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8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맹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책은 과거를 복원했다."시간이 지나면 모든 시는 만가(輓歌)가 된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처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접하게 된 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 나서였다. 이 작품을 애정하는 분들은 어쩌다 보니 흑화 된 눈먼 수도사 호르헤가 다름아닌 보르헤스를 모델로 한 인물임을 잘 알 것이다. 에코의 이 작품이 1980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어 숀코너리 주연으로 개봉한 동명의 영화가 1989년 개봉했으니 86년 사망한 보르헤스는 적어도 자신이 모델로 들어간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해서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직접 읽을 수 없던 호르헤 수도사의 운명과 선택도 기구했지만 보르헤스가 유전적 요인으로 30살에 앞을 못보게 된 것도 문학을 사랑하는 그에게 크나큰 불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 신(神)은 그에게 뛰어난 기억력을 선물했다.
P.38 그곳의 지형을 알지는 못해도 살갗으로 지리를 읽는 것 같다.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책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뭐랄까, 장인의 직관 같은 것이 지금 만지는 책의 내용을 알려주는지, 분명히 눈으로는 읽을 수 없는 그 책의 제목과 이름을 판독해낸다. 이 늙은 사서와 그의 책 사이에는 생리학의 법칙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신간은 예외였겠지만 그렇다 해도 무수한 책의 세계를 감안할 때 이것만으로도 그의 기억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보르헤스는 어릴 때부터 언어습득에 관한 천재성을 보이며 영어,스페인어등을 함께 배웠고 10살의 나이에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옮겨 언어와 문학적 재능을 동시에 드러낸다. 환상문학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수많은 작품과 시집을 남겼다. 이 책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은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이 십대시절 보르헤스가 즐겨가던 '피그말리온'이란 서점에서 일하다가 보르헤스의 부탁으로 일주일에 두 세번 책을 읽어주던 시절을 회생하며 남긴 작품이다.
P.99 그는 작가는 누구나 두 개의 작품을 남긴다고 말한다. 글로 쓴 것과 자신의 이미지, 이 둘은 끝까지 서로를 좇고 좇는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건 최소한 하나에서라도 가치 있는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겠지, 응?"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인다. "하지만 얼마나 확신할 수 있겠어?"
작가이자 영미문학 교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이기도 했던 보르헤스는 페론 정부가 다시 집권하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 유럽과 미국의 대학에서 문학 강연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스승과의 추억을 가진 기분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했던 나는 망구엘의 기억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보르헤스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온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에 가보고 싶다.
P.103 보르헤스는 '다른 사람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알려 주었고, 이제 보르헤스라는 미로 속으로 기꺼이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을 위해,망구엘은 거울 속에 떠오르는 보르헤스의 머나먼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보르헤스는 망구엘에게 세계를 담아내는 한 권의 책이었고 <보르헤스에게 가는길>은 망구엘이 마음을 담아 쓴 아름다운 기억의 각주이며, 눈을 감고 그려낸 한 장의 스케치이다.
-옮긴이.강수정
*이타카:그리스 서쪽의 섬, 신화의 오디세우스(율리시스)의 고향.
주문한 책의 일부가 도착했다. 깨알자랑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