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오랜만에 치킨 배달을 시켜놓고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낯에 더위먹은 여파였는지 전화 벨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들었다가 순간적으로 깨어나 허겁지겁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그리고 배달 완료 사진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10분이 지났다. 놀라서 대문앞에 달려나갔는데 치킨이 온데간데 없다. 치킨을 도둑맞은 것이다! 곧이어 치킨을 기대했던 짝꿍이가 도착했다. 당황한 우리는 어떻게 10분만에 치킨을 훔쳐갈 수 있냐며 분노했다. 비교적 조용한 동네. 저녁이면 집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옆집인가? 우리는 가장 먼저 옆집을 의심했다. 멀리 사는 사람이 굳이 치킨을 훔쳐 가기엔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옆집에서 배달원이 여러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와 보고 응답이 없는 것에 모험을 한 것일 수 있다. 지금쯤 맛있게 먹고 있을 거다. 아 정말 치사하다 나쁜 사람! 먹을 걸 훔쳐 가다니! 별의별 추리와 의혹을 쏟아내다가 우리 대문을 향해 직각으로 주차하고 있는 이웃 차량의 블랙박스를 주시했다.
하지만 생각이 너무 많은 A형과 타고난 결단력은 있지만 오리지날 A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후천적 A형이 되어버린 B형의 갈등과 고뇌의 시간이 얼마간 이어졌다. 늦은 시간이라 이웃이 싫어하면 어쩌지? 그냥 치킨일 뿐인데 잊어버리고 말자. 하지만 도둑을 잡지 않으면 이번 성공에 기고만장해진 이 도둑은 재범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은 범죄다. 지금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건 잠시지만 이 일은 두고두고 미궁에 빠져 오랜기간 이웃들을 의심하며 찜찜해질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보자! 결국 친절한 이웃 아저씨 덕분에 사건 현장이 담긴 메모리카드를 빌렸지만 리더기를 사와야 하는 수고가 또 걸림돌이었고 다시 고민과 회의를 거듭하고 리더기를 사오고 나서야 해당 10분동안 치킨을 훔쳐간 범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범인은 가끔씩 우리동네에 출몰하는 노숙자 아저씨였다! 영상속에서 아저씨는 우리 집 앞을 지나가다가 치킨을 보더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치킨을 들고 사라졌다. 우리는 동시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웃이 아니었어! 콜라랑 맛있게 드셨겠지?
P.32 머리 좋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따라 갈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즐기는 사람은 고민하는 사람을 능가하지 못하는 법이다. 여성주의는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보름 가까이 걸려 정희진님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리뷰를 쓰려니 마침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도둑맞은 치킨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는 데에도 이렇게 머뭇거려지고 수고가 필요한데 하물며 여성의 권리와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여정은 어떻겠는가? 그동안 여성학자 정희진의 책들을 몇 권 읽어봤지만 이번이 가장많이 슬프고 놀라우면서 또 희망적이었다.
진실을 찾는 과정은 우선 쉽고 편한 외면과 수용이라는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런다음 시간을 들여가며 번번이 찾아오는 귀찮음과 번거로움에 맞서 싸워야하고 그 과정에서 예상을 벗어난 반전이나 갖가지 걸림돌, 의외의 상황을 마주해야 할 수도 있다.이런저런 방해물들을 지나쳐야 어느정도 분명한 인식에 이르는데 그런 과정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생각보다 소득은 크지 않을 수 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을 때 가장 좋은 점은 제대로 거기 대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분명한 선택도 가능하다.
P.33 모든 이항 대립 논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성별적으로 작동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듯이 낮과 밤은 순환하고 연결되며 상호 의존하는 것인데도, 가부장제 사유 체계는 그것을 대립으로 받아들인다.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한 해질녘 황혼과 동트는 여명이 아름다운 것은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된 시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뜻한다.
권력과 기득권은 당사자가 스스로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가부장제가 뿌리깊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여성들에게 이것은 더욱 암울한 사실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나니 북마크가 셀수 없을 만큼 많이 붙어있다. 여성인 내가 읽어봐도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하물며 남성들은 어떨까? 여성들은 여러 시기를 거치고 세상과 마주하며 타자로서의 낯선 경험과 모순을 체득한다. 나도 그래 왔지만 남성들의 시각이 주류인 사회에서 제대로 현실을 읽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뭔가 잘못되엇다고 모호하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이런 느낌정도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가 쉽지 않다. 불안하고 더 많은 것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잃어버린 치킨때문에 그랬던 것 처럼. 더 많이 공부하고 주변에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정희진님의 말처럼. 나부터 먼저 변화해야 한다.
P.56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