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모든 것이 작품의 이름으로 출판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쓰는 자 본인은 늘 주지하지만 책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름 아래 묶인 단행본은 최종과 완성에 도달한, 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다고 간주된, 글쓰기를 담는 물적 형식이자 독자가 가장 손쉽게 접근하고 소장할 수 있는 상품이다. 세련된 마감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출판 경향은 책은 원재료인 글쓰기에 최상의 외적 형태로서 주어지고, 매끈하게 편집되고 장정된 책은 그것이 독자적 사물로 생산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동, 시행착오, 실패와 침묵, 포기와 망각, 거듭된 퇴고와 수정의 끈질긴 시간이 들었다는 사실을 자칫 가리기도 한다. (p. 125)
그런데 주의 깊은 독자가 완결된 작품을 넘어 책에서 더 읽어내고 싶은 것은, 작가와 편집자의 눈에는 언제고 생생할, 바로 이러한 유령적 기미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따금 감지되는데, 주로, 곁텍스트paratext라 명명된, 텍스트 본체의 앞뒤에 부가된 작가 소개문, 작가의 말, 주석, 수록작의 본래 발표 시기와 지면 정보, 표 등에서이다. 곁텍스트는 책에 수록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결코 아니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작품은 온전한 내적 독자성을 보유한다는 만성적 착오를, 곁텍스트라는 복수적 이질의 존재는 파열시킨다. 곁텍스트는 작품에서 억압되거나 누락된 것과 넘쳐 새오 나온 잉여를 받아 담는 장소다. (p.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