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기억을 흐리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페라라에서 파디가티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에르베 광장에서 가까운 고르가델로 거리에 진료소와 거처가 있던 이비인후과 의사이자 마지막에 너무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가엾은 남자 아토스 파디가티 말이다. 젊은 나이에 고향 베네치아를 떠나 우리 도시로 왔을 때, 그는 누구보다 순조롭고 평온한 삶을,그렇기에 더욱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 것만 같았다.....) p.7
화자를 통해 묘사된 의사 파디가티는 도시 페라라에 정착하게 된 이비인후과 의사로 기존부터 그곳에 있던 낡고 오래된 다른 병원에 비해 세련된 분위기의 시설과 나름의 인자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많은 환자들을 끌어모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탓에 지역에서는 모두들 그의 성정체성을 의심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화자인 나와 친구들이 통학하는 열차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계속 열차에서 마주치면서 그와 학생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어울리게 되지만 어느순간 파디가티와 학생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순간적인 방심으로 그는 큰 대가를 치른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조롱이었던 것 같다.- P45
이후 시간이 흘러 가족과 함께한 휴가지에서 나는 파디가티와 함께 여행중인 내 친구를 발견한다. 그와 함께 있던 친구는 열차에서 파디가티를 조롱했던 바로 그놈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즘으로 물들어 있었고 독일 히틀러의 부상아래 유대인에 대한 대응을 국가적으로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유대인 부모를 둔 나는 계절의 차가운 변화와 같이 정치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극도의 불안감과 그로인한 비유대인들을 향한 적대감을 키워나가고 있다. 정체성으로 인해 조롱받는 처지의 파디가티와 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차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
아버지의 기쁨은 부당하게 쫓겨났다가 선생님의 복귀 명령을 받고 교실로 돌아온 학생의 기쁨과 같았다. 삭막한 복도에영영 추방되어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갑작스럽게 친구들이있는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 학생은, 벌칙을 면했을뿐 아니라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고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고 기뻐한다. 결국 아버지가 그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이옳지 못한 걸까? 나에겐, 그렇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P142
이 작품의 배경인 이탈리아의 북부에 위치한 페라라는 이탈리아 도시 가운데 로마식 배치를 따르지 않은 유일한 도시라고 한다. 이곳에는 홀로코스트 국립 박물관이 위치해 있으며 2차 세계대전 동안 페라라의 유대인 300명 중 96명이 독일의 수용소로 추방되어 단 5명이 살아남았다.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살았던 작가 조르조 바사니는 대부분의 작품 배경을 페라라로 그려냈다. 이탈리아의 페라라와 볼로냐, 리초네로 공간이동을 하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통통한 얼굴에 금테안경을 쓴 파디가티라는 중년의 사람좋은 의사의 고독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 유배지로 배척될 위기에 처한 유대인 청년의 이야기다. 에밀졸라가 '루공마카르총서'를 통해 프랑스의 한 시대상을 그려냈다면 조르조 바사니는 '페라라 소설'이라는 작품들을 통해 2차 대전의 혼란기에 처한 이탈리아를 그려낸 듯 하다. 보통 책을 읽다가 그때그때 느낀 '독후감에 쓸만한' 내용들을 따로 메모해두는데 이 작품은 그렇게 할 짬이 나질 않았다. 거기다 오늘 따라 눈이 피로해져 좀 쉬어줘야 했지만 역시 이런 이유도. 이 매혹적인 글에서 중간에 빠져나올 이유로 충분치 않았을 만큼 나는 이 소설이 좋았다.
"이봐, 내 소중한 친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훨씬 더 인간다운 거야" P124
적막에 싸인 밤거리,느릿한 걸음으로 도시를 배회하는 두 남자와 그들을 뒤따르는 길 잃은 개.....ㅡ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
사진 출처: https://m.blog.naver.com/chiffonade/221618126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