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이 그랬어 트리플 1
박서련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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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가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트리플 시리즈> 를 알리는 이 안내글 속에 내가 이 책에 대한 관심이 이미 들어가 있다.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

새로운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통해 그 작가와 그 작품과 그 모두를 포함한 사회를 읽어나가는 과정은 늘 신선한 기대를 품게 한다. 이 작가는 어떤 작가일까?...

<다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첫 문장은 남겨두자. 바뀌지 않는 것도 있어야지. 이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니까.

첫 장면까지도 그대로 쓸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숙취를 처음 겪고 쓴 일기를 가져와 만든 문단들이다.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연민적이고 고쳐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어느 쪽도 공정하지는 않다. (p. 9)

이 소설의 첫 문단에서 이 소설은 다시 쓰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이 내용은 뒤에 덧붙인 작가의 에세이를 통해 어떻게 다시 쓰게 된 작품인지 알게 되기도 한다. 썼던 소설을 다시 고쳐쓰는 것은 작품속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기법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작가가 고쳐 쓴 과정이기도 하다. '남겨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연민적이고 고쳐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라는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중 사람들은 무엇을 더 많이 선택하며 살고 있을까...

각각의 이유로 우리 둘은 그해 봄의 커다란 우리들, 에서 빠져나와 각자 남았다. (p. 16)

단편집이라 그런지 내용의 서사적 전개 자체보다도 문장의 표현들이 좋았다. 이 작품은 9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구와의 상봉 일수도 있고 애인과의 해후일수도 있는 몇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예라는 글자는 예의 이름 끝에 들어갔다. 내 이름 앞 글자인 서 자와 같은 자였다. 미리 예 豫, 펼칠 서 豫,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서로, 그애의 이름에서는 예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p. 21)

그런 한자들이 있다. 여러 뜻을 지녔거나 한가지 음이 아닌 한자들이. 내 이름에도 그런 한자가 들어간다. 새로 알게된 이 한자가 반가워서 찾아보았으나 펼칠 서 라는 한자로는 검색되지 않았다. 지금은 미리 예 로만 쓰이나 보다. 여하튼, 이 책속에서는 이름이 온전히 등장하는 적이 없었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나 지금 서율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서울은 나한테 도시가 아니고 상태인 것 같아. 겨울이 와도 나는 서울. 겨울이 가도 나는 서울.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이 나는 서울이야. 그러다 예는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서울이야? (p. 34)

명사를 형용사로 쓴다는 것은 분명 다른 느낌이다. 게다가 명사중에서도 도시의 이름으로 상태를 드러낸다는 것은 신선한 표현이었다. 여기서 '서울'이라는 상태는 예와 서 라는 두 여자만이 공감하는 그런 '상태'다. 하지만 둘 다 동시에 '서울'인 상태였는지는...

< 호르몬이 그랬어 >

그 무렵부터의 내 생활은 철저하게 화학적인 것이었다. 몸이 더 이상 잠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자고, 의식이 명료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워 있는다. 위산이 많이 분비되어 속이 쓰리기시작하면 밥을 먹고, 식사 후에는 뇌에 공급되어야 할 혈액이 소화기로 가면서 자연스레 오는 식곤증에 순응해 잠을 잔다. 깨어 있는 동안은 그날 호르몬의 균형에 따라 날카롭거나 무디거나 즐겁거나 침울하다. 자고 나면 그 잠 너머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도 일종의 화학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이 기억을 혐오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 (p. 45)

대학을 졸업했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본격적인 취업준비라는 미명아래 백수인 '나'는 얼마전 남자친구에게서 문자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처구니없지만, 어쨌든, 진짜로 헤어진 것이 맞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아졌다' (p. 46)

'알아졌다' 라... 그렇다. 닥친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도 못한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아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의적이지 않기에 내게서 능동성이 떨어질 경우 더욱 더디게 수동적으로 나에게 체득된다. 이름 중의 한글자로도 표현되지 않는 이 애인은 작품 속에서 그냥 '누군가' 이다. 그 누군가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다.

잘 지내지?

나는 누군가의 물음이 잘 지내니? 가 아닌 잘 지내지? 인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정말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스러움이 아니라, 당연히 잘 지내고 있지 않겠느냐는 투의 단정이 질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p. 52)

작품 속 여성의 입장에선 저 감정이 공감가다가도 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다. '잘 지내지?' 라는 안부는 사실 무책임을 깔고 있는 질문이다. 이 문장의 앞에 '내가 없었어도'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잘 지내니?' 라는 안부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내맘도 모를거면서 다 안다는 듯이 선수를 치는 걱정이 때론 더 불편하기 마련이므로.

엄마의 애인이 사준 비싼 패딩이 날씨에 맞지 않아 땀을 흘리면서도 보풀이 일어난 셔츠소매를 보이고 싶지 않아 계속 입고 있는 채로 마주앉은 '누군가'의 시선은 '나'가 처한 현실을 더 말할 수 없이 '알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야, 호르몬이 그랬어'

< 총 塚 > (*능 은 왕 또는 비 의 무덤을, 묘 는 그 외 모든 무덤을 가리킨다. 총 은 주인이 없는 빈 무덤이다.)

제목에 붙은 설명에서 새삼스레 '총'의 의미를 알았다. 천마총이 주인 없는 무덤인 거였구나 싶고... ㅎ

너는 내가 화를 내는 것을 싫어했다. 너는 왜 슬프면 화를 내? 라고 했던가, 너한테는 슬퍼하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던 거지 라고 했던가. 모두 네가 했던 말일 수도 있다.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화가 나 있는 나를 싫어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나였을 수도 있다. (p. 87)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다고 해야 하나 젊다고 하기엔 아직 어리다고 해야 하나 싶은 이십대 초반의 커플의 삶은... 너무... 가난하다. 너무... 가난해서 웨딩드레스는 커녕 전세방 한번 경험해보지 못한 애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때 남자는 납골당의 관리비마저 버거운 상황이었다. 남자는 납골당에 가서 몰래 단지를 꺼내오려 마음먹는다.

기차는 거대한 너의 무덤을 천천히 빠져 나갔다. (p. 107)

주인 없는 무덤 '총'은 어디라고 해야 할까... 단지를 꺼낸 납골당의 작은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단지 있으나 어디 있을지 모를 도시라고 해야 할까 단지를 두고 싶었으나 두지 못한채 향하는 도시라고 해야 하나...

< 에세이 - …… 라고 썼다 >

이 책은 세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그 뒤에 붙은 이 '에세이'는 작가후기이자 에세이이자 해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털어놓는 솔직한 삶은 작가가 쓴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 본인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함과 동시에 작가-작품-독자 사이의 상상력을 더 부풀려 놓기도 한다. 작가의 에세이는 그래서 하나의 '작품' 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십대 초반에 쓰고 삼심대 초반-근래…에 고쳐 쓴 작품들로, 당시의 제가 삼십대 초반인 저처럼 작품을 쓸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저 또한 이십대 초반의 저처럼은 쓸 수 없습니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해온 단편 작업들 사이에 이 세 편을 자연스럽게 섞을 수 없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렇지 못한 의미에서든 이 작품들은 돌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십대 초반의 나는 어떤 작가였는지를…… 해명하기를…… 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전에 왜 이 해명을 필사적으로 피해왔는지도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다. (p. 112~113)

작가가 털어놓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는 문체의 개성 때문인지 소설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의 분위기는 황정은 이나 김애란 을 생각나게 했다. 단편이 가진 특성상의 어두움 때문인지 작가의 삶이 투영된 작품 특성으로서의 어두움 때문인지 여하튼 밝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라도...

가난이라는 것.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피가 안 나는 척하는 기분으로 늘 살았다. (p. 119)

아직 젊은 나이던데 이 작가의 나이에도 이런 성장을 하고 있구나 하는 나와는 다른 세대와의 동시대성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하튼,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좋아지는 책이다. 작품 < 에세이 < 해설 이랄까. 윤경희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이 책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내가 '어두움'으로 느낀 것을 '겨울'로 표현한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게.

< 해설 - 겨울의 습작 >

우리가 쓰는 모든 것이 작품의 이름으로 출판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쓰는 자 본인은 늘 주지하지만 책 구매자의 입장에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름 아래 묶인 단행본은 최종과 완성에 도달한, 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다고 간주된, 글쓰기를 담는 물적 형식이자 독자가 가장 손쉽게 접근하고 소장할 수 있는 상품이다. 세련된 마감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출판 경향은 책은 원재료인 글쓰기에 최상의 외적 형태로서 주어지고, 매끈하게 편집되고 장정된 책은 그것이 독자적 사물로 생산되기까지 여러 사람의 노동, 시행착오, 실패와 침묵, 포기와 망각, 거듭된 퇴고와 수정의 끈질긴 시간이 들었다는 사실을 자칫 가리기도 한다. (p. 125)

그런데 주의 깊은 독자가 완결된 작품을 넘어 책에서 더 읽어내고 싶은 것은, 작가와 편집자의 눈에는 언제고 생생할, 바로 이러한 유령적 기미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따금 감지되는데, 주로, 곁텍스트paratext라 명명된, 텍스트 본체의 앞뒤에 부가된 작가 소개문, 작가의 말, 주석, 수록작의 본래 발표 시기와 지면 정보, 표 등에서이다. 곁텍스트는 책에 수록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결코 아니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작품은 온전한 내적 독자성을 보유한다는 만성적 착오를, 곁텍스트라는 복수적 이질의 존재는 파열시킨다. 곁텍스트는 작품에서 억압되거나 누락된 것과 넘쳐 새오 나온 잉여를 받아 담는 장소다. (p. 126)

나는 이 '곁텍스트'를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작품을 읽기전 표지와 날개에 적힌 정보들을 꼼꼼이 살피고 때론 검색을 해서라도 작품 이외의 정보를 작품과 연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에세이' 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해설'에서 작품 자체에 대해 문장 하나 분석하는 것이 아닌 책과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키는 서술이 기존 해설들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고 이 책에서는 '곁텍스트'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오늘의 미제와 결핌에서 내일의 작가적 생이 연장된다. 습작의 문학과 함께 동시대인들에게도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색과 연습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p. 135)

내가 어려워하는 단편 특유의 모호함이 너무나 강한 작품들이었기에 '에세이' 와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에 대한 인상을 내가 뭐라고 남겼을지 모르겠다. 박서련 작가를 처음 알게 한 책이고 서사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문장들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작가의 다음 책을 궁금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의 소설 같은 '에세이' 와 '결핍'을 통한 연장으로 기대감을 품게 하는 '해설'로 인해 아마도 나난 박서련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아직은 더 궁금하고 어쨌든 작가는 계속 다시 시작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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