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내 인생의 사서四書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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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중용]60수의 힘

 

저자의 이름은 못외웠어도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이라는 책 제목은 정말 많이 들어봤다. 사오년전쯤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기억이 안나는 걸로 보아 저자가 사십대에 썼던 논어 책을 제대로 못 읽은 것 같으니, 저자가 오십대에 쓴 중용 책은 잘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논어' 원전 완역본을 읽었는데, 그때도 이전에 읽었던 논어 관련 책이 기억이 안나서 그때는 내 기억력의 문제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서 알았다. 내 기억력도 문제는 문제지만,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은 논어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십, 중용을 읽어야 할 시간' 이 중용 책이 아닌 것처럼.

이 책은 중용에 대한 해설이나 번역을 중심으로 한 책이 아니다.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교수인 저자가 오십대의 나이에 생각해봄직한 화두들에 대해 중용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인생강의를 하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중용의 구절들이 순서대로 차근차근 나오면서 중용을 중심으로 내용이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순서상관없이 부분적 발췌를 해서 그 부분을 예로 들어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용을 잘 알고 있는 학자이기에 할 수 있는 말 들이기는 하나, 중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중용에 대해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을 읽고서도 논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하지만 중용 자체를 목적에 두고 읽는 것이 아니라, 오십대에 생각해보면 좋을 내용들을 인생조언처럼 여기며 이 책을 읽는다면 편안하고 수월하게 읽히는 책이다. 삶의 연륜이 꽤 쌓인 나이이긴 하나 아직 '지천명'을 깨닫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릴때 고전의 몇 마디 말로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들이 더 내려놓고 더 배우는 마음자세를 갖게끔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읽다보면 '중용' 을 제대로 읽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중용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뭔가 중간적이고 중심적이고 그래서 묵직하고 편안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데, 사실 중용은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잡하던 세력의 다툼 속에서 탄생한 중용은 그래서 더욱 나라의 중심을 군주의 중심을 개인의 중심을 강조하게 됐던 것인듯 싶다. 그래서 저자가 제일 처음 인용한 중용의 구절이 '소은행괴' 이다.

[중용] 하면 평온하고 차분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예상할 수 있다. [중용]은 극단이 판을 치는 '소은행괴'의 세상에서 주위에 널려 있고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평범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쉰의 나이도 조명이 쏟아지는 특별하고 화려함보다 공기처럼 편안하고 일상처럼 부담 없는 보통에 다시 눈이 가는 때다. 보통이 결국 오래가기 때문이다. [중용] 과 쉰의 나이는 평범함에서 잘 어울린다. (p. 21)

사회가 혼란할 수록 다양한 인간군상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중용이 필요했던 춘추전국 시대는 공감력 없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소은행괴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 인용된 구절들 중에는 공자의 말씀도 많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손자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연구했구나 싶기도 했다. 사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사상은 후대로 갈수록 반론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공자의 사상은 당대에 실패했기에 후대에 확산되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시대를 그렇게 망가트렸구나 하는 후회가 다음 시대는 제대로 바른 세상을 만들어보리라는 기대가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져 오게 한 것이 아닐까. 그때와는 또다른 소은행괴들이 판을 치는 현대에서 나이들어갈 수록 중용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생각이 그렇게 이여져 있는게 아닐까.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약한 것보다 더 두드러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주도적인 사람은 혼자 있는 상황에서 삼간다. (p. 44)

[중용]에서는 이중의 역설을 통해 나는 '자신을 알고 있는 나'를 속일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공적 공간에서 주의하는 만큼이나 사적 공간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에 대해 유학이 사람에게 숨 쉴 공간을 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할 수 있지만 자신을 전일적으로 통제하려는 도전으로 볼 수도 있다. (p. 47)

 

유학은 대부분 개인개인의 수양을 강조한다. 사실 한사람한사람이 다 각각 제대로 된 한사람한사람이면 그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저절로 올바른 사회가 될수밖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올바른 한사람한사람이 될 것을 공자왈맹자왈 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시 사람들이 중용대로 살기에 관심을 두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데도 이를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중용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보고 또 왜 중용대로 살아야 하는지 사람들을 설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 쓰인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p. 60)

공자는 중용대로 살 수 있지만 한 달 동안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가 중용대로 살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도 장기적으로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p. 61)

 

중용을 설파하는 공자님도 중용대로 사는 것이 한들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니... 그럼 공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범부들은 어쩌란 말인가? 중용을 배우란 말인가 배워도 소용없다는 말인가? 이 뒷 내용을 정말 주의깊게 읽었는데 어려운 이유는 나와도 해결법은 나오지 않았다. 어려운 이유는 말해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역시 중용을 완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걸까...

내가 자식으로 부모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자식을 키우면 되고, 부모로서 자식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부모를 모시면 된다. 핵심은 내가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무엇을 바라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바라는 바가 분명하지 않으니 자식과 부모에게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쩔쩔매게 된다. (p. 90)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었다. 좋은 말이었다. 내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뭔가를 기대할때 나도 자식으로서 그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뭔가를 기대할때 내가 내 자식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준다는 것이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하늘이 명령한 것을 본선이라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리라고 하고, 도리를 터득하는 것이 교육이다. (p. 107)

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은 사람이 천에게 명령을 받은 대로 살아야 하고 그 명령의 내용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라는 맥락으로 읽힌다. 사람은 천이 명령한 본성을 실현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그러지 않으면 사람답지 않은 사람 또는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사람은 천이 자신에게 무엇을 명령했는지 알아야 한다. 즉 지천 知天 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천명은 사람에게 인의예지의 네 덕목을 본성으로 실천하라고 명령했다고 할 수 있다. 천에서 성으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솔성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천이 명령한 인의예지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다. 성이 도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수도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솔성으로 실천하면서 도를 넓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넓히는 길이 바로 나를 가르치고 남을 이끄는 교가된다. (p. 108,109)

 

이 구절이 [중용]에서 제일 첫 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책의 중간즈음에 등장하지만, 첫 구절은 기억해 놓고 싶었다.

[중용]에는 중용이 없다. 우리는 책 이름을 들으면 그 안에 이름에 어울리는 내용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중용]은 그렇지 않다. [중용]에는 중용이라는 개념이 자주 쓰이지 않을 뿐 아니라 중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풀이한 내용도 없다. 그렇다 보니 [중용]을 읽고 나더라도 중용이 뭔지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용]이란 책이 [대학] [논어] [맹자] 에 비교해서 어렵다고 한다. (p. 113)

이 책에는 [중용]책이 없어서 '중용' 이 없다 치더라도, [중용] 책에도 '중용'이 없다니 그렇다면 '중용'은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그래서 예로부터 [중용]책에 대한 해설서가 많았고 주희 라는 학자의 책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하고, 정약용의 책도 의미있는 풀이라고 하는데, 필부로서 중용을 깨우치기는 더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제사는 유학을 종교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제사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고 교류함으로써 죽은 자를 주기적으로 소환하여 공동체에서 영원히 기억되게 하는 활동이다. 유학에는 사후 심판과 천당이라는 개념이 없다. 죽은 사람이 살아생전 행적에 따라 영혼이 구원되는 절차가 없다. 죽으면 육체적으로 소멸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철저히 잊힐 수 있다. 제사, 특히 명절 제사보다 일 년 단위로 지내는 기제사가 중요하다. 제사에서 향을 피워 영혼을 부르고 술을 따라 육신을 불러 제상에서 혼과 백이 만나게 된다. 제사상을 보고 후손이 자리하니 결국 조상과 후손이 만나게 된다. 이렇게 죽은 조상은 주기적으로 자신이 살았고 후손이 살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후손이 축문으로 일 년간 있었던 일을 고유하면 조상과 후손이 같은 소식을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제사를 되풀이하면 세상은 산 사람이 독점하는 곳이 아니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교류하는 장이 된다. 이를 통해 조상은 죽어도 죽제 않게, 즉 영원히 살게 된다. 따라서 제사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생명, 즉 영생을 누리게 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p. 218)

세계4대종교 라고 하면, 기독교,불교,이슬람교,유교 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유교는 종교는 아니고 철학 혹은 사상이나 동양문화권에서 종교와 같은 전통적 믿음이라 4대종교로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제사에 대해 이렇게 읽고 보니 유교의 종교성이 느껴면서 이해가 됐다. 그리고 한명 혹은 소수의 몇명만 누리는 영생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영생이라는 평등개념이 몹시 혁명적으로 보였다. 천당과 지옥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가능하고 모두에게 연결된다는 생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것 아닌가?!

[중용]은 성인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좋을 텐데, 다섯 가지라니 좀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인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이 신이라면 절대자, 전지전능 등으로 간명하게 규정할 수 있다. 성인은 신이 아니지만 범인과 다르다. 이런 성인의 특성을 설명하자니 이런 면도 있고 저련 면도 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p. 265)

첫째는 '총명예지'다. 성인의 첫번째 특징으로 앎을 내세우고 있다. 둘째는 '관유온유'다. 그것은 바로 부드러움이다. 셋째는 '발강강의'다. 기백이다. 넷째는 '재장중정'이다. 성인은 위엄이 있고 점잖으며 곧고 바르다. 기품이 넘치고 공정하다. 다섯째는 '문리밀찰'이다. 조리가 있고 디테일에 강하니 사태를 차근차근 구분하여 잘 풀어갈 수 있다.

이처럼 성인은 다섯 가지 덕목을 갖추고 있으니 사람이 노력 끝에 이른 최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p. 266,267)

 

중용의 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였으나 성인이 어떤 사람인지 읽어내며 끝났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나, 나이 오십이 넘고나면 모두가 성인이 될 마음으로 중용을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려나...

저자는 [중용]이 아름답다 하였다. 후대 학자들이 다양한 풀이를 끊임없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용] 자체는 함축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얘기다. 한자 자체가 뜻글자라서 한글처럼 문장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한구절한구절 한단어한단어 해석해 나가며 이해해야 하는데, 그 한자들로 이어진 문장들 단락들이 하늘에 구름인듯 바다위 파도인듯 눈에 읽히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시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두루뭉수리한 풀이보다는 명확한 해석이 필요한 사람인지라 저자가 전해주는 아름다움을 미처 제대로 느끼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중용 한문장한문장 풀이해주는 책을 읽고나야 이 책의 묘미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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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1 - 사회, 과학, 수학, 국어 어른을 위한 친절한 지식 교과서 1
김정화.김혜경 지음, 서원초등학교 교사연구회 감수, 박현주 기획 / 소울하우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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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나서 학창시절 때 얘기를 하다보면 자주 하게 되는 말 중의 하나가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이라는 후회같은 탄식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나름 역발상의 시도를 한 책이다. '그때 알게 된 것을 지금까지 알고 있다면' 얼마나 탄탄한 지식의 소유자로 보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역시 책 중의 책은 교.과.서. 라고나 할까. ㅎㅎㅎ 제목 그대로 정말 친절한 지식교과서 였다.

초등학교 5,6학년에서 중학교 1,2학년 국어, 사회, 과학, 수학 4과목의 핵심을 정리한 책으로 딱딱하게 단원별로 나눈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응용하기가 더 쉽게 되어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적절한 대답할 수 있도록 4년치의 지식을 질문별로 한번에 엮어 놓았기 때문에 왠지 좀더 고차원적 대답을 해주는 느낌을 주게 한다. 엄마아빠가 이걸 알겠어? 하며 미심쩍게 물어봤다가 이런 대답을 들으면 오~! 하는 감탄을 혹은 적어도 오호~! 정도의 공감은 할 수 있게끔. ^----^

사실 아이가 부모에게 질문을 해오는 때까지는 아직 아이가 어리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갖추어질수록 아이는 부모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따라서 질문하는 아이를 뒀을때가 그나마 키우는 재미가 있는 때라고나 할까. 질문하는 아이에게 '너네 배우는 교과서쯤이야' 하며 대답해주는 부모는 아이에게 나름 멋진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런 부모의 모습을 갖추는데 이 책은 정말 유용한 책이다.

지리, 정치, 경제, 생명과학, 지구과학, 화학, 물리학, 국어, 문법과 맞춤법, 문학, 수, 식과 연산, 측정단위, 비율과 확율 등 단원별로 세세하고 책 뒤쪽에 교과연계표도 정리되어 있어서 정말 구성이 깔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도 200개가 조금 넘어서 그냥 상식책으로 읽어도 쉽고 재밌게 읽혀지는 책이다. 잡학다식용 대중서가 정말 다양한 종류로 나오고 있는 요즘이다. 역사, 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망라하며 하루에 한가지씩만 알아도 일년이면 365가지를 알게 되는 것부터 한 분야를 세세하게 파고든 것까지 마음만 먹으면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책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지적 대화는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과 지적대화를 나누려면 사실 그러한 지식책들보다 이 책이 더 쓸모가 많다.

초4~중2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읽어봄직한 책이다. 더욱이 국어 에서 맞춤법 부분은 어른도 헤깔려하는 것들을 제대로 짚어주고 있어서 더욱 유용하다. 그러고 보면 배워야 할 중요한 지식은 교과서에서 다 배운 것이 맞나 보다. 그런데 왜 교과서의 지식은 그리도 빨리 잊혀졌는지;;;; 이렇게 한 권으로 다양하게 되새김질 하며 읽다보니 교과서로 봤을때는 못 느꼈던 재미도 쏠쏠한 것이 벌써부터 2권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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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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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처럼 끊임없이 재생되고 뒤섞이는

죽음에 대한 충동과 삶에 대한 열망

자신을 구하고 싶은 절실한 이들을 위한 단 하나의 소설

 

 

내가 기억을 더듬을 때 나는 이미 기억 속에 있다. 나는 기억하는가. 기억되는가. 기억되고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렀다는 생ㅇ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p. 12)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죽음. 그래, 죽음이다.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죽음만 지금 여기를 포위하기 때문에. 미완성일 때에만 온전해서 끝내 나라고는 호명될 수 없는 것. 내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리하여, 나조차 나일 수 없게 하는 것. (p. 17)

그만. 멈추고 싶다. 멈춰 있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춰지지 않아서 멈춘 것을 멈추려고. 그만. 지긋지긋하다. 죽고 싶다. 이것은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p. 25)

질문은 상충하는 두개의 선택지가 아니고, 선택할 수 없어서 무수해진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의미가 혼동된다. 그에 관하여, 그의 고통에 관하여, 나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p. 38)

나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쓸모없어지는 것. 의자에 고요히 앉으려던 것뿐인데 이미 고통이 거기에 앉아 있는 것.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가는 것. (p. 40)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만 겨우 삶을 생각했다. 아직도 살아 있다니. 오직 죽음만을 생각했다. 죽음만을 생각하는 동안 왜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는지 잊었다. (p. 55)

나는 책상 앞으로 달려가 다급히 쓴다. 문장이 완결되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마지막에 도달하지 않는다. (p. 69)

이것은 누구의 단어인가. 누구의 문장인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그녀는 그저 한번만 그 안에서 온전히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완성된 문장의 힘에 붙들려, 문장이 단언하는 바를 믿고 싶었을 뿐인데. 존재에 미치지 못하거나 존재를 초과해버리는 단어를 읊조리면,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가는 음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실리지 않아, 차라리 그녀는 언어를 잃고 싶다. 아무리 말해도 말해질 수 없다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을 멈출 수 있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되고 싶다. (p. 82)

무엇을 쓰고 싶지. 아니면 무엇을 읽고 싶지.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멈추지 않고 쓸 뿐이고, 쓴다는 행위는 쓰이거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p. 94)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p. 95)

120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문장마다 빗금치어진 무제 를 제외하면 116페이지의 짧은 소설에서 95페이지에 다다라서야 작가는 고백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이 소설의 표현방식을 따라하며 소감을 적어보자면,

나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기시작했고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인데도 소설인지 모르겠다. 소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서 소설을 끝까지 읽기로 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인물도 없고 사건도 없고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이 글을 읽으며 나는 계속 생각한다.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가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가는 죽음을 이야기 한다. 죽음은 때로는 꿈에서 때로는 음악에서 때로는 환영에서 때로는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작가의 머리에 번뜩인다. 작가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생각일 뿐 일어나지 않았기에 작가는 계속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죽음이라는 어떤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사건이 되고 시간이 되어 줄거리를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줄거리가 없다. 즉 아무 사건도 없다. 그 어떤 명징한 사물조차 등장하지 않고 소제목처럼 붙어 있는 피아노연주곡을 들으며 남긴 감상인가 싶었더니 뒤에 붙은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그냥 책으로 내면서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음악이랑 글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은 자동피아노 인가. 대체 피아노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작가는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작가가 만약 바이올린을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바이올린이 되었을까 작가가 만약 첼로를 좋아했다면 이 책의 제목은 자동첼로가 되었을까. 아니다. 피아노는 자동피아노가 있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현을 직접 켜야 하므로 자동악기가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생긴 자동악기를 만들면 되는것 아닌가. 나는 지금 소설에 대한 느낌을 적고 있는 것일까. 그냥 작가를 흉내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생각을 되짚어보려는 것일까. 작가의 마음을 공감해보려는 것일까. 나는 소설을 읽었다. 다 읽었기에 이렇게 이 소설에 대해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것이 과연 읽힐 수 있을까?

연재를 마친 뒤 한해가 지나 출간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개고를 위해 작품을 다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작품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를 돌아보기가 쉽지 않아 원고 검코를 마냥 미뤄온 탓이었다. 개고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동피아노]의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내가 본 것이 바로 그렇게 찢기고 훼손된 언어였다. 끝없는 동어반복, 논리와 인과가 없는 진술, 상충되고 모순적인 사유가 끓어넘치는 정념에 매몰된 채 뒤범벅되어 있는 광경은 처참했다. 소설을 써오는 내내 심리적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없지만, 내게는 내가 세상에 내놓은 것이 문학적으로 제련된 작품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봄에 쓴 [자동피아노]는 내가 작가로서 세워둔 최후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증상이었다.

작가의 말 中

저자는 '작가의 말' 에서 자신이 그동안 극심한 자살충동과 우울과 불안증세가 있어왔음을, 치료를 받았고 호전되기를 딱히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죽음보다 삶을 생각하게 되었음을, 그리하여 평생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변하였듯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죽고싶은 충동에 시달리며 그 충동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 작가의 글을 소설이라고 읽어야 할지 일기라고 에세이라고 읽어야할지 독백 혹은 고백이라고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가가 썼으므로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소설책이라고 출판되었으니 소설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소설은 허구인데 허구가 아닌 글을 담고 있는 이 책을소설이라 부른다면 허구라고 부른다면 작가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엇고 이것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러한 작가를 보며 이 소설은 무엇인걸까. 이책이 소설인지 아닌지 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이 소설이건 증상이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을 해본 사람이 읽는다면 어느정도 공감을 한다거나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삶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므로. 하지만 소설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이 소설이 얼마나 많이 울려 퍼질지는 모르겠다. 물론 저자는 그닥 많이 울려퍼지는 것을 원하는 것 같지 않긴 하다. 왜냐하면 저자의 이 책에 공감한다는 것은 저자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므로 저자는 자신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는 것 같으므로. 하지만 자동피아노라는 것이 원래 연주자 없이 관객도 없이 그저 저 혼자 음악소리를 내는 것이니, 작가가 없어도 독자가 없어도 이 글이 책이 되어 나온이상 죽음에 대한 생각의 돌림노래는 계속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들어주는 관객이 없기를 바라며 울려 퍼지는 죽음의 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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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 아트?
엘리너 데이비스 지음, 신혜빈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랑스러운 아트, 엉뚱한 위트, 벅찬 감동!

작은 그림책 한 권이 선사할 커다란 충격

Why Art?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외형상은 작은 그림책이긴 한데...

제목만 봤을 땐 예술에 대한 아~ㄹ트에 대한 대중서이겠거니 싶었다.

예술을 잘 몰라서 예술을 잘 알고싶어서 예술에 관한 대중서는 꾸준히 찾아 읽으려 하는 내게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책이었다.

그런데...


읽고 나서 헉 했다. 이건 뭐지???

그림책이다 보니 순식간에 읽히는데, 다 읽자마자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책이 남기는 잔잔한 여운이 아닌 강렬한 엔딩으로 시작되는 느낌을 주는 이 마무리를 뭐라 해야할까.

여하튼, 작은 ? 로 시작해서 커다란 ! 로 끝나는 이 책은 다 읽자마자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바로 떠올랐다.

 

 

 

이 책에는 9명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흑백의 단순한 그림으로 진행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기법의 예술을 추구하고 있는 친구들을 소개한다.

처음엔 색깔 크기 예술가의 의도나 관객의 반응 소재 표현방법 등 예술을 분류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소개하다가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예술가 집단을 소개한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 강한 작품들을 만들다가 '폭풍우' 를 계기로 함께 작품을 만들게 된다. 아주 안.전.한.작.품.

그런데 그때 돌로레스가 움직인다. 늘 진실어린 퍼포먼스 예술을 했던 돌로레스가. 그리고 묻는다. 어떻게 하면 우릴 구할 수 있냐고

 

 

왜 예술이냐고?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예술의 주변부를 보여주던 저자는

용기를 보여달라고 소리치면서 책을 끝낸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외침이 강하게 마음에 울린다.

묘한 책이었다. 이런 묘하게 강렬한 느낌도 감동이라고 표현한다면 이 감동이 예술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걸까 생각해본다.

질문으로 시작해서 그림으로 읽히고 퍼포먼스로 끝나는 이 책은 짧고 굵은 영상을 본듯한 느낌을 준다.

작고 안전한 상자를 부수어 내는데 예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 책이 그 힘이 되어줄 것이다. 예술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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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 다이앤 아버스, 조앤 디디온의

윤리적·정치적 미학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작가들의 공감의 가치를 뛰어넘는 비감상주의적 기획

표지 中

 

 

지은이 - 데보라 넬슨

시카고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20세기 후반 미국 문화와 정치 분야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1945년 이후 미국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 온라인 저널과 책 시리즈를 출판하는 Post45 컬렉티브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미국 시, 소설, 에세이 및 희곡 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및 젠더 연구, 사진학, 자서전 및 회고록, 미국 민족 문학 그리고 냉전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라는 표지 안쪽의 지은이에 대한 설명을 꼭 읽고 이 책을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은 지은이의 소개글을 꼭 닮은 책이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미국 문학과 문화를 시, 소설, 에세이, 사진학, 자서전 등을 통해 연구하고 그 연구 내용을 젠더의식으로 풀어내고자 한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미학적·정치적·도덕적 의무를 열정적으로 설파했던 여성 작가, 지식인 그리고 예술가들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문체의 유사성과 함께 20세기 후반 미국을 사로잡았던 고통과 정서적 표현의 문제에 대해 공통적인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 작가들은 직접적이고 선명한 시각으로 위로도 보상도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과업을 자발적으로 떠맡았기 때문에 터프하다. 이들 모두가 "감상적이지 않다"는 비평을 받은 적이 있다.

아버스, 아렌트, 디디온, 매카시, 손택과 베유를 고찰하는 것이 이 책이 지향하는 가장 큰 목적이라면, 이는 곧 2차대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우리가 고통과 맺는 관계에 대해 나눠온 이야기에 한 장章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여성 작가들은 모두, 그 과정에서 아무리 많은 걸 포기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변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들어가며 中

이 책의 도입부인 '들어가며' 는 상당히 긴 편이다. 저자가 6명의 여성 지식인을 고르고 왜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한꺼번에 이야기 하면서 주류로 인식되는 시대적 사회적 인식에 대해 이 여성들이 얼마나 차별화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긴 하다. 이후로 각 장 마다 한 명씩 설명되면서 이 6명을 묶는 통합적 관찰은 앞부분 뿐이라 다 읽고 나서 한번 더 '들어가며' 를 읽는 것도 좋다.

이 책에 나오는 6명을 다 알진 못했다. 시몬 베유와 다이앤 아버스는 이름 정도 들어본 듯 하고, 한나 아렌트와 수전 손택은 그들의 책 1권 정도 읽었을 뿐이고, 메리 매카시는 아렌트의 친구로서 알았을 뿐이고, 조앤 디디온은 전혀 몰랐다. 따라서 저자가 예로 드는 6명의 수 많은 저작들 중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이해에 힘들기는 했다. 게다가 이 책은 굉장히 미국식으로 쓰여진 연구서 같은 책이라 글 스타일도 나에겐 익숙치 않아 읽는데 노력이 좀 필요했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6명의 주요 저작들은 세계1차 대전 과 세계2차 대전 그리고 베트남전 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나는 미국이 승전국이므로 전쟁에 대한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하지만 국가가 패전국이 아니라고 해서 국민이 고통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전쟁을 지켜봤던 사람들도 '전쟁' 이라는 고통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고통을 마음을 다해 공감하고 위로하고 의지하려는 주류적 인식에서 떨어져 나와 현실을 직시하면서 때로는 냉정하다 때로는 여성적이지 않다는 식의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이 6명은 공통분모를 생성한다. 감상적과 감수성을 분리하고 비감상적 반감상적 보다는 비정과 냉정으로 오해받은 그 태도들을 터프하다는 표현으로 밖에 그나마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한 저자의 인식에 공감한다. 그리고 6명의 여성들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여성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책이냐 라고 묻는 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젠더의 인식으로서 페미니즘 책이냐 라고 묻는 다면 조금은 그렇다 라고 대답하겠다.

나의 시련이 쓸모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中)

기독교의 구원 서사는 수난을 해명하고 수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는 보상을 내린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비극이라는 양식을 파괴한다. (p. 72)

베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번뇌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베유가 보기에 구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야만 하는 천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상이다. 그리하여 천형을 통해 베유는 가톨릭 교회와 가장 큰 갈등을 밎은 주장으로 다가가게 된다. 바로 아나테마(파문)다. 베유의 연대는 교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을 포괄한다. (p. 76)

 

시몬 베유(1909~1943) 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검색해보면 기독교 신비주의 라고도 나온다. 베유는 굉장히 종교적 이타심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종교가 사람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모두를 포용하는 종교를 생각했다. 당시 노동자계층의 절박한 삶에 마음아파하며 일부러 공장노동자로 살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유의 사상은 평화주의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져 있었고 독실한 신앙인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신비주의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게 아닐까 싶다.

베유는 특유의 엄혹하도록 논리적인 방식으로 먼저 인간에게 주권이 없음을 정립한 후 구속의 당위를 구성했다. 인간 주권은 자기망상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당위는 그 부담을 공동체로 넘긴다. 천형은 언제나, 또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으나 공동체는 결코 천형에 공모해서는 안 된다. 멸절은 주권 부재의 신학이다. 베유에게 주권자로서의 개인은 영원한 판타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판타지는 온갖 종류의 자기망상, 과대망상, 그리고 압제를 낳는 휘브리스로만 유지된다. 당위에 구속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주권 부재를 인정하고 신학적 작업의 조건을 창출하여 고통과 수난을 가속하거나 불필요하게 가중하지 않는 것이다. (p. 81)

베유는 그리스 비극에서 많은 답을 얻은 것 같다. 베유의 책을 읽은 것은 없었지만, 그리스비극을 읽었었기에 그마나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베유에게는 국가도 주권도 다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는 천형이라는 비극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만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평화적이면서도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인정 후에야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베유는 굉장히 인류애적 사랑과 공동체적 공존과 자각적 개인을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베유는 글쓰기 또한 자아가 사라지고 자아를 지우는 형식이라 상상했기에 멸절의 한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p. 85)

글쓰기가 번역이라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베유가 숭모의 대상으로서든 동일시의 대상으로서든 작가의 "나"를 지우려 한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칭의 엄격한 몰개성은 화자에게서 우발성과 관점을 걷어내고 문맥이나 사적 감정의 투사가 없는 화법을 창출한다. 이런 화법은 베유의 산문에 권위를 더해주고, 심지어 가장 열렬한 논쟁에서 조차 초연함, 혹은 "얼음 같은 냉정"을 잃지 않게 해준다. 베유의 산문에 미학적 흡인력을 주는 이런 자질들은 심적인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p. 86)

베유는 작업에서 공감(감정)이 아니라 사려 깊음(사유)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수난의 사정 혹은 조건을 안다는 것을 수난자들을 안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받은 개인을 희생자라는 종種으로 분류해 엮어버리는 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99)

궁극적으로 베유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천형의 공포와 수난의 평범성을 인정하되 전통적인 기독교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베유는 인간의 무기력을 상찬하거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게 아니라 신학적 쓸모를 찾을 뿐이다. 무기력의 신학적 쓸모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약하고 제한적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천형이 지나고 남는 게 있다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고개를 들어 부재하는 신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p. 112)

 

베유의 몰개성적 문체는 뒤이어 나오는 다른 여성 작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몰개성적 문체가 비정과 냉정으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베유의 저작을 온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되 읽은 베유의 문체를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베유의 천형과 신학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라는 푸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읽어야 했다. 인생은 하늘이 내린 벌과 같은 천형이고 그리스비극에 나오는 사건들 처럼 어쩔 수 없는 비극인데 삶이란 원래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라면서 신은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식의 개념들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런 삶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라면서 너무나 열정적으로 짧은 생애를 살다간 베유의 사상은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몹시 혁명적이다.

시몬 베유 부분을 읽는 내내 이반 일리치(1926~2002) 생각이 났다. 신앙인이면서 사상가이고 종교를 초월한 인류애를 지녔으면서 소박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 그 둘 이 만나서 교류했다면 뭔가 좀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왠지 멋진 그런 사상이 나왔을 것 같은데...

베유의 '주목'이 개인들의 관계에서 도출되고 이것이 결국 더 공명정대한 정치적 세계의 초석이 된다면, 야만적으로 흐르기 쉬운 현실을 대하는 아렌트의 무방비함은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아렌트는 복수의 타인과 함께 세계를 공유하는 대가로서, 또한 공유할 세계가 남아 있기라도 한 상태를 위한 대가로서 고집스럽게 현실을 직시하려 한다. 사유와 수난, 즉 공감의 동기는 아렌트의 파리아 개념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p. 125)

아렌트는 정서적 감각이 현실을 감정의 관할에 할당한다고 암시하고 있다. 정서적 감각은 청자가 상상하는 감정에 먼저 주목한 후 눈앞의 현실에 이차적으로 주목하게 해 현실이 오히려 가상의 감정에 봉사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정은 독자를 향한 아렌트의 근본적 질타, 즉 현실을 직시하라는 요구의 핵심이다. (p. 131)

 

베유는 고통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면서 운명적이었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라면 아렌트는 고통을 직시하고 현실을 제대로 주시하며 사유하라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아렌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간극을 넘지 못했다.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p. 148)

아이히만의 무사유가 지적능력의 결핍 또는 교육의 결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아렌트는 무사유가 천성이나 사회화보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p. 151)

아렌트는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은 '무언가가 전체주의로 이끄는가 아닌가' 라고 믿었기에,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숙고에 대한 아렌트의 처방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으리만큼 명징했다. 바로, 모두 함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p. 152)

 

'악의 평범성' 이라는 개념은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태도 와 함께 굉장히 많이 오독되고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다.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개념이 아니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현실을 제대로 사유하지 않거나 현실을 아예 사유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고 자세였다. 그런데 아렌트의 사상 보다는 그저 새로운 심리학적 용어로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사상 그 자체를 보려하기보다는 감정에 휩쓸려 아렌트를 평가했었고 여전히 그렇지 않나 싶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나 아렌트 부분에서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중심으로 아렌트의 사상을 풀어내고 있는 점도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아렌트의 사상은 하이데거 와의 교류에서 많은 부분 영향을 받았고 미국으로 망명 후 훨씬 정치적이 되었으므로 아렌트의 책 몇권 뿐만 아니라 생애 전체를 바라보면서 사상을 풀어냈으면 더 낫지 않겠나 싶었다. 아렌트는 굉장히 현실참여적인 사상가였기에 그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은 사상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전체적인 조망을 살펴보기는 어려웠다.

실천은 물론이고 이론적으로도 유대감과 집단동질성을 거부한 두 여성은 그들의 지지를 당연히 예상했던 집단들로부터 파리아로 낙인찍혔다. 20세기 후반의 사회운동들이 공감능력의 치유력을 연대성의 접착제이자 진보 정치학의 연료로 권장할 때, 아렌트와 매카시는 소스라쳐 움츠러들었다. 사회 정의라는 목표가 아니라 그리로 가는 길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들로서는 이런 입장을 구분하는 게 항상 쉽지는 않았다. 공감능력이 없는 윤리학을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에, 아렌트와 매카시는 전제가 다를 뿐 도덕적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냉정한 인간들로 비쳐왔다. (p. 184)

소설가인 메리 매카시는 한나 아렌트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둘은 '같은 편에 홀로' 있는 절친 이었다. 아렌트의 사상은 매카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매카시는 소설가 였지만 상상력을 발휘해 쓰는 소설이 아닌 자전적 소설을 주로 쓴 작가로서 작품 자체로 인한 작가적 명성 보다는 당시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하는 글들로 이름을 얻은 작가였다. 그러한 글들에서 매카시는 신랄한 직시를 드러냈고 그러한 신랄함은 사상적 토대가 탄탄한 아렌트와 다르게 소설적 표현을 사용했기에 서로 공존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라고 도발하면서 매카시가 독려하는 "용기"는 역설적이다. 직시하는 자는 사실에 항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항복은 수동성과 등치될 수 없다. 오히려 항복은 열린 마음으로 변화를 대하는 고통스러운 행위다. 매카시는 지식인과 자유주의 기자들에게 사실을 막는 방엉기제를 버리라고 요구한다. ...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꾸준히 인지를 수양하는 노력이기에, 매카시는 지식인과 자유주의 파르티잔이 모두 고통스럽고 끝이 없는 자기 소외의 과정에 참여하기를 요구하는 셈이다. (p. 204~205)

저자는 매카시의 몇몇 소설들을 인용하며 매카시의 소설적 특성을 살펴보면서, 당시 주류의 소설들과 다른 문체와 관점을 가졌던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소설속에서 독자들이 불편해할만큼 날카롭게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매카시가 베트남전 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기고했던 글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아쉬웠다. 내가 봤을땐 매카시는 소설보다는 기고문들로 자신의 색을 더 많이 드러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적 재능은 그닥 별로 였던 것을 본인도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한나 아렌트 부분에서도 그랬지만 매카시도 생애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남성편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여러번의 결혼과 이혼은 한나 아렌트의 사상 못지 않게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연민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초래한 원인과 공범자가 된다. 우리가 느끼는 연민이란 무기력이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960년대 집단적 희열에 빠진 시대정신으로, 모든 형태의 미학적 실험이 우리를 에워쌌을 때, 손택은 해석학보다는 "예술의 성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인 느끼고" 감각을 통해 "있는 그대로 찬란하게 빛나는 사물들"을 체험하라고 주문했다. 논조가 열정적이기는 하지만 손택의 근본적 통찰은 매카시와 아렌트의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p. 242)

손택도 매카시와 아렌트처럼 감정적 자기 제어를 선호했지만, 감정의 전시에 엠바고를 거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체 내면의 상태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손택은 미학을 단순히 이해와 지식의 도구로서 뿐 아니라 감정 관리의 도구로 이해하기도 했다. (p. 244)

 

손택은 사상가 까지는 아니고 비평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매카시의 후계자?! 인식될 만큼 직설적 표현을 사용한 기고문들로 주목을 받은 손택은 매카시와 아렌트의 뒷 세대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상도 변하기 마련, 손택이 살던 시대는 세계대전 직후의 세대와는 또 다른 시대였다. 저자는 <은유로서의 질병> 을 예로 많이 들었는데, 내가 읽은 손택의 책은 <타인의 고통> 뿐이라 손택의 암투병 관련해서는 공감이 잘 안됐지만 사진 에 대해서는 다행히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읽을 만 했다. 손택은 보여지는 것 이면에 숨어있는 것을 제대로 보기를 요청한다. 보여지는 것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그런 면에서 손택에 뒤이어 나오는 다이앤 아버스는 손택의 비판을 한 몸에 받은 사진작가이다.

손택은 아버스가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이 내재한 실천의 호소는 전혀 없이 시각적 수사학만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양심을 움직이려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아버스가 진열하는 순수한 수난은 '마취제' 가 된다. 고통이 고통의 진통제 역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택이 주장하는 아버스 사진의 핵심 논점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 자체의 역치를 높이려는 의도다. 이렇듯 혐오가 잠식되면 위험한 결과를 낳아, 점점 더 세계의 불행에 반응하기 어렵게 만든다. (p. 274)

모든 것은 자주 접할 수록 무뎌지기 마련이다. 좋은 것도 한때고 잔인한 장면도 익숙해질 수 있다. 아버스의 사진을 본적은 없지만 아마도 아버스의 사진들은 지나치게 꾸밈없는 현실적 사진이었는가 보다. 그것도 그냥 사진이 아닌, 사람들이 보기 불편해하는 것을 찍은 사진들. 그런 사진들을 자꾸 봄으로써 그런 것들에 무뎌지는 위험을 손택은 지적한다. 하지만 아버스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사진작가였다.

흠/틈에 관한 아버스의 설명을 믿는다면, 그것을 사진에 드러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문제가 된다. 즉, 숨겨진 사적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리얼리티를 포착하는 것, 혹은 더 나아가 평범한 인간의 리얼리티를 포착하지 않겠다는 거부가 된다. 사진은 이렇게 관객과 사진의 대상 모두 동시에 볼 수 없는 "틈"이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공표한다. 아버스의 초상 사진에 대한 표준적 설명은 그녀가 이 틈을 잘 구슬려서 보이게 했다는 것, 사진 속의 인물들이 무심결에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그 숨겨진 특징보다는 그 명백함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p. 314)

아버스는 평범한 사람중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순간을 혹은 아예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진 찍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사진은 직설적이었고 '쳐다봄으로써 모욕을 주는 것과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모욕을 주는것' 의 구분을 헤깔리게 만든다. 아버스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아버스의 사진들은 적어도 그 순간 아버스에게 영감을 주었고 아버스는 자신의 사진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그 순간적 영감들을 항상 추구했던 듯 하다. 누가 뭐라하건 노골적으로.

조앤 디디온은 미국에서는 유명한 작가인가 본데 나는 그녀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어서 이 책에 등장하는 6명의 여성중 유일하게, 거의 공감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매카시와 비슷하게 감상성을 중화하고 상처를 드러내는 작품을 쓰면서도 매카시와 다르게 결코 자기 자신을 소설속에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디디온의 글쓰기 특징은 추론(글쓰기는 스스로 말한다), 경사(중심보다는 주변부가 초점에 들어온다), 몰개성(심지어 "단어의 배치" 마저 작가보다 더 큰 인지적 작위를 확보한다) 이라고 하는데, 작품을 하나라도 읽어봤어야 했었다는 아쉬움만 남을뿐...

디디온은 이 책에서 도덕적·미학적인 경성과 자신의 관계를 공공연히 검토하고 재평가한 유일한 여성 작가다. (p. 390)

디디온에게 자기연민은 굴욕적이다. (p. 402)

"네 감정은 검토하지 마. 절대로 감정을 검토하지 마.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은니까" 디디온은 딸이 (디디온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충고를 따랐고 자기연민에 대한 어머니의 교훈을 몸으로 흡수했다는 데에 좌절한다. (p. 405)

 

디디온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애매하다. 디디온의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말년에 아픈 딸에 대한 모성으로 작가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후회하는 디디온을 묘사하며 글을 마무리하는데, 앞서서 등장시킨 5명의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전체적이 아닌 부분에만 집중하더니 디디온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서술하지 않은 건지 좀 의아스럽다. 6명 중 유일하게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라 저자의 아쉬움을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데보라 넬슨의 <터프 이너프>는 이 팽배한 유비의 사회적 역학을 들여다보면, 여성의 젠더에 '할당'된 적절한 감정의 온도가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터프한 지성인들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차가운' 현실 인식을 견지하되 사회적 불의나 정치의 실패로 부당하게 수난받는 약자들을 구제하고 개혁을 선도하려는 의지만큼은 '뜨겁다'는 데 있다. 어떤 남성 지식인에 비교해도 '터프함'에서 뒤지지 않았던 이들은, 온정과 연민이란 수난자가 아니라 불행한 수난자들의 시련에 공감하는 자신의 도덕성에 심취하는 허영심에 불과하다고 믿었기에, 무력한 감상주의를 거부하고 환상없는 현실 직시에 근거한 유효한 정치적 비전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따라서 이들의 '차가움' 나아가 '비정함' 은 현실을 대하는 감정의 온도라기보다는 잘 계산된 '지적 스타일'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자 해설 中

역자의 해설은 저자가 앞에서 설명한 이 책에 대한 구상보다 좀더 잘 정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역자는 이 책이 명백히 페미니즘을 지향하지만, 막상 이 책에 등장하는 6명의 여성들은 당대의 페미니즘과 명확한 거리를 두었다고 말하면서 이 책의 모든 논의와 더불어 페미니즘의 논의도 단순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 책이라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했던 여성들만 등장하는 이 책을 페미니즘 책으로 읽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역자가 말하듯이 맹목적으로 오도하는 감정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서로 다른 유혹들에 넘어가지 않고 오직 논의의 핵심만을 직시할 수 있는 사고를 하려는 자각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해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보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사전지식 없이 논의를 따라가기엔 솔직히 좀 버거운 책이긴 했지만, 차별성 강한 행보를 보여줬던 6명의 여성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의미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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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9-12-2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소중한 리뷰가 아니었더라면, 이 좋은 책을 모르고 지나칠뻔했습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메리 더글라스 등 지성들을 인터뷰한 두터운 책이 생각났는데 정작 제목은 머릿 속에서 지워졌네요....서가에 가면 위치를 기억하니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