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5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플롯, 스토리텔렝, 모방, 비극, 에피소드, 카타르시스 개념의 탄생

마음에 각인되는 완벽한 이야기 구성의 기술

고전을 좋아하다보니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새번역되어 나온 책을 몇권 읽어보게 됐는데 모두 다 좋았다. 이번 책도 역시 좋았다.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이라는 영역에서 박문재 번역은 앞으로도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충실한 해설은 늘 큰도움이 되고 있다.

인문학을 접하고 고전을 읽고 새로운 학문의 분야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런저럭 책을 잡다하게 읽었었다. 그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 도 있었다. 수사학 부분에서 꼬인 머리속이 풀리지 않은채 덧붙여 있는듯 짧게 이어진 시학은 읽으면서도 대충 넘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제대로 읽고 싶었다. 이번엔 머리 꼬이지 않게 시학부터 ㅎㅎ

일러두기 1. <시학>은 원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권에서는 비극과 서사시를, 2권에서는 희극을 다루었지만, 지금은 1권만 전해진다. 현재 <시학>은 26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 구분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어 판본을 편집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기> 첫번째부터 감회가 남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읽기전 <장미의 이름> 이라는 소설을 먼저 읽었었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스릴러 처럼 읽히는 그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숨겨졌던 비밀이 바로 '시학의 2권'에서 다룬 '희극' 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었다. 전해오지 않기에 여전히 알수는 없지만 시학1권을 읽으며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비극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았다.

흔히들 운율의 명칭에 '시인'이라는 말을 덧붙여, 비가시인, 서사시인 등으로 부르지만, 그러한 명칭은 그들이 모방을 행한 대상이나 방식이 아니라 사용한 운율에 따라 일률적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의술이나 자연철학에 관해 글을 썼다고 해도 운문으로 썼다면,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행이다. (p. 11)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시인'이라는 개념은 지금의 개념과 무척 달랐다. 당대에 글을 쓰는 지식인이라면 거의 모두 시인이라 불릴만 했다. 플라톤의 철학서도 운문처럼 읽히기 때문에 비극의 위험성을 비판한 본인으로서는 싫겠지만 플라톤도 (당대의)시인으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석13. '모방하는 사람'은 모방이 본질인 모든 예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인, 무용가, 화가 등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 예술은 사람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행위는 성격과 사상을 드러내는, 목적지향적이고 가치지향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그 가치는 사물의 본질에 부합하는 미덕과 부합하지 않는 악덕으로 구분된다.

이 책은 본문과 주석의 양은 거의 비등하다. 어쩌면 주석의 양이 더 많을지도?! 이러한 상세한 주석은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원전 번역에 상세한 주석 그리고 뒤에 붙은 해박한 설명은 현대지성클래식 시리즈의 큰 장점이다.

희극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을 모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p. 14)

모방은 이렇게 수단과 대상과 방식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소포클레스의 모방은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의 모방과 동일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방하는 사람을 연기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와 동일하다. (p. 15)

이렇게 모방은 물론이고 선율과 리듬도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본능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즉흥적으로 모방했다가,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시가 출현한 것이다. (중략) 호메로스 이전에 쓰인 풍자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예로 들 작품이 없지만, 그때도 풍자시를 쓴 시인은 많았던 듯하다. (p. 19)

희극과 비극의 차이점에 대해 진지한 공감이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시학을 정리하면서 호메로스를 무척 많이 칭찬하고 있다. 그 당시에도 과거의 작품들이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그런데 그때의 호메로스의 작품을 지금 우리도 여전히 가치있게 읽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리고 시학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당대의 온갖 학문분야에 대해 정리해놓았기에 지금의 학문들이 그 기초로 일어섰구나 하는 것이 '시학'을 통해 좀더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극은 양념을 친 온갖 언어를 곳곳에 배치해, 낭송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양념을 친 언어'는 리듬과 선율을 지닌 언어나 노래를 의미하고, '곳곳에 배치한다'는 어느 부분에서는 운문만 사용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다시 노래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p. 26~27)

여섯 구성요소(시각적 요소, 성격, 플롯, 대사, 노래,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나 사건을 구성하는 플롯이다. 비극은 사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극은 성격을 모방하려고 행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성격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비극의 목적은 행위와 플롯이고, 목적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더욱이 행위 없는 비극은 있을 수 없지만, 성격없는 비극은 있을 수 있다. (p. 28)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시학관련 지식을 총망라하여 정리하고 있긴 하지만 상세한 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책들도 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단어의미와 지금 의미의 격차가 커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과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시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역사가와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역사가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는 데 있다. (p. 35)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고결하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을 주로 말하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은 희극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희극에서는 개연성에 따라 플롯을 구성하고 나서 등장인물에게 그 플롯에 적합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중략) 반면에, 비극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고집스레 사용한다. 가능성이 있어야 설득력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능하다고 믿기 어렵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분명 가능하다. 가능성이 없다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p. 36)

역사가 보다 시인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굉장히 중요시하는데 그중에서도 플롯의 통일성과 개연성을 강조한다. 스토리는 플롯에 포함되는데, 이 두단어를 볼때마다 “스티븐 킹이 소설계의 롤링 스톤스라면, 딘 쿤츠는 비틀스다' 라는 홍보문구가 생각난다. 스키븐 킹은 자연스러운 스토리의 흐름을 강조하고 딘 쿤츠는 논리적인 개연성이 뚜렷한 플롯을 강조한다는 해설도 떠오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플롯을 좀더 중요시여기는 편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논리가 더 흥미롭게 읽혀졌다.

가장 훌륭한 비극은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고,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한 사람이 행복했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일은 공포나 연민이 아니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악인이 불행을 겪다가 행보해지는 것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비극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비극의 효과를 조금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긍할 수도 없고, 연민이나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 (p. 45) 결말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말은 앞에서 설명한 사람들이나 그들보다 나은 사람들의 악행이 아니라 큰 실수나 결함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p. 47) 따라서 시학 이론에 의하면, 그런식으로 플롯을 구성한 비극이 가장 훌륭하다. (p. 48)

그리스비극은 항상 깨달음을 남긴다. 공포와 연민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나면 현실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지침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고나 할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성격은 지금의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결말에 대해서는 그리스비극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다양해졌지만 기본적 원리는 같다. 사람의 감정이 변하지 않아서랄까 다시말해 사람이 변하지 않아서랄까... 수천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사람은 변한게 없는 것같다. 역사를 읽어도 비극을 읽어도... 그랬다.

서사시는 연기가 필요 없는 교양 있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비극은 저속한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따라서 사람들은 비극이 이렇게 저속하다면 분명 서사시보다 열등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평가를 접하면서, 먼저 그런 비난은 비극 자체가 아니라 배우의 연기에 대한 비난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p. 114) 아울러 비극도 서사시처럼 연기 없이 비극의 목적으 달성할 수 있다. 비극을 읽어보기만 해도 비극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략) 게다가 비극에는 서사시에 있는 요소가 모두 있고, 서로 결합하여 생생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음악과 시각적 요소라는 중요한 요소까지 갖추고 있다. (p. 115) 이렇게 비극은 이 모든 점에서뿐 아니라, 각각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것과 관련해서도 서사시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비극은 자기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한다는 점에서 서사시보다 분명히 더 우월하다. (p. 116)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라는 학문을 정리한 것은 이 마지막 문장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였나 보다. '비극은 서사시보다 우월하다!'

이렇듯 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이었다. (p. 126) - 해제 中 -

역자는 '비극에서 사람의 행위나 사건을 모방하는 까닭은, 비극의 목적이 감정의 정화, 즉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서 감정을 정화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서 플롯이 가장 중요하며, 플롯은 철저하게 필연성과 개연성을 토대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비극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시학이라는 학문을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했다면 심리학이 좀더 일찍 발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을 읽으면 이런 나의 궁금함이 해결될지도 모르지만 윤리학과 수사학과는 다른 심리학적 어떤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을 가졌었다면 하는... 여하튼, 얇아서 좋고 원전 번역이라 좋고 본문이해에 도움되는 자료가 많아 좋은, 여러모로 참 읽기 좋았던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 나의 알 수 없는 기분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처방전
야오나이린 지음, 정세경 옮김, 전홍진 감수 / 더퀘스트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은 마음이 아니라 뇌의 독감

인생의 문제 중 대부분은 뇌에서 시작한다

인생의 문제 중 절반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며, 다른 절반은 뇌가 우리에게 던져준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뇌과학의 어려운 내용도 쉽고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p. 7) -추천의 글 中-

'현대인에게는 뇌과학이 필요하다'는 추천사에 공감이 갔다. 심리학도 정신의학도 다른 학문에 비해 그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인데 그 학문들이 제대로 정립되기도 전에 '뇌과학'에 의해 다시 재정립해야할 시대가 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이제 마음의 문제라 여기던 심리학과 정신의 문제라 여기던 정신의학은 '뇌과학'에서 만나고 있는듯 하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뇌과학적 측면에서 심리문제와 정신질병을 다루고 있다.

우울증은 일반적인 기분저하나 슬픔 또는 즐겁지 않은 기분과는 다르다. 보통 우울은 불안을 동반한다. 우울증 환자 중에는 불안 문제를 겪는 사람이 많은데, 3분의 2에 이르는 우울증 환자가 불안장애의 임상 기준에도 부합한다. 불안 문제는 대부분 우울증이 발병하기 1~2년 전에 나타나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증세가 뚜렷해진다. (p. 20) 우리가 우울중에 걸릴지 아닐지는 유전요인이 40퍼센트를 차지한다. 나머지 60퍼센트는 다양한 환경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p. 34) 여성의 정서적 건강에는 거주 조건이, 남성에게는 사회적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p. 37)

첫장에서는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다룬다. 우울증과 불안증과의 관계나 유전요인에 대한 내용은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의해 정서가 더 크게 좌우되는 성별이 남성이라는 점도 새로웠다. 여성보다는 오히려 남성이 혼자 살기 힘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ㅎ

​​​

다시말해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해야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p. 116)

다시말해 부모의 보살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이의 신경생물학적 특징과 행동의 특징에 영향을 준다. 또한 이런 특징은 유전자 발현이 변화하는 방식으로 대를 거쳐 유전된다. (p. 123) 유아기의 경험은 대뇌 발달과 신경회로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며, 성인이 된 뒤에 스트레스와 역경에 대처하는 능력과 자기효능감을 결정한다. (p. 126)

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유전요인과 관련이 있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모두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지 않는것은 유전요인과 성장환경에 의해 누적된 개인의 성향이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은 대를 물려 이어지기에 긍정적으로 변화된 유전요인을 다음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양육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유전은 그대로 똑같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형되고 적응된 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내손자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아이의 기질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

ADHD는 높은 확률로 유전된다. (중략) 스웨덴에서 81만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연구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 가정에서 ADHD 발병률이 높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ADHD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ADHD의 여러 핵심 증상이 교육을 받는 햇수나 업무능력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ADHD환자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낮아지고, 그 결과가 다음 세대에게도 심리적으로 경제,사회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p. 187~188)

ADHD가 유전된다는 것도 새로웠지만, 환경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 마음한켠이 쓰려왔다. 질병은 유전된다. 그런데 그러한 유전은 사회적, 경제적 계층격차로 인해 어쩔수 없이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같은 질병도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이 다르다. 유전적 요인이 큰 질병의 경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유전될 확률은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그 사람들의 유전자가 문제가 아니라 계층격차 때문임에도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안되는 것인데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종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기 덕분에 진화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적인 특징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기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다. 전사유전자를 가진 사람들 중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악마가 될 수 있지만 전쟁 시기에 살았다면 영웅이 됐을지도 모른다. (p. 232)

역사를 좋아하다보니 역사관련 책을 자주 읽는 편이다. 그런 책을 읽을때마다 과거에 자행됐던 잔혹함에 대해 진저리를 치곤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그런 사건들을 그런 전쟁들을 사이코패스와 연결지어 생각한건 이 구절을 읽으며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읽고보니 정말 그렇다. 잔혹한 시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그런 유전적 요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유전적 요인이 정도의 차이일뿐 아마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사이코패스중에서도 양육환경이 좋았다면 정상인으로 자라나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역시 중요한건 성장기의 환경과 경험과 교육이다.

우리의 뇌는 30세가 돼야 안정을 찾으며, 이때 우리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p. 240)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수록 생길 수 있는 변이의 양은 어머니의 네 배에 이른다. (p. 242) 내 주변에서 아이의 조기교육 문제에 조바심을 내지 않는 사람은 심리학과 뇌과학을 배운 사람들뿐이다. 아동기는 사람의 일생에서 뇌의 가소성이 가장 강한 시기다. 이 단계에서는 뇌 신경세포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이 빠르게 일어나고 쓸모없는 신경 연결은 빠르게 끊어진다. 이렇게 민감한 단계에는 아이의 감정이 뇌 발달에 영향을 주기 쉽다. (p. 244)

아이가 어릴때부터 경쟁관계에 노출되면 정상적인 인성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조기교육 보다 자유놀이를 추천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참 요즘 사회에선 부모가 선택하기가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여하튼, 뇌가 30세가 돼야 성숙된다는데 과거 20세도 되기 전에 결혼하고 어른노릇해야 했던 조상님들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아이낳는 시기에 대해 대부분 엄마의 나이를 문제삼곤 하는데 유전자 변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엄마보다 아빠의 나이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뇌와 몸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부위라 굳게 믿었다. 정신질환과 신체질환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를테면 우울증은 기분이 나쁜 것일뿐 감기에 걸려 열이 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몸과 뇌에 관한 지나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p. 324)

이 책의 마지막장은 '정신과 신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뇌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예를들어, 위장이 손상되면 뇌세포도 사라지고,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되면 뇌가 조종당한다고 한다. 심리, 정신, 신체 의 문제들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부분부분들의 연결은 뇌과학의 연구로 인해 더 빨리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보인다. 심리적 감정적 정신적 문제를 느꼈을때 위로와 힐링을 얻을 수 있는 책들도 좋겠지만 최신 연구결과를 담은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소소한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문학과 민속학을 가로질러 한국적 서사로 승화한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가

남긴 한글로 쓰여진 단 한 권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모노그래프'

생활에선 죽은 언어이지만 학문에선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언어인 라틴어를 우리는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우리나라 속담만큼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카르페디엠' 과 '메멘토 모리' 가 아닐까. '현재에 충실하라' 와 '죽음을 기억하라' 는 이 문구는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양극한을 알려주고 있는 문구이기에 언어를 떠나서 의미적으로 모두에게 각인되는 것 같다. 삶과 죽음으로.

'한국학의 거장' 이라는데 '김열규 라는 이름 석자는 내게 낯설었다. 그 이름 석자보다도 더 낯설었던 것이 '한국학'이라는 단어였다. 그런... 학문이... 있었나?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기에 궁금해진 책이기도 했지만,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똒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 뿐이다. 잘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맞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8)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구 하기 때문이다. (p. 10)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p. 12)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p. 14) 이 효성에는 짙은 자책감이 그늘을 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 21) '열녀'라는 관념에는 '늘'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죽음이 따라붙고 있다. (p. 23) 효와 열은 때로 효열이라고 한 묶음으로 일컬어졌다. (중략) 삶에서 퇴거할 수 없는 죽음, 그런 묘한 죽음이 있게 된 것이다. (p. 24)

<프롤로그 -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저자는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한 학자였다고 한다. 활발한 연구 활동과 저서를 남기고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 인생 60년에 대해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의 거장'이라고 수식어구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한국인들의 '죽음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공과 연륜이 빚어낼 통찰이 궁금해지게 하는 서설이었다.

'죽음' 이라는 것은 생명을 지난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간'만의 개념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같은 땅에서 오랜 세월 역사를 쌓아온 한국인만의 독특한 '죽음론' 을 고찰한다는 점도 의미있어 보였다. 한국땅에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것일까?

죽음이란 그 자체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타자라는 것이 절망스러운 것이다. 내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 최후의 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 그건 우리가 경험할 최대의 아이러니다. 그렇다. 죽음은 우리들 몫인 가장 무망한 아이러니다. (p. 42) 죽음으로 해서 생은 에누리 없이 일회로 제약되고 만다. 한데 이 죽음으로 한계지워지는 생의 일회성이야말로 생의 진지함이며 집요함의 혹은 열정의 근거라고 릴케는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p. 47)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올 것임을 알고 있는 존재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죽음을 사고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존재다. (p. 49) 영원한 미래의 시제, 영원한 미래의 공간 속으로 옮겨앉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피안이란 것을 생각해냈다. (p. 54) 그래서 삶이 적극적인 뜻을 지닌다고 하면, 영원한 미래시제의 그 영토까지 다다를 차표를 얻어내거나, 채비를 하는 절차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p. 55) 이때 큰 함정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 사뭇 쓰잘것없는 것이거나 하잘것없는 계기에 불과하게 내버려져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p. 60) 죽음 때문에 우리가 삶을 등져서는 안 된다. 아니 단연코 그 거꾸로라야 한다. (중략) 죽음 때문에 우리들은 삶에 달라붙어야 한다. 그 죽음으로 해서 잃어질 삶이라면, 아니 결정적으로 잃어지게 되어 있는 게 삶이라면 우리들은 한사코 그 삶에 마음을 붙여야 하고 사랑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p. 63)

저자가 '죽음' 에 대해 일반적인 고찰을 위해 선택한 수단은 문학이었다. 특히 시를 통해 (그중에서도 릴케의 시와 윤동주의 시를 통해) 죽음의 상징성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되고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음을 더 제대로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시작으로 하여 그 연장선에서 이제 '한국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인의 죽음을 일반론적인 죽음과 꼬집에 비교해가면서 얘기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필자로서는 너무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다. 또한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개별론을 하자는 그 말이 다른 민족들은 절대로 못 가진, 그래서 딱 한국인만이 갖는 죽음만을 족집게로 집어내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 또한 필자에게는 과분하게 힘들고 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굳이 한국인의 죽음을 얘기하자고 나선 것은, 한국 민속 현장과 민간신앙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한국적 현장 속의 죽음을 얘기하고자 하는 기도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인만의 죽음이란 뜻으로 사뭇 좁혀서 한국인의 죽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민속과 민간신앙 현장에 있는 죽음이 지닌 그 한국적 현상성 때문에 한국인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자는 것뿐이다. (p. 75~76)

저자가 미리 당부하듯이 '한국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학문적 갈래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설명은 한국의 민속학적 증거들을 기반으로 한국인이 과거에 어떻게 죽음을 생각했었는지 그 기원을 탐구해보는 과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말미에 저자가 덧붙였듯 그 탐구과정 또한 계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한국인이 의식했던 '죽음'의 단편들만을 모아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신화적으로도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수 있을 터였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여성, 그리고 '타(다른곳, 다른 물건, 다른 사람 등)' 또는 낯선 것과 함께 '3대 부정'이라고도 부를 만한 것이다. (p. 106) 앞은 항시 남이고 뒤가 북이고 보면, 사방행위, 인체방위, 지세방위 등이 세 겹으로 엉기게도 되는 것이다. 알기 쉽게 요약하면, 앞=들=남, 뒤=골짝=북과 같이 묶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산을 앞산이라고 하고, 북곡을 뒷실이라고 불고 있음을 듣게 된다. (p. 117) 산 사람의 머리는 동네 아래로 향하고, 죽은 이는 그 머리를 위를 향해서 두고 있다. 그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다. (p. 119) 진북이나 자북이 기준이 된 동향이 아닌 것이 원삼국시대, 신라의 죽은 이들의 머리 방향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그때그때 계절에 따라 옮아가는 태양 중심의 방위에 의거한 것이다. (p. 129)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목숨 어린 방위로 향하여 살았던 그 동남의 방위에다 옛신라인들은 죽은 이를 자리잡게 한 것이다. 밝고 따뜻한 방위에서 잠들게 한 것이다. (p. 133) 산봉우리의 방위로 누운 시신의 머리 방향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지어야 할 몸시늉이다. (p. 138) 상고대의 한반도 북쪽사회에서는 중장제가 시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p. 139) 뼈가 영혼의 참다운 집이라면, 어차피 쉽게 삭을 살은 빨리 없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p. 140) 서해안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는 초분이 있었다. (p. 145) 영혼의 구원이 없는 저승관은 종교론적으로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불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이란 현실에서 볼 때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 한국인의 이른바 현실주의, 종교적 믿음에 있어서의 기복의 현실주의는 실상 이 저승관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 161)

한반도에서의 고대묘지문화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관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연지형인 산봉우리가 꼭 한방향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죽은자의 머리 방향은 동서남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신라인의 방위는 독특했다. 해바라기라... 신라금관에서 상징된 푸나무와 사슴뿔 이야기는 더욱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와 구분짓게 하는 것이라서 고고학관련 책에서 읽은 유목민족설이 생각나기도 했다. '중장제'와 '초분'을 통해 '뼈'를 중시하는 것은 비좁은 땅에 묘를 세울 수 없는 경제성을 따지기 전에 있었던 저승관이라는 점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했다. '뼈를 묻겠다' 라는 결심이 우리나라 언어습관에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저승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먼 과거의 저승관이 현재 한국에 유래된 외국종교에서조차 한국인들은 기복신앙으로 믿음을 형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기도 했다. 단옹관과 처용무, 심청전, 학연화대, 무령왕릉 그리고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연말 나례행사까지도 그러한 고대의 '죽음관'이 배어져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한데 이들 세 가지 죽음은(안락사, 뇌사, 자연사) 한결같이 의사에게 맡겨진 죽음이다. 선택도 판단도 모두 의학에 의탁되어 있다. 그만큼 전적으로 생리현상화된 죽음이 이제 사뭇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물리와 생리에 속할 뿐이다. (p. 182) 규모가 클수록 겉이 화려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소실의 효과, 지워없애기의 효능은 커지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 장례라는 절차가 진행된다. 기왕의 죽음을 한 번 더 완벽하게 죽이기 위한 짓이다. 이제 죽음이 죽었다. (p. 192) 오늘의 죽음에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그에 수반되어서 오늘의 죽음에는 통과의례가 없거나 불완전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게 된다. (중략)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통로가 폐절되고 만다. (p. 231) 거기에는 우리의 바리데기 신화도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도 보다 더 거슬러올라가서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도 있을 수 없다. (p. 232)

과거의 현재의 죽음관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해 저자가 풀어낸 장레문화의 변화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승화의 단계'를 거쳐 조상신化 했다. 그러고보니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어 신이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아주 드문일이었던데 반해 우리네 문화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신이 될 수 있었다. 그 신이 귀신이건 조상신이건 여하튼 '신'이 될수 있었구나 하는 것이 이 책이 느끼게 한 또다른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여하튼, 과거엔 죽음이 죽음이 아니었으나 현재는 죽음도 죽어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한편, 고조선 신화에서의 '웅녀' 의 상징성과 '바리데기'의 신화적 의미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고조선의 웅녀는 단순히 곰에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바리데기공주는 단순히 동화속 공주가 아니었다. 우리네 신화도 그리스신화나 수메르신화 가 품은 문제의식과 이상향을 충분히 품어안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조차 없다고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신화 곧 풀이는 신의 근본과 내력에 관한 얘기다. 신화는 '풀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p. 284) 동화속의 수탐이 궁극적으로는 주인공 자신의 개인적·세속적 영달에 이르러 마무리지워지고 있음에 비해 바리데기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구제, 나아가서는 남들의 구제, 인간 일반의 구제에까지 그 수탐의 여행은 작용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탐의 경로가 천문학적이고 우주론적이다. 우주적인 규모에서 인류적 범주에 걸친 수탐을 행함에 있어 바리데기는 자신이 신화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리데기는 신화적 인간 구원자다. (p. 290) 한국 민속에서도 볼 수 있는 약물사상은 이 민담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범세계적인 이 얘기는 그 원천도 어지간히 먼 과거로 소급한다. 바빌로니아 신화에는 죽음 탐무즈를 위해 이슈타르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략) 물론 우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낳은 이슈타르 얘기와 바리데기 신화를 직접 맞대놓고 그 양자간의 관계를 운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얘기가 이른바 '오르페우스'얘기로 유형화된다. 그 분포가 구라파 전역은 물론 아시아를 포괄하고 북미대륙의 원주민 세계에까지 퍼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리데기 신화의 특색이 단순히 한국문화라는 범역 안에서만 해명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p. 291)

수메르나 바빌로니아까지 소급하는 'E 80' 이라는 '오르페우스' 모티브는 해당지역의 샤머니즘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신화 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신화가 아니라 동화로 왠지 그 격을 낮추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형적 모티브 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같은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다. 어디가 먼저이고 무엇이 더 다채로운지 를 비교하기보다 '모티브'적으로 '원형적'으로 그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면 한국신화는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이다. 이 책의 '4부' 내용은 <새롭게 만나는 한국 신화> 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죽음이 떠나감이나 나그네길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바리데기'는 말해주고 있다. 생명의 꽃이 피고 목숨의 물이 샘솟는 곳이 저승이다. 그곳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원천이고 본향이다. (중략) 그것은 불행히도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들이 놓쳐버린 죽음이다. '돌아가는 죽음', '복귀하는 죽음'은 '떠나가는 죽음'에 떠밀려서 죽고 만 셈이다. (p. 310)

우리네 민속과 신화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고유의 '관념'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어떤 관념이 더 나은지 판단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변화와 상실의 추이를 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현재의 죽음관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니까.

사람끼리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들기 마련이다. 다른 객체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낯이 익는다는 것, 눈에 자주 든다는 것, 그것은 정붙이기의 전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정을 붙이자면 그리하여 죽음과의 친화를 일구어 내자면 죽음과 자주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삶이 죽음과 정을 붙여야 한다. (p. 347)

고루 살피지는 못했다. 몇 갈래의 항목으로 우리들의 죽음을 살폈으나 항목마다 구석구석 아쉬움이 남아 있고, 다루지 못한 큰 항목도 남겨져 있다. (중략) 이런 결격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옛 죽음의 국면에 관해 말하면서, 죽음을 거울 삼아 드러날 뻔한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추어내는 것에 유념하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옛 죽음이 오늘에 끼친 그림자 같은 것도 조금씩 들여다보고자 했다. (p. 366)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p. 369)

글을 읽으며 시대를 알 수 없었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가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가늠이 되야 좀더 잘 공감될 것 같았다. 검색해보니 2001년에 나왔던 책이 20년만에 다시 새옷을 입고 나온 것 같다. 한국인의 저승관이 죽음론이 그 20년간 그닥 변한것 같지는 않다. 저자의 글은 고(古)어체의 느낌을 주지만 현대어로 읽는데 무리는 없었다.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저자의 통찰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메멘토 모리'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 아니겠는가. 잘 살고 싶은 만큼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시간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의 노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2
이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통이어도 보통이 아니어도 충분한 우리 모두를 위한 이야기

"어쩌면 나는 여전히 보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인트>라는 작품으로 청소년문학의 자리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굵게 새긴 이희영 작가의 신작이다.

'18세 애늙이 아들, 34세 철없는 엄마' 라는 힌트에서 미혼모 모자자의 어떤 신파적 스토리를 예상한다면 그 예상은 전혀, 전혀 맞는 부분이 없을 것이다.^^

최지혜 씨는 디자인을 먼저 봤다. 나는 가격표를 흘낏거렸다. '미친거 아니야?' 이 한마디를 어금니 사이로 짓씹었다. (p. 7)

"됐어.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마음에 들어. 그냥 그거 해. 이제 곧 추워질 거야. 제대로 된 점퍼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래요. 누나가 사 주는 건데. 좋겠다. 누나가 동생 옷도 사 주고"

짝짝 박수를 치는 종업원을 향해 최지혜 씨가 은근한 미소를 보냈다.

"누나 아닌데요"

그런가 보다, 할 것을 우리의 최지혜 씨는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들이에요, 제가 낳은 아들" (p. 8)

"결혼 일찍 하는 것도 정말 좋은 거 같아요. 아빠가 크신가 보다."

"나 결혼 안 했는데. 그리고 우리 아들은 아빠 없어요"

싱긋이 웃는 엄마와 달리 점원은 아예 울어 버릴 기세다. (p. 9)

최노을. 고2의 훤칠한 남학생이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노을이에겐 가족이라곤 엄마 한명, 친구라고는 성하 한명 뿐이었다. 그 한명 뿐인 친구가 생기기 전의 엄마와 단둘만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서로 한팀으로 믿고 의지하며 당차게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고2 아들은 애늙은이가 34세 엄마는 철없는 엄마로 보여지게 됐을 뿐이다.

엄마는 부러 나이 들게 꾸민다거나 노숙한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언제나 자유로운 모습으로 생활했고 나도 그런 엄마를 한 번도 창피해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남들에게 굳이 우리 모자의 'Too Much Information'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은 늘 한결같다. (p. 11)

열 여섯 살 차이나는 모자. 고1때 아들을 낳은 엄마를 아들은 창피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세상에 처신하는 방법을 엄마보다 어쩌면 아들이 먼저 터득한 것도 같은 상황이 됐다. 자신을 낳기 위해 가족과도 의절하고 어린 나이에 홀로 세상과 맞서기 시작한 엄마를 보며 큰 아들은 조숙하다면 조숙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어린 나이였다. 그 미숙함이 '청소년 소설' 특유의 성장하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소용없었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니. 왜 자신들의 생각을 멋대로 진실이라 믿는 걸까? 성하가 학원에서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 했을때? 나는 신을 향해 당당히 맹세할 수 있었다. 양파 표피 세포 하나만큼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반가웠다. (p. 24)

고2아들과 젊은 엄마의 설정도 사실 '보통'이라고 할 수 없는 가정환경 인데, 하나뿐인 친구 성하는 여자다. 그러니까, '여자 사람 친구' 하지만 정말정말정말 두 사람은 '친구' 다. 제일 친한 절친이자 어려서부터 유일하다시피한 친구가 여자라는 것도 어쩌면 '보통' 이 아닌 셈이다. 소설을 읽을 수록 노을이에겐 '보통'이 아닌 것들을 하나하나 늘어만 간다. 노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보통의 삶'인데 말이다.

벌써 5년이다. 어리게만 보이던 남자가 오직 한 여자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봐 온 시간이. 정말 미련하다 못해 답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p. 35)

최근 엄마에게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노을은 늘 원해왔다. 엄마가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자신에게 아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남자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노을의 머리를 복잡하다 못해 터질 지경의 고민에 빠뜨리게 된다.

이런 나를 보며 모두들 독하다고 말하는데, 10대라고 무조건 게임에 열광하리란 건 명백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독한 게 아니라 그저 나랑 만지 않을 뿐이다. '대한민국10대=게임'은 너무 단순한 공식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집안일 하는 게 몇 배 더 마음 편한 열여덟도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p. 40)

보통이 아닌 상황들이 늘어나지만 작품 속에서 화자인 노을의 말투는 항상 생기발랄하다. 가볍지 않음을 가볍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청소년문학의 매력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대한민국10대=게임' 이 일반화의 오류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다...;;; ㅠㅠ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친근하게 부르는 아빠가 아닌 지극히 생물학적인 관계로서의 아버지 말이다. 내 입에서는 단 한번도 '아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묻고 싶지 않았다. (p. 52)

내가 세상에 빛을 본 순간부터 오늘까지 엄마는 하루를 48시간처럼 살아왔으니까. 최지혜씨에게는 어쩌면 외로움조차 사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바란다. 엄마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가슴 따뜻한 사랑이라는 것을 해 봤으면, 하고 말이다. (p. 56)

게임도 안하고 집안일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본인의 연애엔 관심없고 엄마의 연애에 온통 신경쓰는 열여덞 아들이라니~! 잘 컸네, 잘 컸어!!!

나는 정확한 시급 외에 모든 돈을 다시 금고에 넣어 두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일한 만큼만 받고 싶었다. 남에게 괜한 호의를 받는 게 싫었다.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히기 싫어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싶었다. 똑같이 잘못을 해도 사람들은 내게 다른 시선을 던지니까. 그 누구도 나를 보며 혹은 엄마를 향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가급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중략)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다름과 틀림을 똑같이 여기곤 한다. (p. 59)

노을인 주말이면 성하네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성하의 아버지는 노을이 엄마의 공방이 있는 건물에서 중국집을 하신다. 그런데 이 중국집은 배달을 하지 않는다. 이또한 보통이 아니라면 보통이 아닌 사항이 노을에게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그 여자애 나 소개해 달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구를 누구에게 소개해 달라고?

"그 성하라는 애, 너랑은 그냥 친구 사이라면서. 왜, 안 돼?"

노을이에게 고민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녀석인 동우가 어느날 우연히 성화와 노을이 함께 다니는 걸 보고는 성하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 성하가 갑자기 여자로 보이게 된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를 소개시켜 줘 본 적은 없다. 동우가 친구인건 맞다. 하지만 동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굳이 캐려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묶어준 친구 사이였다. 그런 둘을 소개시켜줘도 될까?

"엄마가 좀 평범한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는 것 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 누군데? 아니, 평범함이 대체 뭔데?" (p. 106)

평범한 사랑이란 뭘까? 사랑에 관해 과연 평범함이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은 오히려 특별함 아니야?" (p. 121)

"괜찮다고 한마디 해 줘. 누구보다 당사자가 제일 힘들 테니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에 나쁜 사랑은 없어."

녀석이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픈 사랑은 있겠지만" (p. 125)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동우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상대가 엄마라면 그렇게 쉽게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았냐?' (p. 127)

엄마는 아니 최지혜씨는 노을에게 굳이 설명하려 하지도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아니, 노을이가 아직 물어보지 않았다. 동우에게 '평범한 사람'이 뭘까 물었을때 들은 동우의 답변은 자신의 상황에 맞는 답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이때의 동우의 대답은 노을이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한 거이었다. 노을이에게 보통이 아닌 상황이 본인도 모르게 또 추가된 것이라고나 할까.

"전에도 네가 한번 말했지? 평범한 삶, 보통의 인생"

귓가에 성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도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그냥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같지 않을까?" (p. 143)

세상은 점점 더 평범함과 보통을 잃어 갔다. 평균으로 삼아야 할 것도, 기준으로 내세워야 할 법칙도 시나브로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다행일 때도, 때문에 불행일 때도 있었따. 더 이상 학벌로만 성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과거엔 평범한 삶이라 말했던 삶 역시 쉽게 꿈꿀 수 없게 되었다.

"보통의 삶 따위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아" (p. 144)

처음엔 '보통'의 삶, '평균'적인 삶이 분명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을이의 고민이 십분 이해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원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보통의 삶' 이 뭐냐고. 그런 '평균적인 삶' 이 있긴 하냐고. 모두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그러한 '삶'이 과연 모두가 원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그런 '보통'은 없기에, 그런 '평균'은 없기에, 모두가 다 있을 거라며 믿으며 찾아 헤매는 것 아닐까, 이루고 싶지만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노을이 꿈꾸는 '보통'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그 본격적인 경험은 책을 읽으며 하는 걸로~!^^

ps. 역시 청소년문학이 재미있다. 서사 흥미진진하고 메시지 정확하고 결말 깔끔하고.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가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를 알리는 이 안내글 속에 내가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이미 들어가 있다.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

새로운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통해 그 작가와 그 작품과 그 모두를 포함한 사회를 읽어나가는 과정은 늘 신선한 기대를 품게 한다. 이 작가는 어떤 작가일까?...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첫 문장은 남겨두자. 바뀌지 않는 것도 있어야지. 이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니까.

첫 장면까지도 그대로 쓸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숙취를 처음 겪고 쓴 일기를 가져와 만든 문단들이다.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연민적이고 고쳐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어느 쪽도 공정하지는 않다. (p. 9)

이 소설의 첫 문단에서 이 소설은 다시 쓰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이 내용은 뒤에 덧붙인 작가의 에세이를 통해 어떻게 다시 쓰게 된 작품인지 알게 되기도 한다. 썼던 소설을 다시 고쳐쓰는 것은 작품속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기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작가가 고쳐 쓴 과정이기도 하다.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연민적이고 고쳐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라는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중 사람들은 무엇을 더 많이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

각각의 이유로 우리 둘은 그해 봄의 커다란 우리들, 에서 빠져나와 각자 남았다. (p. 16)

단편집이라 그런지 내용의 서사적 전개 자체보다도 문장의 표현들이 좋았다. 이 작품은 9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의 상봉 일수도 있고 애인과의 해후일수도 있는 몇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예라는 글자는 예의 이름 끝에 들어갔다. 내 이름 앞 글자인 서 자와 같은 자였다. 미리 예 豫, 펼칠 서 豫,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서로, 그애의 이름에서는 예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p. 21)

그런 한자들이 있다. 여러 뜻을 지녔거나 한가지 음이 아닌 한자들이. 내 이름에도 그런 한자가 들어간다. 새로 알게된 이 한자가 반가워서 찾아보았으나 펼칠 서 라는 한자로는 검색되지 않았다. 지금은 미리 예 로만 쓰이나 보다. 여하튼, 이 책속에서는 이름이 온전히 등장하는 적이 없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 지금 서율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서울은 나한테 도시가 아니고 상태인 것 같아. 겨울이 와도 나는 서울. 겨울이 가도 나는 서울.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이 나는 서울이야. 그러다 예는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서울이야? (p. 34)

명사를 형용사로 쓴다는 것은 분명 다른 느낌이다. 게다가 명사중에서도 도시의 이름으로 상태를 드러낸다는 것은 신선한 표현이었다. 여기서 '서울'이라는 상태는 예와 서 라는 두 여자만이 공감하는 그런 '상태'다. 하지만 둘 다 동시에 '서울'인 상태였는지는...

< 호르몬이 그랬어 >

그 무렵부터의 내 생활은 철저하게 화학적인 것이었다. 몸이 더 이상 잠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자고, 의식이 명료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워 있는다. 위산이 많이 분비되어 속이 쓰리기시작하면 밥을 먹고, 식사 후에는 뇌에 공급되어야 할 혈액이 소화기로 가면서 자연스레 오는 식곤증에 순응해 잠을 잔다. 깨어 있는 동안은 그날 호르몬의 균형에 따라 날카롭거나 무디거나 즐겁거나 침울하다. 자고 나면 그 잠 너머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도 일종의 화학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이 기억을 혐오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 (p. 45)

대학을 졸업했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본격적인 취업준비라는 미명아래 백수인 '나'는 얼마전 남자친구에게서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처구니없지만, 어쨌든, 진짜로 헤어진 것이 맞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아졌다' (p. 46)

'알아졌다' 라... 그렇다. 닥친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한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의적이지 않기에 내게서 능동성이 떨어질 경우 더욱 더디게 수동적으로 나에게 체득된다. 이름 중의 한글자로도 표현되지 않는 이 애인은 작품 속에서 그냥 '누군가' 이다. 그 누군가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잘 지내지?

나는 누군가의 물음이 잘 지내니? 가 아닌 잘 지내지? 인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정말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스러움이 아니라, 당연히 잘 지내고 있지 않겠느냐는 투의 단정이 질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p. 52)

작품 속 여성의 입장에선 저 감정이 공감가다가도 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다. '잘 지내지?' 라는 안부는 사실 무책임을 깔고 있는 질문이다. 이 문장의 앞에 '내가 없었어도'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잘 지내니?' 라는 안부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내맘도 모를거면서 다 안다는 듯이 선수를 치는 걱정이 때론 더 불편하기 마련이므로.

엄마의 애인이 사준 비싼 패딩이 날씨에 맞지 않아 땀을 흘리면서도 보풀이 일어난 셔츠소매를 보이고 싶지 않아 계속 입고 있는 채로 마주앉은 '누군가'의 시선은 '나'가 처한 현실을 더 말할 수 없이 '알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야, 호르몬이 그랬어'

< 총 塚 > (*능 은 왕 또는 비 의 무덤을, 묘 는 그 외 모든 무덤을 가리킨다. 총 은 주인이 없는 빈 무덤이다.)

제목에 붙은 설명에서 새삼스레 '총'의 의미를 알았다. 천마총이 주인 없는 무덤인 거였구나 싶고... ㅎ

너는 내가 화를 내는 것을 싫어했다. 너는 왜 슬프면 화를 내? 라고 했던가, 너한테는 슬퍼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던 거지 라고 했던가. 모두 네가 했던 말일 수도 있다.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나를 싫어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을 수도 있다. (p. 87)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다고 해야 하나 젊다고 하기엔 아직 어리다고 해야 하나 싶은 이십대 초반의 커플의 삶은... 너무... 가난하다. 너무... 가난해서 웨딩드레스는 커녕 전세방 한번 경험해보지 못한 애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때 남자는 납골당의 관리비마저 버거운 상황이었다. 남자는 납골당에 가서 몰래 단지를 꺼내오려 마음먹는다.

기차는 거대한 너의 무덤을 천천히 빠져 나갔다. (p. 107)

주인 없는 무덤 '총'은 어디라고 해야 할까... 단지를 꺼낸 납골당의 작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있으나 어디 있을지 모를 도시라고 해야 할까 단지를 두고 싶었으나 두지 못한채 향하는 도시라고 해야 하나...

< 에세이 - …… 라고 썼다 >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그 뒤에 붙은 이 '에세이'는 작가후기이자 에세이이자 해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털어놓는 솔직한 삶은 작가가 쓴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 본인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함과 동시에 작가-작품-독자 사이의 상상력을 더 부풀려 놓기도 한다. 작가의 에세이는 그래서 하나의 '작품' 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십대 초반에 쓰고 삼심대 초반-근래…에 고쳐 쓴 작품들로, 당시의 제가 삼십대 초반인 저처럼 작품을 쓸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저 또한 이십대 초반의 저처럼은 쓸 수 없습니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해온 단편 작업들 사이에 이 세 편을 자연스럽게 섞을 수 없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못한 의미에서든 이 작품들은 돌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십대 초반의 나는 어떤 작가였는지를…… 해명하기를…… 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전에 왜 이 해명을 필사적으로 피해왔는지도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다. (p. 112~113)

작가가 털어놓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문체의 개성 때문인지 소설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의 분위기는 황정은 이나 김애란 을 생각나게 했다. 단편이 가진 특성상의 어두움 때문인지 작가의 삶이 투영된 작품 특성으로서의 어두움 때문인지 여하튼 밝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라도...

가난이라는 것.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피가 안 나는 척하는 기분으로 늘 살았다. (p. 119)

아직 젊은 나이던데 이 작가의 나이에도 이런 성장을 하고 있구나 하는 나와는 다른 세대와의 동시대성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하튼,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좋아지는 책이다. 작품 < 에세이 < 해설 이랄까. 윤경희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이 책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내가 '어두움'으로 느낀 것을 '겨울'로 표현한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게.

< 해설 - 겨울의 습작 >

우리가 쓰는 모든 것이 작품의 이름으로 출판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쓰는 자 본인은 늘 주지하지만 책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름 아래 묶인 단행본은 최종과 완성에 도달한, 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다고 간주된, 글쓰기를 담는 물적 형식이자 독자가 가장 손쉽게 접근하고 소장할 수 있는 상품이다. 세련된 마감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출판 경향은 책은 원재료인 글쓰기에 최상의 외적 형태로서 주어지고, 매끈하게 편집되고 장정된 책은 그것이 독자적 사물로 생산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동, 시행착오, 실패와 침묵, 포기와 망각, 거듭된 퇴고와 수정의 끈질긴 시간이 들었다는 사실을 자칫 가리기도 한다. (p. 125)

그런데 주의 깊은 독자가 완결된 작품을 넘어 책에서 더 읽어내고 싶은 것은, 작가와 편집자의 눈에는 언제고 생생할, 바로 이러한 유령적 기미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따금 감지되는데, 주로, 곁텍스트paratext라 명명된, 텍스트 본체의 앞뒤에 부가된 작가 소개문, 작가의 말, 주석, 수록작의 본래 발표 시기와 지면 정보, 표 등에서이다. 곁텍스트는 책에 수록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결코 아니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작품은 온전한 내적 독자성을 보유한다는 만성적 착오를, 곁텍스트라는 복수적 이질의 존재는 파열시킨다. 곁텍스트는 작품에서 억압되거나 누락된 것과 넘쳐 새오 나온 잉여를 받아 담는 장소다. (p. 126)

나는 이 '곁텍스트'를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작품을 읽기전 표지와 날개에 적힌 정보들을 꼼꼼이 살피고 때론 검색을 해서라도 작품 이외의 정보를 작품과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에세이' 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해설'에서 작품 자체에 대해 문장 하나 분석하는 것이 아닌 책과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키는 서술이 기존 해설들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고 이 책에서는 '곁텍스트'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오늘의 미제와 결핌에서 내일의 작가적 생이 연장된다. 습작의 문학과 함께 동시대인들에게도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색과 연습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p. 135)

내가 어려워하는 단편 특유의 모호함이 너무나 강한 작품들이었기에 '에세이' 와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에 대한 인상을 내가 뭐라고 남겼을지 모르겠다. 박서련 작가를 처음 알게 한 책이고 서사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문장들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작가의 다음 책을 궁금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의 소설 같은 '에세이' 와 '결핍'을 통한 연장으로 기대감을 품게 하는 '해설'로 인해 아마도 나난 박서련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아직은 더 궁금하고 어쨌든 작가는 계속 다시 시작할 것 같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