곡과 슬픔을 안긴다. 특히 고향 마을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악한 행동을 일삼았던 솔라라 형제와 파스콸레같은 인물들의 삶은 작품에 역사성과 생동감을 더했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글쓰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1인칭 시점인 데다 화자인 레누의 직업이 작가인 만큼 무엇인가가 되려고 애쓰는 레누의 노력의 일환으로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다루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제 1권에서 제3권까지는 작가로서 자리 잡기까지 레누가 매력적인 글쓰기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어린 시절 릴라가 쓴 '푸른 요정'과 사춘기 시절 릴라가 이스키아 섬에 있는 레누에게 보냈던 편지는 향후 레누가 글을 쓰는 기준이자 지향점이 된다. P.670.옮긴이의 말
나폴리 시리즈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등장인물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심리를 잘 풀어낸 부분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막다른 길까지 고집을 부려 달리다가 후회라는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다. 관계의 꼬인 매듭을 풀고 인생이란 퍼즐의 답을 찾고 싶어 헤매지만 실마리가 잘 찾아지지 않는다. 선과 악이 분명하게 대립하지 않는 다층적인 인물들의 묘사는 그들에게 살과 뼈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현실성을 부여한다. 바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고 살아갈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해 산다', '누구에게 내 인생을 건다'만큼 부질없는 말은 없을 거다. 자기 자신의 내일도 확신할 수 없는데 왜 타인에게 뭔가를 건단 말인가. 그저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 현재를 살아내는 수 밖에 없다. 엘레나 페란테의 그런 디테일이 좋았다. 짠하도록 생생해서 읽는 내내, 듣는 내내 위로가 되었던 선물같은 소설이었다.
글로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변덕스러움, 나약함, 얄팍함, 불확실성을 어디서 확인할까. 이토록 오락가락하면서 과연 어디로 가는지 궤적을 어떻게 그려 볼까.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상태를 인식하는 것. 글이 주는 선물 같다. P.167. 쓰기의 말들.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