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6편의 단편을 담은 작품이다. 모든 단편이 다 좋았고 읽다보면<감정의 혼란>처럼 토네이도의 중심에 휩쓸리듯 이야기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각 단편을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놓을 수가 없을정도였는데 이전부터 매번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놀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사람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격정에 휘말린 느낌을 글로 잘 살려내는지 신기했다. 역자가 책 후반부에 담아낸 슈테판 츠바이크의 삶과 프로이트와의 인연등 그의 관심사들로 어느정도 이부분을 납득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츠바이크는 문학평론가나 독문학자들이 아닌 일반독자들의 이른바 '입소문'으로 명성을 얻은 듯하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독일어권 작가인 카프카,헤르만헤세,토마스 만보다 뒤늦게 연구되기 시작했다는데 이제는 프랑스에서 셰익스피어와 애거서 크리스티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외국작가가 바로 츠바이크라고 한다.
1,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만큼 혼돈의 시대를 몸소 살아낸 츠바이크의 경험이 작품 곳곳에서 힘을 발휘한다고 느꼈다.
아찔한 비밀
바람둥이 남작이 어린 아들과 함께 있는 우아한 여성에게 반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아들에게 먼저 친근하게 접근하게 되는데 소년 에드거는 남작의 친절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라 믿고 멋진 친구가 생겼다며 생애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알게된 소년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분노한다. 남작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야기가 어린 소년을 중심으로 펼쳐지면서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환된다. 이제 소년은 추적자가되어 남작과 자신의 엄마가 모종의 결탁을 하고 있는 이유를 캐내려 한다.
에드거는 눈 한번 돌리지 않고 마차 뒷자석에 앉은 두 사람의 오가는 눈빛 깊숙이에 잠긴 비밀을 낚아 올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뜨거운 의심만큼 지능을 예리하게 벼리는 것은 없다. 미성숙한 지능의 소유자는 흔적이 모호하게 흐려지면 온갖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간혹 세상ㅡ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고 부른다ㅡ으로부터 실바람만 불어도 이 문은 벌컥 열리고 만다.p.48
불안
잘나가는 변호사 남편을 둔 귀부인 이레네는 피아니스트와 습관적인 불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자신의 불륜이 남들의 눈에 띌까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집을 나서던 어느 날 현관에서 어떤 여인이 나타난다. 자신이 피아니스트의 옛 연인이라며 '당신 때문에 그와 멀어졌다'고 덤비고 화를 낸다. 이레네는 두렵고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녀에게 가진 돈을 모두 내어주는데 이후 그 낯선 여인은 협박꾼이 되어 끊임없이 이레네의 집으로 찾아와 돈을 뜯어낸다. 불안한 날들이 이어지고 협박꾼이 요구하는 액수는 점점 늘어가는데 이레네의 남편 프리츠는 하필이면 심리학과 범죄수사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륜이 드러날까 매일 숨막히는 긴장속에 버텨 나간다.
그가 심리학에 열렬한 관심을 품고 있으며, 그 관심이 법률가로서 알아야 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욱 등꼴이 오싹했다. 다른 이들이 도박과 성욕에 몰두하듯이 남편은 범죄 사건을 조사하고 풀어내고 해명하는 데 몰두했다. 범죄자의 심리를 추적할 때면 그는 속속들이 열기로 꽉 차 있었다. p.138
어느 여인의 24시간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을 끈 점은 슈테판 츠바이크와 가까워진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읽고 정신분석학적으로 나름의 해석을 한 것인데, 다 읽은 뒤 해설에서 이 부분을 읽고 역시 프로이트답다는 생각을 했다. 스포일이 될 수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읽어보신 뒤 작품해설부분을 참고하시면 될 듯. 줄거리는 한 남자가 백발의 점잖은 부인으로부터 과거 그녀의 특별했던 24시간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백발의 부인은 40대에 그만 남편을 잃고 홀로 여행을 다니게 되었는데 남편이 살아 있을 때 함께 갔었던 카지노에서 도박에 중독된 젊은 남자를 보고 결국 모든 것을 잃은 그를 돕기에 이른다. 당시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모든 걸 포기하고 그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도박꾼은 마음을 다잡을 것인가? 도박 중독자를 한 명 알기에 나는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단편들 중 유일하게 결말을 예측한 작품이다.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의 인연을 몰랐었는데 이번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지난번 읽었던 작품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니 거의 모든 소설이 심리적인 긴장감과 다각적인 변화를 잘 포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닥 중요시하지 않던 부분인데 작가의 삶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두는 것도 작품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 없는 작품이지만 1916년에 쓴 '예레미아'에 관해 츠바이크가 언급한 내용
나, 츠바이크라는 악기에 달린 모든 현이 처음으로 열렬히 소리를 내게 되면서 이전에 기회 닿는 대로 만든 작품에 깃든 유희적 요소는 이후 열정으로 변모했다.
p.351(1926년 출판사로부터 요구받아 작성한 자기소개서)
읽은 책
읽고 싶은 책
사진 출처:블로그 PROJECT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