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열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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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과 민속학을 가로질러 한국적 서사로 승화한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가

남긴 한글로 쓰여진 단 한 권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 모노그래프'

생활에선 죽은 언어이지만 학문에선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언어인 라틴어를 우리는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우리나라 속담만큼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카르페디엠' 과 '메멘토 모리' 가 아닐까. '현재에 충실하라' 와 '죽음을 기억하라' 는 이 문구는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양극한을 알려주고 있는 문구이기에 언어를 떠나서 의미적으로 모두에게 각인되는 것 같다. 삶과 죽음으로.

'한국학의 거장' 이라는데 '김열규 라는 이름 석자는 내게 낯설었다. 그 이름 석자보다도 더 낯설었던 것이 '한국학'이라는 단어였다. 그런... 학문이... 있었나?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기에 궁금해진 책이기도 했지만,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우리들이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이라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곧 인간의 죽음이란 얘기는 단단히 또 똑똒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 강조와 더불어 인간의 죽음, 생물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없어지는 것 뿐이다. 잘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못된다.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맞는다. 인간은 그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갖는 지상의 존재 이유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8)

인간은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것은 생물학을 벗어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 그 자체를 죽음에서 버림받지 않게 하려구 하기 때문이다. (p. 10)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 죽음, 그것으로 인간은 자연과 결별한 것이다. (p. 12)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p. 14) 이 효성에는 짙은 자책감이 그늘을 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 21) '열녀'라는 관념에는 '늘'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죽음이 따라붙고 있다. (p. 23) 효와 열은 때로 효열이라고 한 묶음으로 일컬어졌다. (중략) 삶에서 퇴거할 수 없는 죽음, 그런 묘한 죽음이 있게 된 것이다. (p. 24)

<프롤로그 - 한국인의 죽음론을 위한 서설>

저자는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한 학자였다고 한다. 활발한 연구 활동과 저서를 남기고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 인생 60년에 대해 '한국인의 질박한 삶의 궤적에 천착한 대표적인 한국학의 거장'이라고 수식어구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한국인들의 '죽음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공과 연륜이 빚어낼 통찰이 궁금해지게 하는 서설이었다.

'죽음' 이라는 것은 생명을 지난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간'만의 개념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같은 땅에서 오랜 세월 역사를 쌓아온 한국인만의 독특한 '죽음론' 을 고찰한다는 점도 의미있어 보였다. 한국땅에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것일까?

죽음이란 그 자체가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죽음이 타자라는 것이 절망스러운 것이다. 내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는 것이 최후의 나의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 그건 우리가 경험할 최대의 아이러니다. 그렇다. 죽음은 우리들 몫인 가장 무망한 아이러니다. (p. 42) 죽음으로 해서 생은 에누리 없이 일회로 제약되고 만다. 한데 이 죽음으로 한계지워지는 생의 일회성이야말로 생의 진지함이며 집요함의 혹은 열정의 근거라고 릴케는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p. 47)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올 것임을 알고 있는 존재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죽음을 사고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존재다. (p. 49) 영원한 미래의 시제, 영원한 미래의 공간 속으로 옮겨앉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피안이란 것을 생각해냈다. (p. 54) 그래서 삶이 적극적인 뜻을 지닌다고 하면, 영원한 미래시제의 그 영토까지 다다를 차표를 얻어내거나, 채비를 하는 절차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p. 55) 이때 큰 함정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 사뭇 쓰잘것없는 것이거나 하잘것없는 계기에 불과하게 내버려져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p. 60) 죽음 때문에 우리가 삶을 등져서는 안 된다. 아니 단연코 그 거꾸로라야 한다. (중략) 죽음 때문에 우리들은 삶에 달라붙어야 한다. 그 죽음으로 해서 잃어질 삶이라면, 아니 결정적으로 잃어지게 되어 있는 게 삶이라면 우리들은 한사코 그 삶에 마음을 붙여야 하고 사랑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은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p. 63)

저자가 '죽음' 에 대해 일반적인 고찰을 위해 선택한 수단은 문학이었다. 특히 시를 통해 (그중에서도 릴케의 시와 윤동주의 시를 통해) 죽음의 상징성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서는 안되고 삶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음을 더 제대로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시작으로 하여 그 연장선에서 이제 '한국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한국인의 죽음을 일반론적인 죽음과 꼬집에 비교해가면서 얘기할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필자로서는 너무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다. 또한 한국인의 죽음에 관한 개별론을 하자는 그 말이 다른 민족들은 절대로 못 가진, 그래서 딱 한국인만이 갖는 죽음만을 족집게로 집어내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 또한 필자에게는 과분하게 힘들고 겨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굳이 한국인의 죽음을 얘기하자고 나선 것은, 한국 민속 현장과 민간신앙 현장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한국적 현장 속의 죽음을 얘기하고자 하는 기도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인만의 죽음이란 뜻으로 사뭇 좁혀서 한국인의 죽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민속과 민간신앙 현장에 있는 죽음이 지닌 그 한국적 현상성 때문에 한국인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자는 것뿐이다. (p. 75~76)

저자가 미리 당부하듯이 '한국인의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학문적 갈래가 뚜렷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저자의 설명은 한국의 민속학적 증거들을 기반으로 한국인이 과거에 어떻게 죽음을 생각했었는지 그 기원을 탐구해보는 과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말미에 저자가 덧붙였듯 그 탐구과정 또한 계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한국인이 의식했던 '죽음'의 단편들만을 모아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신화적으로도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수 있을 터였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여성, 그리고 '타(다른곳, 다른 물건, 다른 사람 등)' 또는 낯선 것과 함께 '3대 부정'이라고도 부를 만한 것이다. (p. 106) 앞은 항시 남이고 뒤가 북이고 보면, 사방행위, 인체방위, 지세방위 등이 세 겹으로 엉기게도 되는 것이다. 알기 쉽게 요약하면, 앞=들=남, 뒤=골짝=북과 같이 묶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산을 앞산이라고 하고, 북곡을 뒷실이라고 불고 있음을 듣게 된다. (p. 117) 산 사람의 머리는 동네 아래로 향하고, 죽은 이는 그 머리를 위를 향해서 두고 있다. 그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다. (p. 119) 진북이나 자북이 기준이 된 동향이 아닌 것이 원삼국시대, 신라의 죽은 이들의 머리 방향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그때그때 계절에 따라 옮아가는 태양 중심의 방위에 의거한 것이다. (p. 129)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장 목숨 어린 방위로 향하여 살았던 그 동남의 방위에다 옛신라인들은 죽은 이를 자리잡게 한 것이다. 밝고 따뜻한 방위에서 잠들게 한 것이다. (p. 133) 산봉우리의 방위로 누운 시신의 머리 방향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지어야 할 몸시늉이다. (p. 138) 상고대의 한반도 북쪽사회에서는 중장제가 시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p. 139) 뼈가 영혼의 참다운 집이라면, 어차피 쉽게 삭을 살은 빨리 없어질수록 좋은 것이다. (p. 140) 서해안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는 초분이 있었다. (p. 145) 영혼의 구원이 없는 저승관은 종교론적으로는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불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이란 현실에서 볼 때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 한국인의 이른바 현실주의, 종교적 믿음에 있어서의 기복의 현실주의는 실상 이 저승관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 161)

한반도에서의 고대묘지문화를 통해 이승과 저승의 관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자연지형인 산봉우리가 꼭 한방향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죽은자의 머리 방향은 동서남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신라인의 방위는 독특했다. 해바라기라... 신라금관에서 상징된 푸나무와 사슴뿔 이야기는 더욱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와 구분짓게 하는 것이라서 고고학관련 책에서 읽은 유목민족설이 생각나기도 했다. '중장제'와 '초분'을 통해 '뼈'를 중시하는 것은 비좁은 땅에 묘를 세울 수 없는 경제성을 따지기 전에 있었던 저승관이라는 점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했다. '뼈를 묻겠다' 라는 결심이 우리나라 언어습관에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저승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먼 과거의 저승관이 현재 한국에 유래된 외국종교에서조차 한국인들은 기복신앙으로 믿음을 형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기도 했다. 단옹관과 처용무, 심청전, 학연화대, 무령왕릉 그리고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의 연말 나례행사까지도 그러한 고대의 '죽음관'이 배어져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한데 이들 세 가지 죽음은(안락사, 뇌사, 자연사) 한결같이 의사에게 맡겨진 죽음이다. 선택도 판단도 모두 의학에 의탁되어 있다. 그만큼 전적으로 생리현상화된 죽음이 이제 사뭇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물리와 생리에 속할 뿐이다. (p. 182) 규모가 클수록 겉이 화려할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소실의 효과, 지워없애기의 효능은 커지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각하기 위해서 장례라는 절차가 진행된다. 기왕의 죽음을 한 번 더 완벽하게 죽이기 위한 짓이다. 이제 죽음이 죽었다. (p. 192) 오늘의 죽음에는 내일도 미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그에 수반되어서 오늘의 죽음에는 통과의례가 없거나 불완전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게 된다. (중략)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통로가 폐절되고 만다. (p. 231) 거기에는 우리의 바리데기 신화도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도 보다 더 거슬러올라가서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도 있을 수 없다. (p. 232)

과거의 현재의 죽음관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해 저자가 풀어낸 장레문화의 변화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승화의 단계'를 거쳐 조상신化 했다. 그러고보니 서양에서는 사람이 죽어 신이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아주 드문일이었던데 반해 우리네 문화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신이 될 수 있었다. 그 신이 귀신이건 조상신이건 여하튼 '신'이 될수 있었구나 하는 것이 이 책이 느끼게 한 또다른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여하튼, 과거엔 죽음이 죽음이 아니었으나 현재는 죽음도 죽어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한편, 고조선 신화에서의 '웅녀' 의 상징성과 '바리데기'의 신화적 의미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고조선의 웅녀는 단순히 곰에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바리데기공주는 단순히 동화속 공주가 아니었다. 우리네 신화도 그리스신화나 수메르신화 가 품은 문제의식과 이상향을 충분히 품어안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다고 해서 의미조차 없다고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신화 곧 풀이는 신의 근본과 내력에 관한 얘기다. 신화는 '풀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p. 284) 동화속의 수탐이 궁극적으로는 주인공 자신의 개인적·세속적 영달에 이르러 마무리지워지고 있음에 비해 바리데기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구제, 나아가서는 남들의 구제, 인간 일반의 구제에까지 그 수탐의 여행은 작용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탐의 경로가 천문학적이고 우주론적이다. 우주적인 규모에서 인류적 범주에 걸친 수탐을 행함에 있어 바리데기는 자신이 신화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리데기는 신화적 인간 구원자다. (p. 290) 한국 민속에서도 볼 수 있는 약물사상은 이 민담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범세계적인 이 얘기는 그 원천도 어지간히 먼 과거로 소급한다. 바빌로니아 신화에는 죽음 탐무즈를 위해 이슈타르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략) 물론 우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가 낳은 이슈타르 얘기와 바리데기 신화를 직접 맞대놓고 그 양자간의 관계를 운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의 세계를 다녀오는 얘기가 이른바 '오르페우스'얘기로 유형화된다. 그 분포가 구라파 전역은 물론 아시아를 포괄하고 북미대륙의 원주민 세계에까지 퍼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바리데기 신화의 특색이 단순히 한국문화라는 범역 안에서만 해명할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p. 291)

수메르나 바빌로니아까지 소급하는 'E 80' 이라는 '오르페우스' 모티브는 해당지역의 샤머니즘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신화 라고 하면 그리스로마신화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른 것들은 신화가 아니라 동화로 왠지 그 격을 낮추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형적 모티브 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같은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다. 어디가 먼저이고 무엇이 더 다채로운지 를 비교하기보다 '모티브'적으로 '원형적'으로 그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따져본다면 한국신화는 분명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이다. 이 책의 '4부' 내용은 <새롭게 만나는 한국 신화> 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죽음이 떠나감이나 나그네길이 아니라 돌아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바리데기'는 말해주고 있다. 생명의 꽃이 피고 목숨의 물이 샘솟는 곳이 저승이다. 그곳은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원천이고 본향이다. (중략) 그것은 불행히도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들이 놓쳐버린 죽음이다. '돌아가는 죽음', '복귀하는 죽음'은 '떠나가는 죽음'에 떠밀려서 죽고 만 셈이다. (p. 310)

우리네 민속과 신화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고유의 '관념'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하여 어떤 관념이 더 나은지 판단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 변화와 상실의 추이를 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현재의 죽음관이 행복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니까.

사람끼리도 자주 만나야 정이 들기 마련이다. 다른 객체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낯이 익는다는 것, 눈에 자주 든다는 것, 그것은 정붙이기의 전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정을 붙이자면 그리하여 죽음과의 친화를 일구어 내자면 죽음과 자주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마음으로 만나야 한다. 삶이 죽음과 정을 붙여야 한다. (p. 347)

고루 살피지는 못했다. 몇 갈래의 항목으로 우리들의 죽음을 살폈으나 항목마다 구석구석 아쉬움이 남아 있고, 다루지 못한 큰 항목도 남겨져 있다. (중략) 이런 결격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옛 죽음의 국면에 관해 말하면서, 죽음을 거울 삼아 드러날 뻔한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추어내는 것에 유념하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옛 죽음이 오늘에 끼친 그림자 같은 것도 조금씩 들여다보고자 했다. (p. 366) 죽음의 손상으로 삶의 훼손이 단적으로 얘기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삶이 끊임없이 위협받듯이, 죽음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p. 369)

글을 읽으며 시대를 알 수 없었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가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가늠이 되야 좀더 잘 공감될 것 같았다. 검색해보니 2001년에 나왔던 책이 20년만에 다시 새옷을 입고 나온 것 같다. 한국인의 저승관이 죽음론이 그 20년간 그닥 변한것 같지는 않다. 저자의 글은 고(古)어체의 느낌을 주지만 현대어로 읽는데 무리는 없었다.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저자의 통찰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메멘토 모리'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잘 사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 아니겠는가. 잘 살고 싶은 만큼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시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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